안동 하회河回마을은 풍산 유씨의 시조 유절柳節의 6세손 류종혜柳從惠가 조선 초 하회에 정착한 이후 후손들이 세거世居하면서 크게 번창한 가문이다. 내가 하회마을에 처음 찾았던 것은 1998년 7월31일 이었다. 당시 직장이 IMF로 어렵게 되자 연월차 휴가를 쓰도록 권장해 우리가족은 전라남도 고창 선운사에서 1박한 후 지리산을 향해 가다 돌연 하회마을로 목적지를 변경 했었다. 이유는 지리산은 여러번 갔으니까 다음에 가기로하고 이제껏 가보지 않았던 곳을 찾아 떠난 곳이 하회마을이다.
우리가족은 고택에서 민박을 했는데 굵은 소낙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그날 밤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툇마루에 걸터앉아 옥수수를 먹으며 망중한을 즐겼다. 그리고 다음날 TV를 보며 깜짝 놀랐다. 지리산에 폭우가 내려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는 뉴스였다. 만약 계획대로 우리가족이 지리산으로 향했었다면 불귀의 객이 되었을지 모르기에 더욱 피부로 와 닿았다. 무슨 기운이 우리를 하회마을로 이끌었는지 모르지만, 한순간의 선택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했다. 당시 하회마을은 여느 마을처럼 조용하고 한가한 농촌 마을 이었다. 다만 충효당은 관람객을 맞는 직원들이 있어 다른 곳과 달리 들고 날 때 격식을 차려야한다는 것에 나름 숙연함을 느꼈었다.
1999년 4월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하회마을을 찾은 후 이곳의 모습도 확연히 달라졌다. 우선 한가하던 농촌마을에 관광객 수가 증가하다보니 본업이 바뀐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농부들보다 마을 곳곳에 장사꾼들이 보이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관광객들로 마을은 어수선하기 이를데 없다. 또 재정비를 한 탓에 골목이 깨끗하고 시원시원하긴 한 데 예전의 한가로움과 자연스러움은 사라졌다. 성형미인처럼 정형의 미는 갖추었으나, 인공적인 냄새가 풍겨나니 자연스러움은 사라진 것이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커다란 주차장이 있는 데 일반 탐방객은 이곳에서 차를 두고, 마을 입구까지 무료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로 이동해야 한다.
우리 일행은 저녁 무렵 하회마을에 도착했다. 숙소에 간단히 여장을 풀고 하회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뚝 방에서 서산을 바라보니 낙조가 장관이다. 그러나 붉은 태양은 숨가쁘게 하루를 보낸 듯 허겁지겁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다.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모양이 용틀임 같기도 하고 태극太極같기도 한 하회마을은 음양의 조화로움에 조선 건국 이래로 국가변란 때마다 옛 모습 그대로 온전하게 보존해 왔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서 차량통제를 하는 어른께 맛집을 물으니 주차장 옆에 풍물장터를 알려준다. 풍물장터라지만 한가한 시골마을에 음식점 두 서너 곳 있는데 가격 대비 해 음식 값은 별로 싸지 않다. 안동찜닭이나 간고등어가 한상에 4~5만원 한다. 여행 중에는 지방 토속음식을 먹는 것이 여행객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보니 아마 음식 가격이 부풀려진 것이 아닐까?
저녁에 안동찜닭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예전에 동네에서 들려오던 개구리 울음이 정겹게 들려온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귓볼을 스치니 상큼함에 몸이 해체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 이~맛이야 !' 저절로 기분 좋아지는 느낌, 우리가 묵는 초가는 마루가 없어 멋스러움이나 낭만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비오는 날 툇마루가 놓여진 곳에서 지짐이를 붙여 놓고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면 정말 낭만적인데 그런 낭만을 즐길 수 없는 집이다. 농담으로 상놈의 집이라 했는데 알고 보니 이집 주인도 풍산유씨로 유절柳節 후손이라고 한다. 아저씨는 연세에 비해 건강하고 부지런 했다. 게다가 유순하기까지 해 마치 새색시가 수줍어하듯 손님을 맞았다. 마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말씀은 청산유수와 같다.
우리가 머물렀던 민박집과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탈렌트 유시원의 집이 있다. 집의 이름이 담연정澹淵亭이다. 뜰이 넓어 영국여왕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잔칫상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는 가족이 살지 않고 가끔씩 가족이 내려와 머물다 가는데 사랑채가 유시원이 내려오면 묵는 곳이란다. 그날은 담연정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마도 유시원의 어머니와 친구가 내려온 것 같다고 말한다.
저녁 먹고 바로 잠자리에 들자니 하룻밤이 너무 길 것 같아 형님가족과 우리가족이 화투를 했다. 참고로 우리가족은 초자고 형님네 가족은 타자다. 화투판에서 돈 딴 사람이 다음날 영덕에서 회鱠를 사기로 하고 시작했는데 결과는 놀랍게 처음 화투장을 만져 본 아내가 땄다 . 저녁 열두시까지 재미있게 놀다 잠자리에 들려하니 주인아주머니가 옆방 예약 손님이 오질 않아서 방이 비어 있으니 편하게 자라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밥값을 계산하려 주인에게 "얼마냐고 묻자" 아침 밥값 사만원에 방값 오만원 별도란다. 아니 예약한 손님이 오지 않아서, 빈방이라고 해 잤는데 방값이라니? 민박집주인과 난 서로 다른 셈을 했구나! 나는 호의로 받아들였는데 주인은 그 방을 우리에게 사용료를 받을 계산을 한 거였었다. 확실하게 물어보고 이용했어야 하는 건데, 왠지 바가지 쓴 느낌이 든다.
하회마을은 풍산 유씨 집성촌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중 명장인 이순신과 곽재우를 천거한 인물로 유명하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어가를 호종했던 충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당파싸움으로 단 하루 만에 물러나야했던 불운을 격기도 했다. 또 국가 재난을 염두에 두고 쓴 징비록은 최근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책이 되었다. 담연정에서 가까운 곳에 충효당이 있다. 다른 가옥과 크게 다르지 않아 동네를 돌고 돌아 찾아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충효당은 유성룡의 유품과 교지를 전시한 유품 전시관이 있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건물의 외벽은 페인트가 떨어져 있고 내부도 왠지 쇄락해가는 집의 분위기가 돌아 썰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관광객을 맞느라 분주한 반면 하회마을의 중심에 있는 유성룡의 "충효당"은 퇴색해 빛바랜 사진첩 모양으로 관광객을 맞고 있어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 하회마을에는 영의정 유성룡이 있어 이름을 얻었으나 유성룡의 발자취에는 하회를 찾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은 마을 주민들이 옛날 풍경을 재연하는 데 동원된다고 한다. 남자는 볏짚을 이용한 공예와 갓 쓰고 동네돌기, 여자는 다듬이 두드리기 베틀 짜기 등 옛모습 재연한다.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기에 열중하는 반면 충효당 관리는 엉망이다. 관광객을 쫒는 후손들 때문에 유성룡의 명성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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