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찰

태종

해암 송구호 2014. 11. 20. 13:20

제9장 선위파동

1. 선위파동  : 조선의 왕들은 재위 중 신하들의 충성도를 확인하거나 민심의 향배를 돌리려 할 때 선위를 선언 했다. 태종은 네번에 걸쳐 선위를 주장했다. 처음 선위파동은 민무구 형제와 연관되어  있다.  당시 시대 상황을 볼 때 선위 발단은 한양 천도로 민심이 불 안정했 던 점을 볼 때 정국안정을 꾀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자의 나이도 어려 왕좌를 물려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군신들의 충성도 확인을 통해 내치를 다지고 흐트러 지는 민심도 되잡겠다는 속셈이다. 그런데 불똥이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민씨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혀려 한다는 탄핵사건이 일어나면서 선위파동은  민씨 형제로 급 선회 했다.

선위란 임금짓 그만하겠다고 만백성에게 선언하는 것이다. 요즘말로 치면 대통령 하야쯤 된다고 할수있다. 대통령 하야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당시 왕이 선위를 하겠다고하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복심을 갖고 던지는 고도의 계산된 정치적 언어로 신하들은 비상사태에 돌입할 수 밖에 없었다. 사극에서 가끔씩 나오는 장면이다.신하들은 왕의 집무실 앞에서 업드려 간청을 하는데 보통 "전하! 선위를 거두어 주옵소서"하고 청을 한다. 왕이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지 않는 한 신하들은 비가오든 눈이오든 정전앞에서 왕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했다.  세자도 예외일 수 없었다. 선위의 당사자이기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석고대죄를 한다. 자신의 불충에 대한 노여움을 풀라는 간절함을 담고있다.

선위 파동은 왕이 신하들을 상대로 한 시위이고 채찍이며 견제다. 이 때 표정관리를 잘못해도 죽음을 당할 수 있다. 민씨 형제의 탄핵 사유는 선위를 거두겠다고 했을 때 표정관리를 잘못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2. 1차 선위파동의 배경

 1) 민씨 형제 제거 음모론(일부 학자)

 2) 한양 재 천도로 민심 이반이 우려되었 다.(태종 6년 8월)

 3) 천재지변(가뭄, 홍수 및 각종 재난)

 

3. 태종의 통치 스타일 : 자신이 믿고 신임하는 신하에게 의중을 넌지시 흘린다. 그리고 난 후 조정에서 논의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제 삼자의 입장에서 관망하며 뜻을 관철시켜 가는 것이다. 때로는 신하들이 강력하게 죄를 청해도 본인은 미미한 처벌로 마무리 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태종의 속마음을 읽고 있는 신하가 주도해 관철하는 것으로 일단락 짓는 것이다.

 

4. 원경왕후 민씨와 태종

  태종은 계비 강씨의 집안 세력이 정치에 깊히 관여한 것을  좋지않은 감정을 갖고  살아 왔다. 그래서 더욱 처가의 발호를 묵과하지 않았다. 반면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이 보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기여한 공 만큼 정치적 지분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태종은 많은 수의 후궁을 들이는 일로 외척 세력의 발호를  막으려 했다. 실제 11명의 후궁을 두었고 원경왕후와 갈등 폭이 세질수록 민씨 형제의 운신폭은 좁아졌다. 태종은 민비를 폐위시키는 것도 생각했지만 세자를 포함한 민씨의 자식들을 감안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나 그의 일가는  멸족이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

 

5.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태종

태종7년 9월18일 병조판서 윤저, 참찬사 유량, 호조판서 정구, 6대언과 민무휼, 민무회, 그리고 자신의 동서 노한을 불러들인 후 민씨 집안과 세자의 왕래를 끊은 이유에 대하여 말한다. "부원군 부부가 요즘 자주 운다고 한다. 세자는 부부가 안아 키웠는데 인정으로 우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두 아들이 죄를지어 바깥에 귀양가 있으니 부모의 마음으로 반드시 스스로 편치 못할 것이다. 내가 세자에게 통래하거나 문안하지 못하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부원군은 민제를 말한다. 그리고 두 아들은 민무구와 민무질이다. 태종은"내가  선위를 거두려 할 때 두형제는 성낸 빛이었으니 내가 그 뜻을 알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과거에 있었 던 이야기를 꺼낸다. "옛말에 임금의 지친은 장래가 없다했는데 있으면 불충이다. 또 임금에게 쌀쌀하고 야박하게 굴면 불충이다. 을유년(태종5년) 겨울 창덕궁 공사가 끝난 후 작은 술자리에서 충녕(세종)의 글씨를 쓴 종이를 돌려보였더니 민무구가 신극례에에 주고 눈짓, 술취한 것을 빙자 충녕의 글씨를 찢어버린 일이 있다. 이것이 불충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리고 "세자를 위해 대군을 제거하고자 함은 나에대한 불충이다." 태종은 1,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며 왕이되었다. 형제들 간에 왕좌를 놓고 벌인 피의 전쟁이 가슴아픈 일인데 민씨 형제는 자신의 집에서 자란 세자를 제외한 나머지 대군들을 죽이려한 정황이 드러나자 민씨 형제를 그냥 놔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던 것 같다. 역사기록에도 왕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뇌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민씨 형제들은 태종을 왕이 되기전부터 가까이서 보고 자랐다. 아버지 민제의 제자 였으니 더더욱 그런면에서 친숙했을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 군신의 관계가 되었지만 민씨형제는 매형으로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 민제는 달랐다. 태종이 그의 집을 찾으면 군신의 예를 갖추려 노력했다. 장인이자, 옛스승인데도 그러했다. 민제는 아들들의 행동을 두고 장차 미치게 될 화를 염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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