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기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며

해암 송구호 2016. 3. 22. 13:52


스페인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투우다. 그리고 투우를 연상할 수 있는 춤, 파소도 블레다. 투우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투우사가 새빨간 망토(Capote)를 휘두르며 성난 황소와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 관중들이 매료되어  흥분하게 된다. 투우경기의 하일라이트는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투우사의 칼이 흥분한 소의 목에 꼬칠 때다. 파소도 블레는 투우를 춤으로 표현 한 것으로 남자는 투우사 여자는 망토나 투우사의 그림자 역할을 한다. 몇몇 동작은 스페인 전통 춤 플라멩고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행진곡 풍의 카니(Espana Cani Spanish Gypsy Dance)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춤은 투우의 발달과 함께 1918년경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등지에서 정식으로 사교댄스로 인정받게 되었다.

 스페인은 우리나라의 2.5배에 달하는 국토(50만4,782㎢)에 4천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반도국가로 수차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다양한 인종이 정착해 살면서 스페인이의 역사를 써왔다. 한 때는 식민국가를 거느린 제국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외세의 침략과 그들의 지배하에서 다양한 문화를 녹여 오늘의 스페인으로 거듭나기까지 험난한 과정을 겪었고 민족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종교였다. 스페인을 카톨릭으로 묶는 작업이다. 스페인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카톨릭을 믿든가 스페인을 떠나는 것이다. 만약 이교도인이 스페인에 남으려면 개종을 해야했다. 이것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재판이라는 칼을 사용했다. 만약 스페인에 남아 카톨릭을 믿지 않거나 이교자로 밀고가 되면 법을 집행하는 기관에서 조사를 한 후 재판을 통해 재산 몰수 및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스페인에는 기원전 10세기경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와 반도의 남부와 동부 해안에 북쪽으로 프랑스 남부까지 올라갔다. 켈트족은 기원전 6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왔다. 그후 기원전 3세기경에는 카르타고인에 의해 점령 당했고 이후 로마에 합병되었다. 주로 로마는 군사적 방위 목적으로 주둔지에 로마군을 이주시켜 살았다. 페니키아인, 그리스인이 당시 주류를 이루었다. 5세기 초, 로마가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북방 야만족인 고트족이 남하해 스페인에 정착해 살았다. 그리고 동로마 지역과 패권을 다투던 아랍이 주도권을 잡게 된 7세기 무렵에는 무어인이 스페인을 다스렸다. 이후 15세기 무렵 무어인들이 소국가로 분열되어 지배력이 약화 된 틈을 이용 카톨릭 왕국의 재정복(레콘키스타)이 이뤄졌다.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 왕국이 사라지면서 반도는 카톨릭으로 통일 된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당시는 대농장을 갖고 있는 귀족들이 사회 주류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대였다. 그중 카스티아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은 정략혼을 통해 중앙집권화로 왕권을 강화했다. 이들은 스페인을 정치적, 군사적 통합과 함께 동시 종교적, 민족적, 문화적 통합까지 이루려 했다.

   로마가 스페인을 정복한 원인 중 하나는 풍부한 광물자원 때문이다. 경제적 약탈을 위해 군대의 정복 및 점령지역에 병영 설치하고 지역주민을 로마군의 보조군으로 복무하도록 함으로서 현지인들은 쉽게 로마에 동화되었다. 로마에 제도는 자연스럽게 스페인에 옮겨졌다. 경제, 법률, 행정, 문화 등이 침착 되었고 라틴어가 들어오면서 스페인어의 어원이 되었다. 그리고 카톨릭이 전파되어 스페인의 전역에 퍼지면서 국가의 정신적 기둥으로 자리메김 하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 내 카톨릭의 전파는 1세기 중엽 로마인이 이베리아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사도바울이(64년~ 66년) 전파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예수의 제자이며 스페인의 수호성자인 산티아고(Santigo:야고보) 덕이다. 그가 순교한 후 시신의 정착지 파드론 이리아 플라비아는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레콘키스타이(카톨릭 재정복)를 벌이던 9세기경 갈리시아 들판에서 한 무리의 별빛이 어느 한 곳을 비추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Santiago의 무덤이며 이때부터 이곳을 "별이 비춘 들판"(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로 명명되었다. 이곳이 바로 세계 기독교도인들이 성지순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지금도 사도의 무덤은 그 위에 지은 대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다.

