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박은(朴訔)
1. 박은<朴訔 : 1370(공민왕 19)~ 1422(세종 4)>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앙지(仰之), 호는 조은(釣隱). 아버지는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 상충(尙衷)이다. 문음(門蔭)으로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에 등용되었고, 1385년 문과에 급제해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후덕부승(厚德府丞)·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 등을 역임했다. 조선 건국 뒤 지금주사(知錦州事), 좌보궐 겸지제교(左補闕兼知製敎), 지영주사(知榮州事)를 지냈다. 지춘주사(知春州事)로 있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이방원을 도왔고,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던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공으로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이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올랐다. 태종이 즉위하자 형조·호조·병조·이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좌명공신 제3등인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그뒤 더욱 중용되어 강원도도관찰출척사·한성부윤·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전라도도관찰사·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總制)를 지내고 1407년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참지의정부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1409년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왕명으로 평양성을 쌓았다. 형조판서·대사헌·호조판서를 지내고 1413년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되었고, 참찬의정부사 겸 판의용금사사가 되어서는 절옥(折獄)의 신장(訊杖) 수를 1차에 30으로 정했다. 1415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5월 판우군도총제부사를 거쳐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부원군(府院君)으로 개봉되었다. 이어서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했다. 1421년(세종 3) 병으로 물러났다.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관리를 쓸 때 친척들을 많이 기용했다는 평을 받았으나, 병사들을 많이 뽑아 썼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원망하지 못했다 한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2. 아버지 박상충
박상충(朴尙衷, 1332 ~ 1375)은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355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그의 아들은 여말선초의 문신인 박은(朴訔)이며 손윗처남은 고려의 충절을 지킨 유림의 수장으로 추앙된 목은 이색(李穡)이고 처조카는 고려 멸망후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하수인들의 손에 암살된 이종학(李種學)이다.
1375년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 해 간관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池奫)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친명파인 전녹생(田祿生)·정몽주·김구용·이숭인·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던 도중 별세하였다.
그는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큰 뜻이 있었으며, 경사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성명학(星命學)에도 통달하였다. 벼슬에 나아가서는 부지런하고 항상 삼갔으며 불의로 부귀함을 보면 멸시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3. 출세(出歲)
5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후어머니도 충격을 받아 돌아가면서 박은은 고아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친인척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문음(門蔭 : 특채 / 공신의 후예)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이방원을 좋아했고 그를 추종하여 1, 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쪽에 가담하였다. 권력은 정안공 손에 들어왔고 춘천으로 돌아가려는 박은을 사헌중승(司憲中丞 : 어사대의 종4품)이란 자리에 임명해 곁에 두었다. 형조지사(종2품) 때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원편에 가담, 좌명공신 3등에 올랐고 반남군이란 작호를 받았다. 반남은 나주에 그가 태어난 지명이다. 그의 관운은 이때부터 술술이다. 태종원년 호조전서, 병조, 이조전서 겸 태종2년 강원도 관찰사, 태종3년 한성부윤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가 33세 였다. 태종 6년 전라관찰사로 재직 중 명나라 사신 황엄을 대접한 적이 있다. 황엄의 횡포는 이미 온나라가 아는데도 그를 너무도 당당하게 대하자 태종에게 "전하의 신하는 오직 박은 뿐"이라고 했다. 태종은 곧바로 박은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군부의 요직인 좌군 동지총제에 임명했다. 박은은 행정의 달인이다. 비록 태종의 총애를 받고있는 하륜의 지시라도 옳지 않은 것은 서명을 거부했다. 박은의 품성에 대하여 실록은 "식견이 밝고 통달하며, 활발하고도 너그러우며 의논이 확실하였다."고 평했다. 태종 16년 3월(47세)우의정, 6개월 후 11월 이조판서겸 좌의정에 오른다. 하륜이 물러나면서 태종은 박은에게 조정의 중대사를 묻고 처결했다. 명실상부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4. 박은의 인물 됨
태조 6년 계림부윤 유량(柳亮)이 박은의 일처리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리자 호통을쳤다. 이때 박은이 굴하지 않고 " 나도 당신 나이에 이르면 당신처럼 높은 지위에 올라갈 터인데 어찌하여 이처럼 곤욕을 주느냐고 맞섰다. 후에 유량이 "항복한 왜놈과 결탁 사직을 배반했다는 무고를 당해 사헌에 끌려왔다. 그때 사헌 집정은 두사람 사이의 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박은 이라면 유량의 자백을 받아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사헌시사(뒤 司憲掌令)로 임명하였다. 유량이 생사 여탈권을 쥐게 된 것이다. 유량은 보복을 두려워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박은은 붓을 내던지며" 어찌 죄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느냐?"며 형리에게 호통을 쳤다. 결국 유량은 목숨을 건졌고 훗날 정승에까지 오른다. 집정은 서명을 거부한 박은을 지방 "춘천지사"로 발령냈다. 그때 유량은 박은에게 " 나는 진실로 소인배였다. 그대의 말채나 잡고 나의 평생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며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