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기

베트남 여행기1

해암 송구호 2019. 6. 18. 07:11




 5월 10일에 베트남을 갈 예정이었는데 하루 전날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한 달 후인 6월 12일에 베트남 하노이, 옌뜨와 하롱베이를 여행했다. 베트남은 6월이 가장 덥다고 한다. 습도가 높아서 햇볕이 쬐는 한낮엔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몹시 힘들다. 마지막 날 전동차로 서호를 도는 투어를 마친 후 36거리가 있는 호엔깜느의 야시장을 관광하는 데 자유시간 한시간 중 단 10분도 못 버티고 에어컨이 있는 커피숍으로 되돌아왔다. 의지가 박약한 우리와 상반되게 현지인들은 음악을 틀어 놓고 댄스를 즐기고 또 아마추어 가수들의 노래와 춤을 즐겼다. 

 호엔깜느도 우리나라의 대학로처럼 매주 토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 관광객과 시민이 함께 어우러져 즐기는 문화광장이다. 베트남은 2030세대가 국민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활력이 넘치는데다 빠른 기술 습득으로 생산성이 높아 외국의 기업들이 앞다퉈 진출하고 있다. 1990년 이후 연평균 경제성장율이 7.6%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 올 경제성장율도 6.3%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처음 여행 상품을 선택할 때 우리가 탈 비행기가 베트남 항공인 줄 알았다. 탑승을 앞두고 Tway항공으로 간다는 사실과 Tway가 저가항공사란 걸 이번에 알게됐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03년 충청항공으로 출발, 2004년 (주) 한성항공으로 상호를 변경해서 운영중 2009년 기업이 어려워져 회생 절차를 거치면서 2010년 Tway로 항공사 명을 바꿨다고 한다. 

  저가항공은 제주도 갈 때 처음 타본 후 이번이 두 번째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좌석 공간이 비좁은 데다 엔진 소음마저 유난히 컸다. 기내에서 특별히 제공될 게 없으니 승무원들은 할 일이 없어 편하겠다는 쓸데 없는 생각도 하게된다. 

 

<한식당에서 청국장을 시켜 놓고 기다리다 한 컷 찍었다.>

 

하노이에 있는 노이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2시 30분이다. 베트남은 한국인 가이드가 공항에 나와 픽업을 못하도록 돼있다고 한다. 현지인의 직업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유럽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국립공원이나 정부에서 운영하는 곳에 들어갈 때는 현지인 가이드를 대동해야 한다. 입장권을 끈을 때도 그들이 하지 않으면 단체관람의 표를 끊을 수 없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약 20분이 걸렸다. 가자마자 잠을 자는 것이 첫째 날 스케줄이다.



전체 12명 중 우리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10명은 친목계원이라고 한다. 알고 보니 김포공항 항공 터미널 근처에 살던 주민들로 오랫동안 알고 지내다 나이가 들어서 여행을 함께하는 5쌍의 부부팀이다. 도시가 재개발되면서 원주민은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이른바 젠트리 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에 의해 현재는 각자 떨어져 살지만 친목계를 통해 끈끈한 정을 나누는 것이 보기 좋았다. 공항에서 일행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 부부를 제외한 일행이 친목단체란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했다. 혹시 이빨에 낀 고춧가루처럼 여행 내내 소외되거나 나의 행동이 도드라져 일행에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루비콘 강을 건너간 것을.



 둘쨋날 하노이 국립 역사박물관에 갔다. 관광여행 중 역사박물관 관람은 시답잖은 코스다. 우리나라 역사 박물관도 한 번 가본적 없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베트남 역사 박물관에 들어간들 그 나라 유물들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겠는가? 우리나라 말로 해설사가 설명이라도 한다면 모를까, 각자 관람하도록 풀어 놓으니 박물관내 유물이 사진 촬영을 위한 소품이 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 몇장 찍고 나니 더이상 보고 자시고 할게 없다. 일행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한켠에선 베트남 초등학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어 우리와 사뭇 대비가 된다. 

 

 베트남은 외세의 침략이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그중 하나가 중국의 남하다. 이 나라는 물산이 풍부한 곳이다. 남베트남은 1년에 4모작을 하니 풍요를 누리는 곳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랑 미는 안남미로 남베트남을 이르는 안남에 쌀미가 덧붙은 말이다. 북베트남도 2모작이 가능하다. 옛날 우리나라 만석지기가 부럽지 않은 기름진 옥토는 중국의 남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베트남은 중국, 프랑스나 미국을 상대로 싸워 주권을 지킨 자주 국가다. 특히 미국의 군사개입 시발점이 된 1965년 「통킹만 사건」 이후 베트남에 쏟아부은 화력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끈질기게 버텨냈다. 특히 밀림지대에 뿌린 고엽제는 생태계뿐 아니라 원주민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쳤다. 랜치핸드 작전(Operation ranch hand)으로 명명된 고엽제 살포는 밀림 속에 숨어있는 월맹군의 근거지를 파괴하고 농업지대의 경작을 불가능하게 해서 게릴라의 식량 공급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다이옥신이라는 발암물질이 다량 포함돼 있어 전후 후유증이 컸다.  

 1969년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군이 철수를 한 후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통일됐다. 과거 동학민난 때 농민들의 죽창과 일본군의 조총에 비유될 만큼 큰 화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은 신형 무기를 앞세운 미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워 주권을 지켜냈다는 것은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일이다.

 베트남의 금성 홍기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빨강은 혁명의 피를, 황색 별의 5개 각은 지식인, 노동자, 농민, 청년과 군인을 상징한다. 단결로 외세로부터 베트남을 지켜낸 자부심이 국기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미군과 전쟁을 앞두고 북베트남의 고산 분지로 중국산 대포를 나를 때 부품을 완전히 분해해서 고산 원주민이 등짐을 지고 1년간 비밀리에 날랐는데 어느 누구도 이 작전을 발설하지 않아 미군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군사력에서 비교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단결력을 통해 베트남을 지켰고 자유를 쟁취했다. 

 

  옌뜨사원은 베트남 북쪽에 위치한 불교의 성지다. 고승의 사리탑이 500여 개가 있어 뾰쪽탑의 숲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이곳이 더욱 특별한 것은 천년고찰 화인사가 산 중턱에 있는데 몽고의 침략을 물리친 후 선왕이 출가하자 아들과 손자마저 그 뒤를 따라 출가한 후 부처가 되었는데 온 국민이 수호신으로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깃발이 센 곳이라서 요즘도 이곳에 와 기를 받아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3대에 걸쳐 왕이 출가를 한 것은 호국을 위한 강한 의지와 외적에 맞서기 위한 백성의 단합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신라시대 때 용왕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해중 왕릉(海中 王陵)인 대왕암에 묻힌 문무대왕과 생각이 비슷했던 것 같다. 외세의 침략을 막아 위난을 극복하려는 절박함과 국민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려는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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