 로마 속국민으로서 차별 받던 이베리아인들이 1세기 무렵 카라칼라 황제가 선포한 안토니 누스 칙령에 의해 조건 없이 전국민이 로마시민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로마는 이 조치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 반면 이베리아 반도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로마시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어 중앙정치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베리아 출신의 황제는 트라이야 누스, 아드리아 누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테오도 시우스 등 4명이다. 스페인이 카톨릭을 제국의 공식 종교로 받아들인 것은 테오도 시우스 황제(380년) 때다.

 로마제국은 행정제도와 법률, 토목, 건축 등 실용적 가치를 중요시 했다. 도로, 항만은 제국의 심장 역할을 했고 신전은 제국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판테온이라는 신전에서 다신교를 숭배하다, 동로마제국이 들어서면서 국교를 카톨릭으로 일원화 시켰다. 황제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아 범인과 차등을 두고 통치하려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생각에서 시작된 카톨릭 국교는 로마황제와 바티칸 교황이 권력을 양분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수도가 된 것은 16세기 이후 필리페 2세와 그의 후손들의 중앙집권적 통치를 위한 결과다. 굳이 논하자면 스페인 역사에서는 신생수도에 불과하다. 수도적 요건인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해서도 아니었다. 이지역은 반 왕권적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수도가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 정 중앙에 위치하고 해발고도 635미터의 고산지다. 이 도시에는 수도에 걸맞는 큰 하천이나  광물자원도 없고 성지 순례지도 아니다.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레알 마드리드 축구장이 있을 뿐이다. 참고로 유명한 포루투칼 출신의 호날두가 주전선수로 뛰고있다.

 톨레도를 셀러드 볼(Salad bowl)로 표현하는 것은 유대문화, 이슬람문화, 카톨릭 문화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톨레도를 보기전에 스페인을 논하지 마라! 기원전 2세기 로마는 스페인 중부 라만차 지방을 점령할 때 현지인 저항이 얼마나 거셌던지 로마 정복자들은 이 저항의 중심지를 "참고 견디어 항복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톨레라툼(Toleratum)이라 부른데서 톨레도가 유래되었다.

 5세기에는 서고트족의 수도로 이용되었다. 종교적 의미도 크다. 톨레도 대주교는 이베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교회수장이기 때문이다.

 711년 이슬람 교도들이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톨레도의 새 지배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톨레도는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물러나는 1492년까지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의 거점이 되었다. 1085년 톨레도는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카톨릭 손으로 넘어왔다.

 11세기부터 13세기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에 의해 그 문화를 꽃 피웠다. 예루살렘 멸망후 천하를 유랑하던 유대인들은 톨레도를 "서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렀다.

1936년부터 1939년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장군쪽의 반란군과 정부군인 인민전선측이 도시 한가운데 성채를 두고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톨레도는 스페인의 나이테와 같은 곳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스페인 카톨릭 본부로 90미터의 종루는 시내를 굽어본다. 원래는 이슬람 모스크였으나 13세기 성당으로 개축하여 15세기까지 공사했다. 성당내 "성찬 현치대"(聖餐 顯置臺)는 16세기 제작 된 것으로 높이가 3미터 무게 200키로에 달하는 금, 은과 보석으로 세공되어 옛 스페인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콜롭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가져온 황금도 포함되어 있다.) 톨레도는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게 된다. 역사의 도시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다. 현재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중세 스페인은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외에도 대토지를 갖고 있는 제후들의 나라였다. 

1469년 10월19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과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이 지배를 하고 있었다. 두 왕국의 스페인 내 영향력은 막대 했다. 양국왕은 은밀하게 결혼을 진행 하려 했으나 내외적으로 큰 반대에 직면했다. 국내에서는 제후들의 반발이 컸다. 두 가문의 결혼으로 왕권이 강화되면 상대적으로 제후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우려해 반대 했다. 국외적으로는 인접국가인 프랑스 루이 11세가 반대했다. 양쪽 가문의 결합은 스페인의 국력이 강해지는 것으로 판단하고 프랑스에 위협이 될 것을 염려했다. 귀족이나 프랑스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스페인은 통일국가를 향해 일보 전진 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군주국가로 태어났다.

