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겨울 어느 날, 병무청으로부터 징집통보를 받고 친구들과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려고 다방에 갔다. 그해 8월, 육군 삼사관 학교에서 초급 간부를 뽑는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우체부(郵遞夫) 아저씨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결국 포기한 채, 군입대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그 무렵 국가는 18년 장기 통치자를 잃고 신군부 내에서 권력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시국사범으로 붙잡혀가면 고초를 겪게될 뿐 아니라 잘못 엮이면 간첩으로 몰릴 수 있는 시대라 다방처럼 공공장소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할 때는 주위를 살피고 말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다. 어디에 사복 경찰이 있을지 모르고 또 누가 간첩이라 신고할지도 모르니 사주경계는 기본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 다방은 carol songs과 함께 지하 공간을 밝히는 반짝이 조명이 분위기를 압도했다.
며칠 후 입영열차에 올랐고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후 부대를 배치 받았다. 문산에서 가까운 서부전선, 철책 선을 지키는 최전방 부대로 과거 "김 신조 일당"의 침투 로(路)다. 한 겨울이라 선임 병들은 방한복을 껴입어 펭귄을 연상케 했다. 신병은 전입신고 후 소대 배치를 받고 선임병과 저녁에 회식 겸 환영식이 열렸는데 선임 병들은 신병의 군기와 장기를 테스트 한다. 신병에게 신고식은 곧 군생활의 시작이자 끝이란 것을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알게 되었다.
철책근무는 어둠 속에서 졸음과 싸워야 한다. 신병은 곧바로 철책근무에 투입되지 않고 적응기를 거치는 데 나는 소대장이 부식을 나눠주러 갈 때 부식자루를 어깨에 메고 동행했다. 소대장은 내게 노래를 시켰다. 신고식 때 불렀던 "돈키호테"라는 노래다. 노래 말은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는 우리의 돈키호테, 그 모습은 초라해도 돈키호테는 멋쟁이 사람들아 나를 보고 비웃지를 말아라. 인생이란 풍차처럼 빙글빙글 도는 것. 달려가자 백마야 ~아름다운 공주님, 에게 로."이다. 밤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대남방송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컸다. 방송의 골자는 전두환에 대한 비방이 주를 이뤘는데 우리 국민들에게 전두환이 누구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라, 왜 그렇게 욕을 하는 걸까?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훗날, 알고 보니 그분이 그 사람이었다. 군을 제대하고 대학에 다닐 때 시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최루탄(催淚彈) 냄새에 눈물 콧물을 쏟기 다반사(茶飯事)였다. 나야 수업 안하고 노니 좋았지만 당시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던 의식이 깨어있는 학생들은 국가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 있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표현이 딱 맞아 떨어지는 표현이 아닐까? 돌멩이와 최루탄의 싸움, 그리고 남영동에 끌려가면 폐인이 된다는 기본 공식까지, 그러나 의식 있던 학생들은 정국(政局)을 주도하며 독재와 맞서 싸웠다.
당시 요주인물로 찍히면 담당 형사가 붙고, 엮어 넣을 작업을 시작했다. 가족 친지 중 누가 북쪽에 닿아 있는가를 보고 또 과거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附逆者)집안 여부를 따졌다. 그 것도 아니면 남영동에 끌고 가 통닭 말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은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인데 대부분 몇 일 밤, 잠을 못자면 그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기를 한다고 했다.
1987년은 내가 대학생으로 살던 세상 이야기다. 당시 박 종철 고문사건은 과거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과 비슷한 점이 있다. 김주열 열사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을 때 한쪽 눈에 미제 최루탄이 박혀 있는 상태로 발견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켰던 것처럼 정의 사제 구현 단에 의해 "박종철 사망 사건"이 국가 공안조직에 의해 은폐조작 된 사실을 발표하면서 온국민의 공분을 일으키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학내 시위도 점점 늘었는데 당시 대학 정문에 경찰 진압대가 와있지 않으면 타(他) 대학교 학생들은 그 학교를 우습게 여겼고, 학생들도 "야! 우리학교 찌질한 거 아냐?"라며 자조(自嘲)해야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 점은 촛불혁명의 씨앗은 이미 1987년에 뿌려졌다는 것이다. 당시 시위가 벌어지던 거리는 최루탄으로 눈을 들고 다닐 수 없었고 청바지를 입은 백골단이 시위대를 쫒는 장면은 암흑 속을 누비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시위대가 붙잡히면 닭장차에 들어가는데 사람을 좁은 버스에 빽빽하게 실어, 도살장에 끌려가는 닭과 신세가 같다는 의미에서 닭장차라고 불렀다.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고 쓰러진 모습에 분노가 극에 달했던 시민들은 마지막 떠나는 모습을 보기위해 운구 행렬을 뒤따랐는데 그 규모는 고종 황제의 국장, 김구 선생의 국민장처럼 인산인해를 이뤘다. 장례식 행렬은 백만 인파를 넘었고 군중들에 압도당한 군사정권은 무력을 뛰어넘는 민중의 힘을 목도하게 된다. 백성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어엎기도 하는 것이다. 민심을 이반하고 장기집권을 노리던 전두환 정권은 결국 백기를 들고 백담사로 갔다. 정계 은퇴 후에도 전씨 일족이 언론에 회자되는 것을 보면서 왜 그렇게 사는지, 반문하게 된다.
남영동 조사실은 우리 역사가 근.현대화로 가는 길목에서 군사정권의 당위성을 옹호하기 위해 정의를 짓밟고 바른 목소리를 내던 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고문 조작을 통해 사실을 왜곡한 공안정국의 산실이었다. 이곳을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달라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매우 뜻 깊은 운동이다. 남영동 조사실은 과거의 공안정국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역사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자손손(子子孫孫), 오래오래, 두고두고 기억할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우리가 "촛불혁명"을 이루기 전, 피로 싸워서 얻어낸 정의를, 그리고 선봉에서 죽음을 넘어 자유를 얻으려 했던 의로운 투사들이 1987년, 온 몸으로 견뎌내며 불의와 싸웠던 곳임을.
'영화 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반도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0) | 2018.08.21 |
---|---|
신과 함께를 보고 (0) | 2018.01.31 |
영화"남한산성"에서 충신은 누구인가? (0) | 2017.10.22 |
택시운전사를 보고 (0) | 2017.08.26 |
쉰들러 리스트 (0) | 2016.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