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어느별에서 왔는지 모르며 또 돌아가야할 곳 조차 뚜렸하지 않아 삶의 끝자락이 두렵고 외롭다. 그러나 현재의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러한 불안은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다. 태어난 이후로 여직껏 나의 몸과 정신은 하나로 유지해 왔고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우주의 질서는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질서를 갖고 운영되어 진다는 점이다. 우주를 운영하고 있는 주인이 하나님이든,부처님이든,아님 여타 어느 신이든 존재의 가능성에 부정보다 인정해야 함은 우리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일년을 모르는 것처럼 삶의 유한성은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 아님을 암시하는 하나의 확실한 단서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은 살아있을 때는 육체를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과 동일한 모습을 지닌 개체를 지속해서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유한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고 또한 이질적 존재로 자신들이 생활해왔던 곳에서의 영속성을 담보하려한다. 육체적 유사성외 정신세계는 어느 누구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조하리의 창에서 언급된 것처럼 자신도 타인도 모르는 무의식이란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비는 탈피(脫皮)란 것을 통해 새로운 모습의 생명체로 변화한다. 이것이 생명체 순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죽음이란 휴면기를 맞으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 태어나며 그 순환의 고리가 이어져 갈까?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처럼 자신의 과업에 따라 차등되는 것일까 ? 과연 그런걸까? 나의 생각은 그것과 다르다. 모든 생명체 엔 순환주기가 제 각각이다. 따라서 그들의 섞임은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코끼리는 코끼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원숭이는 원숭이로 존재한다.
신은 모든 삼라만상에 엄격한 서열과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의 관계를 규정하였다. 따라서 각자의 주어진 묷에서 공과는 엄연하게 존재하며 그에 따른 상과는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으로 치자면 빈부에 따른 격차와 삶의 환경에 대한 격차가 있을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사람과 유럽에서 태어난 자는 삶의 질적차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예화(例話)를 들자면 '아프리카에 선교사의 아들이 그 곳 아이와 친구로 지낼 때 그 친구가 자신보다 훨씬 유능했고 꿈도 컸었다. 그러나 성장해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아프리카의 꿈많던 소년은 아버지가 하던 삶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이야다. 지옥과 천국을 따지자면 이 곳 자연이 존재하는 지구안이 아닐까?
어차피 육체는 우리 영혼의 집에 불과한 것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그 곳이 천국이고 지옥이다. 어떤자는 자신이 짊어질 수 조차없는 큰 보따리를 억지로 지고가려 제자리 걸음만 하다 시간을 다 소비하고 어떤자는 제몸에 걸친 옷도 무겁다 벗으려한다.
욕심이 머무는 곳이 지옥이고 버리면 천당이다. 마음이 불편하면 육체는 썩어가고 병들어 죽고 말게되니 영혼은 또다른 집을 지으러 떠나게 된다. 큰 것을 구하려면 마음속 깊이를 크게하는 닦음이 선행되어야한다.
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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