문제는 정치적 통합 후 국내 잔류하고 있는이민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가 큰 문제였다. 종교의 차이로 사회통합이 어렵다는 점을 깨닫게 된 왕정은 극단의 조치를 하게 되었다. 이교도의 추방이다. 교황 식스투스 4세의 허락을 받은 스페인 국왕은 칙령을 통해 종교재판소를 만들었다. 종교재판은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들이 주관하에 이뤄졌다. 하늘이 내려준 치유책이라 믿은 종교 재판소(Inquisicion)는 이단 혐의자를 밀고하면 수도사는 가혹한 심문을 한다. 순순히 자백을하면 재산의 몰수와 사회적 모든 지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고백하지 않으면 고문을 하고 그래도 자백하지 않으면 화형에 처했다. 종교재판이 가져다 준 사회적 부작용도 컸다. 밀고가 성행하면서 사회적 불신이 팽배했고 모든 사람이 종교의 굴레에 갖혀 살아야 했다. 이단자로 지목되면 가문이 몰락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반면 종교재판의 주도세력이던 카톨릭은 몰수 재산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중세 스페인에서 교회의 힘은 엄청난 부와 광범위한 특권들에 의해 강화 되었다. 당시 스페인에는 7개의 대 주교구와 40개의 주교구가 있었다. 그중 4개의 대 주교구(톨레도, 그라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세비아)와 카스티야 지역의 주교들이 연간 수입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스페인 수석 대주교인 톨레도 대주교는 그 권력과 부에서 왕 다음의 제 2인자라 할 수 있는 엄청난 개인 수입을 거두어 들였다.

 성직자들은 국왕이 부과하는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해당도시에서 부과하는 세금도 교묘한 방법으로 회피했다.  고위 성직자는 대영지를 소유하고 영지내 사법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사병을 보유하고 전쟁을 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카톨릭 왕은 카톨릭 종교 지도자를 장악하지 않고는 절대적 지배자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교회장악 수단으로 주교 임명권을 둔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사벨라 여왕은 1475년 사라고사 주교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옛 관습을 들어 국왕의 제청으로 교황이 임명하도록 된 점을 거론했다. 결국 그 싸움은 카톨릭 왕의 승리로 끝났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발발했다. 1930년은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가 난무한 이데올로기 시대다. 이시대는 사상에 대한 정열이 역사를 움직인 시대였고 이런 시대적 특징이 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다.

 세계경제공황, 국제 파시즘의 대두, 국제 공산주의 운동 등의 여러 요인들도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1930년 후반 스페인 국내외 사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1931년 실시된 지방자치선거에서 공화파가 대거 진출하면서 왕권약화를 초래했고 왕당정치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공화파는 왕당파와 교회의 낡아빠진 지배사상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으나 노동자 농민의 생활은 여전히 열약하고 나아지지 않았다.

 공화파는 스페인 민주정치의 실현이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을 효과적으로 실현하지 못하면서 지지 기반이 약화됐다. 교회는 스페인 전체 토지, 재산의 1/3가량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지주세력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자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에게 요구를 해결하도록 미뤘다.

 1933년 극우정당 팔랑헤당이 파시즘 독재를 꿈꾸며 급격히 부상했고 11월 총선에서 공화파는 스페인 자치연합(CEDA, 왕당파,교권주의자의 파시즘을 내세운 우파 민족주의자 단체)에 권좌를 내줘야 했다. 1934년 5월 라르고 카바예로를 위시한 사회주의 세력은 스페인 자치연합의 탄압에 대항해 대대적인 파업을 단행했으나 스페인 자치연합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진압했다. 

 1936년 총선에서 인민전선(사회당 계통의 노동자 총동맹 + 무정부 주의자 그룹)이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다. 인민전선은 정치범 석방, 조세 및 지대 감면, 노동자 임금 인상과 실업대책, 중소기업 보호, 교육개혁 등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을 단행했다. 팔랑헤당의 활동을 불법화하고 프랑코 장군을 카나리아 제도의 경비 사령관으로 좌천 시켰다.

