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왕산에서 북악산을 넘고 인사동에서 피곤한 다리를 매만진다.

해암 송구호 2014. 2. 14. 19:49

 

  조선이 건국된 이후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왕족과 문벌귀족이 살았던 개경에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다는 것이 찜찜해 새 도읍지를 찾던 중 무학이 찾아낸 곳이 한양이다. 그런데 오래 전  신라 고승 도선은 무학대사가 훗날 이 곳을 찾게 될것을 알고 북한산 비봉에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라는 푯말을 세웠다고 한다. 몇백년 후에 일어날 일을 콕 찝어내는 신공(神功)은 소름이 돋을만큼  놀랍다.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진 곳으로  더욱 잘 알려진 곳이다.

 백악산 아래 한양 땅은 오래전부터 목자 득 국(木子 得國)이라는 설이  회자되었던 곳이다. 목자란 이(李)를 파자한 것으로 이씨가 왕이될 기운이 서린 땅이란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런 소문이 떠돌무렵 고려는 쇄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민생고가 극심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많았다는 사실이다. 고려왕조는 이 곳에 오얏나무를 심고 나무가 꽃을 피울무렵 베어버림으로 왕기를 누루려 했다.

 서울이란 이름에 대한 유래도 재미있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백악산 아래 도읍을 세우고 성곽 경계를 어떻게 정할까 고민하던 차에 눈이 내렸는데 눈이 쌓인 곳이 신비하게도 도성의 경계로 너무 안성맞춤이라 성벽을 쌓고 수도의 이름을 설(雪)울로 지었다고 한다. 올들어 서울이 수도가 된지 620년이다. 서울은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는아름다을 지닌 도시다.  도심에  북한산과 한강이 흐르고, 오랜역사를 담고있는 문화가 살아 숨쉬는 도시가 어디 흔한가?   봄이오면 서울 근교에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을 등산하는 것도 좋다. 진달래 꽃과 벛꽃이 한창일 땐 이 곳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따듯한 봄기운과 재잘대는 산새소리를 들으며 긴 겨울 동안 움추러들던 어깨를 펼 수 있는 가벼운 산책을 겸하기에 더욱 구미가 당기는 산행이다. 독립문역에서 내리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이 고통을 당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으로 당시 형신을 당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꾸며 놓았다. 이 곳엔 공원도 잘 조성돼 있어 잠깐 둘러본 후  인왕산에 오르는 것이 좋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맞은편 아파트 가는길을 따라조금 오르다보면 이정표가 보인다. 봄이면 개나리 꽃이 노랗게 피어 예쁘다. 인왕산 정상은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서면 서울시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360도 돌면서  조망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현재 모습을 보며 놀라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과거와 비교하면서 서울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인왕산에서 서울시내를 조망한 후, 북악산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중간쯤에 '수성동 계곡'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피서를 즐기던 곳으로 최근  복원공사를 끝내 옛 모습을 되 찾았다. 겸재 정선은 금강산 등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자신이 살았던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일대를  여덜폭의 진경으로 담아 "장동팔경첩"으로 남겼는데 무릉도원처럼 수려한 수성동 계곡의 모습이 포함돼 있다. 현재 간송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북악산을 오르기 전, 창의문을 끼고 동북방향으로 난 소로를 따라 대략 750m 언덕을 올라가면 "산모퉁이란" 까페가 있다. 드라마 커피프린스에 나왔던 집인데 백악산과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 곳은 인사동에 있는 "목인 겔러리" 주인의 작업실로 쓰이던 곳인데 드라마 촬영 이후, 방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자 아예 "산모퉁이"란 까페를  열었다고 한다. 

 북악산은 청와대를 지척에 두고있어 경비가 삼엄하다. 입산 시간도 계절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고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 산에 오르기 전 출입절차를 밟아야하고, 운좋으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등산할 수 있다. 성벽을 따라 오르다 뒤를 돌아보면 인황산 오른쪽 2시방향에 "석파정"이란 아담한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말 안동김씨 일족이던 김흥곤의 별장으로 파락호 시절부터 흥선대원군이 몹시 탐냈다고 한다.별장을 손에 넣기위해 잔꾀를 낸 대원군은 석파정에 고종을 모시고가 하루밤을 머물게 했는데 왕이 머물렀던 곳은 신하가 머물 수 없는 것이 조선의 법도라서 꼼짝 못하고 빼앗기게 됐다.

