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이 한국 드림으로 붕괴되 가고 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천지의 숭엄(崇嚴)한 자태가 영기(靈氣) 흐르는 신묘한 산임을
알게한다. 백두산은 중국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1/3은 중국 땅이고 2/3는 북한 땅이다. 백두산이란 이름은
화산활동으로 부식토가 산정상에 하얗게 쌓여 붙여진 이름으로 흰 머리리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청나라 때 장백산신으로 봉한 후 창바이산(長白山)이라 부르고 있다.
백두산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하고 있다. 연변엔 220만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성인들은 도시로 돈을벌기위해 떠났고 노인들과 경제활동 능력이 떨어지는 젊은이들 40만이 모여 살고있다. 조선족이 돈을 벌기위해 찾는 곳은 대부분 한국이다. 한국에 가기위한 수단으로 위장 결혼한 사람의 50%는 이혼을 했다고 한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연변에 남아있는 젊은이들은 술과 담배 등 유흥문화에 쉽게 빠져들고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부모의 보살핌이 없고 가족을 그리는 외로움이 빚어낸 사회문제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부부가 떨어져 살면서 서로 관계가 소원해지고 결국이혼하는 사례를 종종 봐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 곳 젊은이들의 꿈은 성인이 되어 우리나라에 정착해 사는 것이다. 한류의 열풍과 선진화된 사회를 경험하면서 갖게된 꿈이다. 우리나라의 TV를 시청할 수 있으니 문화적 동경은 꿈이 아니라 삶의 목표로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있다. 또한 한국에서 3~4년 돈을 벌면 연변에선 넉넉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코리안 드림을꿈꾸고 있다.
우리는 장춘을 통해 백두산을 갔다. 장춘에서 이도백하까지 6시간 30분을 가는 대장정이다. 미니버스는 불편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썩 쾌적하지도 않았다. 일행중 제일 젊어 뒷좌석에 앉아야했고 차의 Rolling(롤링)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중앙선을 넘나들며 달리는 운전사는 곡예를 하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위험하게 운전하는지 묻자 저녁 시간이 늦어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란다. 저녁먹기전 사자(死者)밥 먹게 생겼다. 늦어도 좋으니 천천히 가자고 하니 여행 가이드가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중국의 측간(厠間)은 독득하다. 좀 민망하다고 하는편이 낳을 것 같다. 우선 문짝이 없어 민망한 모습을 가릴 수 없다. 개량주택은 수세식이 도입되어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지방엔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의,식,주를 중히 여긴 반면 중국은 식,주,의다. 그래서 일까 주택은 외관이 허름하기 짝이 없다. 시멘트 골조에 페인트 도색도 하지 않아 초라하기 짝이없다. 그러나 내부는 화려하게 장식하고 산다고 했다. 부정 부패 척결에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생겨난 풍조로 외빈 내유(外貧內裕)가 자연스레 몸에 베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음식은 풍요롭다. 한끼를 먹어도 기름진 음식들로 산해진미를 이룬다. 고량주와 곁들여 먹는 식사는 여행의 풍미를 더욱 느끼게 한다. 반면 옷에 대해선 크게 신경쓰는 것 같지 않다. 공항에서 조차 런닝셔츠에 금목걸이를 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격식보다는 생활에 편리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은 진짜와 구별이 잘 안되는 가짜가 많다. 먹는 음식에서 타는 승용차까지 짝퉁과 가짜가 판친다. 그렇다보니 물건 가격도 부르는게 값이요 깎는 것이 듬이다. 도대체 얼마를 깎아야 제값에 사는걸까? 사면서도 찜찜한 것이 중국에서 물건사는 것이다. 흥정과 줄다리기는 정말 이들이 세계에서 최고의 장사꾼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한다. 백두산 관광을 끝내고 비룡폭포와 소천지와 녹연담을 구경하고 나오니 장뇌삼 한뿌리가 만원이란다. 원기회복을 위해 한 뿌리 사먹었다. 또 산에서 캐온 산삼이 약간 큰 것은 오백만원, 중간 것 백오십만원 그리고 작은 것이 십만원이라며 유독 나를 찍어 꼭 사야한다는 말을 하며 내뒤를 졸졸 따라 다닌다. 마수걸이를 못했다며 매달리는 데 집요하기 짝이 없다. 가격도 내가 얼마에 살수 있냐고 되 묻는다.그의 집요함에도 물건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은 과연 산삼일까? 의심이 앞서 서다. 그의 성화에 "뿌요(싫다)"라고 응수하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뜬다. 흥정의 집요함, 끈기, 그리고 내 가방에 있는 빵을 마치 제 것인양 먹는 뻔뻔함까지 장사꾼의 끼로 가득하다.