 1936년 7월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사봉기가 일어났다. 7월18일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에 계엄령을 발동하고 아프리카 반란군의 지휘를 맏았다. 7월19일 모로코에 가 있던 프랑코는 북아프리카 주둔 스페인 군에게 본토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쿠테타는 공화국 정부의 안이한 대응으로 성공했다. 1939년 3월28일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반란군이 승리했다. 프랑코 장군은 히틀러에게 지원을 요청해 독일 콘도르부대(하인켈 111형 폭격기, 융카스 52형 폭격기, 하인켈 51형 전투기)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를 페허로 만들었다. 이때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신형 무기를 테스트하는 기회로 삼았다. 스페인 내전은 문학과 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 데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로 참여했던 헤밍웨이와 조지오웰은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한  작품을 썼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이다. 그리고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7.8m × 3.5m)는 독일 콘도르부대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 참화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절규와 절망을 화폭에 담고있다. 스페인 내전은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노동당의 패배를 의미한다. 노동조합과 정당활동은 금지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당원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프랑코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나는 역사와 천주님에게만 책임진다"고 하며 절대 군주주의를 통해 규율 지상주의를 꿈꾸었다. 카톨릭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했던 프랑코는 그 후 교회의 배신을 통해 척을 지게 된다. 프랑코의 집권 기간 중에 하층민의 삶이 나아지지 않자 교회가 이를 좌시하지 않으면서 양쪽의 관계는 멀어졌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학생운동의 시위로 크게 확산되었고 독재자 프랑코는 이러한 현상을 목도하면서 1975년 11월20일 사망했다.

  15세기는 스페인이 해양대국으로 발돋움 한 것은  콜럼버스를 후원해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크리스토 퍼런스(Christoferens)로 예수(Christ)와 운반자(Bearer)를 뜻하는 퍼런스(Ferens)가 합쳐진 말로 예수 전도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대서양을 항해한 목적은 예수전도를 염두에 둔 모험이었다. 그러나 그의 항해 결과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신대륙 발견과 배에 가득 싣고 돌아온 황금이다. 스페인은 식민지로부터 유입 된 막대한 자금으로 부를 얻었지만 귀족의 사치와 국왕의 전쟁비용 지출로 자본축적은 없었다. 만약 부를 축적했더라면 오늘날 스페인의 위상은 달라졌을까?

 스페인에는 로마가 있고 이슬람문화를 꽃피운 무어인의 숨결이 살아있다. 그리고 유랑민족인 유대인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아직도 까탈루냐, 바스크는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언어도 카스테야노(스페인어로 알고 있는 언어),카탈란, 가예고, 바스크어까지 4개의 공식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17개의 자치주로 운영되는 지방자치제도가 발달한 나라다. 1986년 EC회원국으로 가입되었고 프랑코 사후 유럽공동체(EEC)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면서 유럽국가의 일원이 됐다. 그들의 뿌리는 북아프리카이지만 유럽에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1986년 유럽연합 가입 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재도약을 하고있다. 아마도 15세기에 번성했던 스페인 제국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칠레의 경우 통신, 전력, 상수도 부문의 최대회사가 스페인 회사다. 스페인은행은 칠레 금융시장의 40%를 작악한 상태다. 브라질의 민간통신분야 최대 업자도 스페인 국적회사다.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사이로 지브롤터해협이 있다. 폭이 35키로미터 정도로 인구 3만의 지브롤터 자치구가 있다. 국방과 외교는 영국정부에 속해있고 자치권은 지브롤터인이 갖는 독득한 구조의 도시다. 영국인 27%, 스페인24%, 이탈리아20%, 포루투칼10%, 몰타인8%, 유대인3% 기타1%다. 원래 이땅은 스페인 영토였는데 스페인왕 펠리페 5세가 영국에 넘겼다. 스페인은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일예로 카탈루냐의 경우 2012년부터 투우경기를 금지하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동물 학대를 금지한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스페인정부와 거리를 두려는 분리독립의 포석이란 말도 있다. 우리가 밖에서 보고 있는 스페인과 내부에서 끓고 있는 온도의 차이는 분명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