  김흥근은 안동김씨 세도를 업고 출세한 인물로 젊은시절 갖은 방법을 써 부정축제를 했는데, 한번은 남의 돈 2만냥을 갈취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재사 정수동은 그의 못된 짓을 더이상 놔둘 수 없어 그의 집을 찾아 갔을 때 마침 여종이 다급한 목소리로 주인을 찾았다. "아기가 동전을 가지고 놀다 삼켰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 이 때 정수동이 여종에게 물었다. 그 돈이 뉘 것인가? 여종이 자기 것이라 답하자, 껄껄 웃으며 이사람아 여기 안주인은 남의돈 2만냥을 꿀꺽하고도 두다리 쭉뻣고 늦잠까지 자고 있는데 제돈 한닢 먹은게 뭔 대순가?"라고 농(弄)하자  김흥근은  크게 깨닫고  남의 돈  2만냥을 돌려주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 청렴하게 살았다고 한다. 

 북악산 정상을 지나 잠시 걷다보면 길 옆에 특별한 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1968년 1월21일 남파 공작원이 청와대를 습격사건 때, 교전 중  총탄을 맞은 소나무로 죽지않고 살아서 그 시대의 아품을 고스란히 품고 서있다. 북악의 백미는 4월 중순 벗꽃과 진달래가 필무렵이다. 벗꽃이 산허리를 감싸고 연분홍 진달래가 산 곳곳을 수놓은 모습은 봄의 진경을 한눈에 보는 듯하다. 거기에다  가까이서 북한산을 바라다 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하산길에 와룡공원길과 삼청공원길이 있는데 와룡고원길은 감사원과 북촌마을로 연결된다. 벗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질무렵, 꽃비가 내리는 길을 내려올 때면  센티해지는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다. 그리고 고풍스런 북촌을 둘러보면서 가까이 보이는 청와대와 경복궁을 조망할 수 있어 좋다.

 겨울엔 삼청공원을 이용한 하산길이 좋다. 우선 길이 짧아 지루하지 않고  바로 내려올 수 있다. 내려오다 보면 골목길에 펼쳐진 먹거리가 오감을 자극한다.  삼청동 수제비가 특히 이목을 끈다. 식사 때를 조금지나서 일까? 맛이 일품이다. 음식은 역시 배가 고파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식사를 하면서 충분히 피로를 푼 뒤 여력이 된다면 인사동으로 간다.

 사실 인사동길은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다. 사람구경이나 하고 무료로 개방하는 갤러리에 들려 안목을 쌓은 뒤 찻집에 들려 차를 한잔 마시면 그만이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세종문화 회관쪽으로 가다보면 일본대사관을 지나게 된다. 전경들이 길목을 지키고 서있다. 일본 대사관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전경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한일관계는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 미묘한게 가깝고 먼 이웃이다. 아직도 과거사를 반성할줄 모르는 뻔뻔함과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며 우겨대는 파렴치함이 소름을 돋게한다.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과격한 모습을 보면  과거의 군국주의자들이 되살아난 느낌이 든다. 그들의 속내를 어찌 알까?

 대사관 맞은편 엔  의자에 앉아있는 소녀 동상이 있다. 겨울이라고 누가 털모자까지 씌워준 천진 난만한 소녀, 일제시대 정신대로 끌려갔던 한 많은 소녀다. 골목이 어둡고 침침하니 더욱 쓸쓸해 보인다. 전경마져 길목에 서성이지 않는다면 웬지 더욱 초라할 것만 같다. 과거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란 말조차 아끼는 자들과 어떻게 미래의 발전된 관계를 논할 수 있겠나? 남의 영토를 지기네 영토라며 열을 올리고 있는 저의가 무얼까? 혹여 다른 침략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사가 뒤틀린다. 땅에 돌이라도 있으면 대사관 유리창에 던져야 속이 편해질 것 같다. 

 역사의 상흔을 안고있는 곳에서 시작한 발걸음이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곪아가는 곳을 걷고 있자니 속내가 씁슬하다. 남북관계,한일관계 그리고 중,러,미와 사이에서 그네들 속내까지 들여다 봐야하니, 우리나라 정치가들은 참 일하기 힘들 것 같다.  너무 복잡해서 포기한걸까 ? 여의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