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한양천도의 정치적 의미
1.천도에 얽힌 이야기
호랑이가 표효하듯 열변을 토하는 정도전의 북악 주산론은 세 사람의 가슴을 뛰게 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무학대사의 주름진 얼굴도 홍안의 소년처럼 불그스레해졌다.
새 왕국의 군왕으로 등극한 이성계의 눈동자는 새로운 학문에 눈 뜬 학동처럼 빛나고 있었다. 말없는 시간이 잠시 흘렀지만 세 사람의 가슴에는 뜨거움이 흐르고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인왕산 범바위
"북악을 주산으로 했을 때 좋지 않은 점을 듣고 싶소, 대사께서 먼저 말씀해 보시오."
"말씀드리기 황공하오나 북악을 주산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면 종묘 사직이 200년을 넘기지 못할까 염려되옵니다. 새 왕조가 세세년년 이어가려면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켜야 가능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인왕산 선바위
폐가입진에 따라 결행한 세력에겐 구악은 척결의 대상
어떠한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선바위는 끝까지 안고 가자는 무학대사의 의중이 엿보인다. 고려왕조가 패망하는데 타락한 일부 승려가 일조했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 무학대사였건만 선바위는 놓지 않았다. 무학대사에게 있어서 선바위는 기필코 도성 안에 들여놓아야 할 목적물이었다.
이와 별개로 이로부터 딱 200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터져 선조 임금이 창덕궁을 탈출하여 의주로 몽진 떠나고 조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걸렸을 때 백성들은 무학대사의 예지력에 열광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무학대사의 능력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고려조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요승(妖僧) 신돈의 아들이므로 우왕의 아들 창왕 역시 왕씨(王氏)가 아니라는 폐가입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기치아래 우왕과 창왕을 강릉에서 처형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후 공양왕마저 폐하고 쿠데타에 성공한 혁명세력에게는 통하지 않는 논리였다. 잠자코 듣고 있었던 정도전이 입을 열었다.
황토현(광화문사거리)에서 바라본 북악산
골육상쟁이 두렵다는 예지력
"황공하오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북악은 백악(白岳)이라 부르는 바 백악은 백골(白骨)을 의미합니다. 황토현(黃土峴-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북악을 바라보면 산 모양이 비틀어져 있어 왕위계승이 장자를 비켜갈까 염려스럽고 흰 바위가(白岩) 튀어나와 골육상쟁(骨肉相爭)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기막힌 통찰력이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짓고 새 왕국을 건설한 조선왕조가 1910년 패망할 때까지 27명의 임금이 등극하였지만 장자계승은 단 일곱 명 뿐. 전체의 26%에 불과하다. 그만큼 뭔가가 뒤틀렸다는 것을 증거한다.
해방 이후 신생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이 북악산 아래 청와대에 들어갔으나 퇴임 후에 평온한 여생을 보내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참 묘한 결과다.
인왕산에 있는 국사당현판. 무학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정도전의 손을 들어준 이성계
정도전의 톡톡 튀는 이러한 관찰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다는 뜻을 가진 장풍득수(掌風得水)에서 유래한 풍수지리만 통달했다고 해서 이러한 관조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고려왕조 5인의 청백리 중 하나인 아버지 정운경의 슬하에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당대의 스승 이색으로부터 학문을 연마한 정도전은 귀양과 유배라는 파란을 겪으며 스스로를 갈고 닦았기기에 가능한 일이다.
"삼봉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오."
이성계의 말이다. 아니 태조대왕의 '인왕산 선언'이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로서 후보지에 대한 논의는 종지부를 찍었다.
정도전은 판문하부사 권중하와 함께 한양 천도에 매달렸으며, 참패한 무학대사는 양주 회암사에 들어가 중앙정치에 참견하지 않고 수도 정진에 몰두하다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를 일기로 천수를 마감했다.
경복궁 경회루
유교의 덕목에 따라 4대문 명명
한양 천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신도 궁궐도감' 이라는 특별관청을 신설하고 9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성계의 채근에 따라 벼락치기 공사가 진행됐다.
태조 이성계의 인왕산 선언이 있은 1년 후. 그러니까 1394년 10월 초닷새 날. 경복궁에서 종묘 낙성을 축하하는 연회가 베풀어졌고 12월에 공식 천도가 단행되었다.
고려의 패망원인을 불교에서 찾은 정도전은 주자학적 입장에서 철저하게 척불숭유(斥佛崇儒)정책을 관철시켰다. 종묘사직과 궁궐을 지은 다음에 손수 정전 이름을 지어 헌액했다.
그는 4대문을 건립하면서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대문 이름(興仁門, 敦義門, 崇禮門, 弘智門)에 삽입하였고 보신각(普信閣)을 세웠으나 선바위는 성(城)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동대문(흥인문). 지세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흥인지문 이라 이름 하였다.