연변과 연길을 구분할줄 아느냐고 가이드가 묻는다. 연변 안에 연길이란 도시가 있다고 한다. 조선족 자치주 연변은 우선 원칙이 있다. 거리에 모든 안내판과 상호는 한글로 쓰고 보조로 중국어를 쓰게 되어있다. 도심 인근에는 헤란강이 흐르고 야트막 한 산위엔 일송정이 있다. 나무도 옛것이 아니요. 강도 옛날 푸르 던 강이 아니다. 일송정의 푸른 솔은 일본군이 고사시켜 죽였고 그자리에 다른 소나무를 심었단다. 헤란강도 오수로 혼탁해졌다.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용정중학교가 있다. 옛날 윤동주, 문익환, 최헌(북한) 등이 동문수학했던 학교로 지금도 그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건물 한켠에 역사관을 만들어 놓고 방문객을 맞았다.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이나 지금은 중국에서 밖어 오를 수 없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 정상까지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있어 쉽게 오를 수 있지만 산의 영묘함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산자락을 포장해 산허리가 깎이고 그자리를 승합차가 달리다보니 웅장한 백두산의 모습 온데간데 없고 대신 도시의 일부처럼 관광객을 나르는 승합차만 분주히 왕래한다. 산에 군락을 이루는 백칼나무와 정상 인근에 자생하는 백년초가 매연에 몸살이를 하고있다. 승합차는 굽은길에도 브레이크를 밟지않고 달린다. 그렇다보니 답승자들은 좌우로 쏠리는 차안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어야 한다.
백두산 정상과 아래는 기후가 전혀 다르다. 햇볕이 쨍쨍찌는 날에도 백두산 정상은 구름이 끼고 비나 눈이 내린다. 3대가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지를 보기위해 오른 사람들은 내려올땐 제 각각 표정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짧은 시간 이지만 천지의 속살을 봤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되다보니 희비가 교차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일행은 다행스럽게 잠시 잠깐 천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연무가 완전히 겉히지 않은터라 육안은 제법 선명한 천지를 봤지만 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절반의 성공인 셈이다.
백두산에 오를 때 금해야할 4가지가 있다. 우산, 프레카드, 목걸이, 스틱이다. 프레카드를 제외한 3금은 벼락과 천둥이 잦은 백두산에서 벼락에 노출되지 않기위한 재난예방이다. 그리고 또하나 프레카드는 중국에서 백두산은 장백산인데 우리가 우리민족의 영산으로 쓴 프레카드를 내걸고 사진찍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중국의 동북지역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무관치 않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펼치는 역사왜곡 프로젝트로 발해와 고구려 때 우리 영토였던 곳을 현재 조선족이 살고있다. 티벳을 흡수 통일한 그들에게 동북지방은 조선족이 계승해오고 있는 우리민족 문화마져 지워야 할 땅이다. 최근 조선족의 이탈 현상은 아마도 그들에겐 호재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족과의 혼인을 장려하는 점과 조선족의 신분상승 제한 등은 좋은 예다. 중국의 동북지역은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의 숨결과 얼이 배인 곳이다. 미래에 우리가 되찾아야할 영토가 아닌가?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면서까지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하는 데는 부끄러운 과거사가 미치게 될 민족정신의 궤멸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기보다 왜곡하므로서 그들의 주체성을 세우려는 의도가 크다. 최근 고노담화마져도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는 추락하는 일본의 자존심을 보는듯해 안타깝다. 중국도 자국 영토를 지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동북공정은 조선족의 사회가 쇠락하면서 더욱 그 기세가 더해지고 노골화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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