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동양화나 山行記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산은 아마 금강산이 아닐까 싶다. 왜 금강산이었을까? 조선사회의 주류(主流)는 양반이었다. 당시 산행을 할 때 그들은 걷기보다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고 떠났다. 아마도 유람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듯 여유로움과 풍류가 산행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산행을 떠날 때는 일반적으로 벗과 유흥을 돋우는 기생이 동행했다.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창을 하는 기생들과 遊興을 즐기며 친목을 다졌고 산을 오르기보다 산세의 수려함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 산은 놀이공간이고 예술적 감성을 돋우는 장이었던 셈이다.
2006년에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채 군사적으로 적대관계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 우리의 안전은 과연 담보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려한 일이 현실로 드러났다. 북측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려할 때 군복을 입은 직원이 여권사진과 내 얼굴이 다르다며 나의 턱수염에 대하여 시비를 건 순간 공포감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또 숙소 근처에 북한군의 부대가 있어서 수시로 이동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자주 목격될 때마다 그 두려움은 영 가시지 않았었다.
금강산의 백미는 만물상이다. 사실 만물상은 기암괴석의 군상을 참참이 들여다보며 즐겨야 제 맛이다. 그러나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어 눈앞에 몇 가지 특징적인 것들만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지나쳤다. 금강산을 두고 왜 최고라 했을까? 조선시대 명성이 그대로 굳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설악은 만물상보다 더욱 웅장하고 굵은 등줄기를 지닌 공룡능선이 있다. 그리고 중국무협지에서 봄직한 수려한 천불동계곡과 수렴동계곡이 있다. 이곳이 조선시대 풍류객들을 담지 못한 이유는 가마꾼들이 범접할 수 없는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설악을 찾았을 때의 설렘은 아직도 나의 심장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과연 내가 설악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 내 두 눈에 설악을 담을 수 있을까? 묻고 물으며 좌불안석 하던 모습은 똥마려운 강아지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소청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은하수는 마치 손에 잡힐 수 있는 거리에 있듯 선명해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설악에서의 추억이 밤하늘의 별이었다면 지리산에서의 추억은 가을 단풍이다. 직장동료들과 함께 지리산 피앗골을 갔을 때 가을비가 촉촉이 내렸다. 길 위에서 비를 머금은 단풍잎이 너무 고아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 아직까지 가을 단풍이 나의 심금을 울린 적은 단 한번 도 없다.누가 산을 왜 가냐 굳이 묻는다면 산은 어머니 품처럼 따듯하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산에서 난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나기 때문에 그래서 마냥 좋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왕산에서 북악산을 넘고 인사동에서 피곤한 다리를 매만진다. (0) | 2014.02.14 |
---|---|
심장 떨림이 경우에 따라 다른 의미를 담고있는 언어적 유희 (0) | 2014.01.23 |
길들여 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 그리고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 (0) | 2013.11.13 |
어린왕자가 꿈꾸는 세상 (0) | 2013.11.13 |
행복 발전소 (0) | 2013.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