국가경영 비전은 있었으나 자신의 앞날은 몰라
뿐만 아니다.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사찰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몰수하였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정도전의 배불정책은 철저했다.
이러한 핍박 때문에 사찰과 승려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왕실의 능참사찰(광릉-봉원사, 영릉-신륵사, 덕릉-흥국사. 선릉-봉은사, 정릉-신흥사)로 명맥을 이었다.
이러한 정도전도 자신의 앞날은 몰랐을까? 이로부터 4년 후. 1398년 8월 26일 야심한 밤 수송방(현재 종로구청 부근)에 살고 있던 정도전은 중학천 계곡에서 시 한 수나 읊으며 술이나 한 잔 하자는 혁명동지 남 은의 전갈을 받고 송현(松峴-현재 한국일보 부근)에 있는 남 은의 애첩 누각에서 남 은, 박 이, 장지화 등과 함께 한잔 술을 마시다가 이방원 일파에게 참살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서울 성곽 외부에 배치된 선바위. 왼쪽이 성곽 안쪽이고 오른쪽이 성곽 바깥쪽이며 오른쪽 아래 선바위가 보인다
두번째 생과 사의 갈림길
1398년 8월 26일 야심한 밤 2시. 청계천이 시작하는 중학천 계곡. 남 은의 애첩 집.
"공이 지난 번에도 나를 살렸으니 이번에도 나를 한 번만 살려주시오."
그믐달이 가까워오는 칠흑 같은 밤. 이방원에게 정도전이 애원하였다. 지난 번이라 말하는 것은 정도전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척살함으로서 살아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였다. 아버지 이성계를 군신으로 대하지 않고 동지로 생각하는 정도전. 이복동생 방석을 옹립하여 후대를 도모하려는 정도전. 사병혁파라는 미명아래 자신의 수족을 잘라내던 정도전. 이방원에게는 살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이방원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흐르는 듯 하더니 즉시 목을 치라는 추상같은 명이 떨어졌다.
경복궁 정문 광화문에서 바라본 북악산
겸손하지 못한 부덕이 화근이 되어
평소에 정도전은 한(漢) 고조(高祖)가 장량(張良)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장량이 고조를 통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장량에 비유하며 스스로를 치켜세웠다.
겸손하지 못한 그의 성격이 주변으로부터 질시와 시기를 야기하였고 이성계와의 관계를 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혁명동지로 인식했다는 것이 그의 최대의 부덕이었다.
이러한 그가 정몽주 일파로부터 처형위기에 당했을 때 이방원이 구해줬고 이방원에 의해 죽음에 이르렀으니 결국 정도전의 목숨은 이방원의 손아귀에 있었던 셈이다.
또한 정도전이 그토록 두렵다고 설파한 골육상쟁이 현실로 나타났다. 정도전이 죽던 날 세자 방석도 이복형 이방원에 의해 주살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보신각
재상정치의 웅지를 펴보지 못한 풍운아
백성들을 위한 재상정치를 꿈꾸며 가슴에 품고 있던 웅지를 다 펼쳐보지 못하고 죽은 정도전의 시신은 오늘 현재까지 찾을 길이 없고 묘소도 없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고 더더욱 조선실록은 패자(覇者)의 그늘에서 쓰여져서 일까? 조선 왕조 내내 역적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구천을 해매이다 고종때 대원군에 의해 누명이 벗겨지는 듯 하더니만 오늘 현재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또는 어떤 사가(史家)는 정도전이 요동정벌론을 주장한 것은 사병(私兵)을 획책하는 이방원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조선이 명나라에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잡아 사사건건 조선을 괴롭히던 주원장에게 던진 엄포용 외교 발언이라고 일축하지만 대 제국을 건설했던 원나라가 쇠망하고 명나라가 걸음마 단계에 있던 그 시기가 호기라고 간파한 것은 정도전의 날카로운 분석력이다.
한양성곽. 세월이 흘러 훼손된 곳이 많으나 원형으로 보존된 곳도 있다
푸른 하늘 아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그 당시 명 태조 주원장은 원나라 대군을 함흥평야에서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이성계를 강력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원나라 동녕부를 공격하여 요양성을 함락하고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이성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주원장이 자국의 요동 군사들에게 "조선이 20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수도 있으니 단단히 경계하라"고 명령을 내렸을까.
오늘 인왕산에 올라 북악을 바라보니 산은 비틀어져 있는 모습으로 하얀 속살을 드러낸 채 그대로인데 인걸은 없다. 능선을 걸으며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이 눈부시게 파랗다. 이렇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육성을 토해내던 정도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는 대륙민족입니다. 광활한 요동 땅은 우리의 영토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요동벌판에서 말 달리며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요동 땅입니다."
국정넷포터 이정근(k30355k@naver.com)
*이글은 조선실록을 비롯한 정사, 야사, 전설, 설화를 묶어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과서적인 역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기행이니만큼 이야기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미있어 퍼왔습니다.>
2. 한양 천도의 정치적 의미
무너져가는 고려왕조를 엎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민심의 향배다. 태조 이성계는 이씨 왕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개경 땅은 버려야만 했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땅의 기운이 쇄하여 새도읍을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고려의 때가 묻어있는 곳이고 아직 민심은 과거 고려의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한터라 자칫 잘못하면 역성혁명의 기반이 뿌리 채 흔들릴 수 있다고 봤다. 천도는 곧 혁명의 완성이다.
1) 음양 산정도감 설치(陰陽刪定都監 設置 ; 1393. 07)
위원 : 정도전, 권중화, 성석린, 남은, 정총, 하륜, 이직, 이근, 이서
논의된 사항 : ① 백악 주산설(경복궁 터)
② 무악 주산설(신촌일대)
③ 계룡산
☞ 권중화는 계룡산에 수도를 정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1390년 윤이 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귀양을 다녀왔었다. 윤이 이초의 옥사는 훗날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연계되어 조선 조정이 속끌이를 한다. 하륜은 무악을 주장했고 정도전과 혁명 주도 세력은 백악을 주장했다.풍수에서 先水後山이라 했는데 백악은 물이 없는 것이 흠이다. 어쨋든 새로운 도읍지로 백악이 결정났다.
2) 신도 궁궐 조성도감 설치(新都 宮闕 造成都監 設置 ; 1393.09.01)
공사감독 : 심덕부, 김주
☞ 심덕부(1328 ~ 1401)는 무장으로 1385년 함주에 출몰한 왜적을 소탕하며 이성계와 청음 친분을 맺었고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 편에섰다. 그의 아들 7명 중 5째가 세종의 장인 심온이다. 훗날 태종의 손에 죽는다.
3) 천도 : 1394년 10월28일
1차 왕자의 난(戊寅年 1398) : 일명 무인정사라고 하는 왕자의 난이 나면서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고 정종이 왕위에 오른다. 한양보다 개경에서의 삶이 편안했던 백성들은 개경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정종은 개경에 있는 친모 신의왕후 한씨가 묻혀있는 제릉을 갔다가 개경 환도를 결심한다.
4) 환도 : 1399년 2월27일 개경으로 환도가 결정.
1399년03월07일 출발
5) 도읍 재 천도 상소 : 홍길만(1353 ~1407) 이 태종1년(1401) 1월 4일 상소.
도읍 재 천도 논의 : 1404년(태종4) 7월10일 종친, 삼부 원로
개경은 백성의 생업이 안정된 반면 종묘와 사직이 한양에 있은지 6년이 된 채 돌보지 못하므로 천재지변이 빈번한 것은 하늘의 경고라 여김. 좌정승 조준이 주나라 예를 들며 양경제를 주장.
6) 한양으로 재천도 : 1) 실권한 태상왕이 태종에게 한양 천도를 간절하게 부탁했다.
1404.09.01 : 이궁 조성도감 설치 / 제조 : 이직, 신극례
1404.09.13 : 이무, 성석린 경복궁 수리해 사용 건의
궁궐 보수도감으로 전환
1404.09.26 : 한양 향하던 중 3째 익안대군 사망 소식 듣고 귀경
1404.10.02 : 조준, 하륜, 권근, 이천우 등 종친 대동
1404.10.04 : 무악에서 주변 경관 살핀후 도읍지로서 합당 판단
1404.10.06 : 종묘에서 척전(擲錢)으로 도읍지 결정.
7) 한양 천도가 갖는 의미 : 태종은 무인정변을 통해 태조 이성계의 권력을 빼앗았다. 부자 지간에 있어서 안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후 태조는 함흥차사, 조사위의 난 등 사사건건 이방원을 괴롭히는데 앞장섰다. 그럴 때마다 이방원은 전전긍긍 해야 했다. 태조 이성계와 이방원의 채무관계가 정리되지 않았던 것처럼 태조와 계비 강씨에게도 채무관계가 존재했을 것이다. 변방 장수에 불과했던 이성계가 중앙무대로 진출하는데는 강씨집안의 배경이 큰 역활을 했을게 분명할테니니 말이다.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 데도 계비의 눈물보다, 그것이 더큰 고마움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부자지간에 쌓였던 감정은 한양천도 결정으로 해결되었다. 골육상쟁의 아품을 겪으며 왕위에 오른 태종을 왕으로 인정했고, 새로운 왕조의 수도를 한양으로 최종 결정 지으므로서 혁명이 완결 되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