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찰

태종

해암 송구호 2014. 11. 21. 09:45

 

제10장 모약왕실(謨弱王室)

태종은 문무를 겸비한 왕으로서 그의 성품도 그에 걸맞게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또 섬세하고 치밀하다. 과거에 신하들의 언행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신하들을 다루는 용인술의 밑바탕이 되곤한다. 이숙번도 한 순간의 말 실수가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쓸쓸히 보내야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조대림은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와 결혼한 부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개국의 칼이 되었던 조준, 토지개혁을 주도했던 인물로 고려말 사대부의 기반을 무너트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조대림은 약간 어리석어 보일만큼 순박했다. 아마 그래서 일까 그는 엄청난 음모에 휘말리게 된다.

 

1) 조대림 역모 고변

 1408년(태종8)은 태종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해였다. 아버지 이성계가 5월24일 죽었다. 자신을 끝까지 따듯하게 대해주지 않던 아버지, 조선 개국을 위해 헌신했던 자신보다 계모 강씨의 자를 세자로 세우면서 동기간에 피를 뿌려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자신을 지지해줬던 아버지의 배다른 동생 이화가 8월6일 죽었다. 그리고 2째 사위 조대림역모 고변이12월5일 발생했다. 조대림은 태종의 2째 딸 경정공주와 혼인해 중구 소공동에 있는 남별궁에 살았다. 소공동은 바로 경정공주의 애칭으로 그녀가 살던 곳이 지명이 되어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목인해는 태종의 매부 이제의 가신(家臣)이고 목인해의 부인은 조대림 집의 종이다. 목인해는 조대림 집에 자주 드나들며 어리숙해 보이는 대림을 모함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란 생각에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짜 목인해는 조대림의 역모를 고변했다.

 목인해는 이숙번을 찾아가 평양군(1406년 조준의 작호를 이어받음)이 두마음을 품고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고변를 했다. 이숙번, 권규(권근의 아들, 태종의 3째 사위), 마천목을 죽이고 궐을 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목인해는 이숙번에게는 역변을 고변하고 조대림에게는 경북궁 북쪽에서 무장한 군사가 공격을 해오니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며 군사를 움직이도록 덫을 놓았다. 태종을 찾아간 조대림은 병사를 내달라고 했고 태종은 상황을 모른척하며 군사를 내줬다. 태종은 궐안에 역모가  일어나면 나발을 불어 군사를 불러드리도록 되있는 점을 이용 나발을 불어 조대림이 궐로 돌아오는지 여부를 두고 역모의 진위를 가릴 셈이었다. 나발 소리를 들은 조대림은 참모에게 의견을 묻고 궐로 향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대림을 가혹하게 형신한 대사헌 맹사성, 좌사간 유백순, 지평 이안공, 정언 박안신이 왕실을 욕보인 것이라며 태종이 분노했고 추국에 가담했던자들을 추국하되 자백하지 않으면 죽여도 좋다고 했다. 결국 왕실을 능멸한 죄를 물어 죽이겠다는 태종의 마음이 담겨진 메세지 였다. 맹사성 등은 형신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숙번, 권근(병 중에  나와), 하륜(영의정), 성석린(좌의정), 조영무(삼군영사) 등이 맹사성의 사형 불가를 주청했고 태종은 앞으로 왕족을 능멸하지 말라며 용서했다.

 

2) 2차 선위 파동 

 태종9년(1409)  43세 되는해 죽음의 고비를 여러차례 넘기며 극도의 피곤함을 느끼던 왕은 선위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편히 쉬고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외척에게 병권을 맏기려 했다. 그러나 민씨 형제를 보고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대군들의 안위였다. 외척을 배제하고 종친쪽으로 선회했다. 8월10일 인사조치 단행과 함께 선위할 것을 밝혔다.

8월13일 이숙번은 태종에게 선위 철회를 청하며 현재는 혈기가 왕성하니 더 보위에 계셔야 한다고 했다. 태종이 언제쯤 쉴 수 있겠는지를 묻자 기력이 쇠해지는 50 이후라고 대답했다. 이사건은 이후 태종 17년(14017) 세자에게 아부하려 했다는 죄로 의금부에 갖혔다 유배 후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실록에는 이숙번이 평소 교만하고 무례하게 행동 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문로 근처에 대궐 같은 집을 지어놓고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는 등 횡포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태종은 그의 방자함을 눈감아 줬다. 그러나  행정능력이 별로 없어 그를 관리직에 임명하지 않았고 작호만 높여 주었다.

 태종 치세 중에 자연재해가 유독 극심했다. 왕의 덕을 따지던 시대이므로 자연히 걱정이 될 수 밖에 없다. 백성을 볼 면목이 없었다. 왕은 백성을 염려하며 대성통곡했다.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어 그런가 신하들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이무렵 이숙번은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서운함과 함께 괴씸한 태종은 이숙번의 과거 발언을 문제 삼았다. 

불경, 무례 등 여섯가지 죄목을 달았다.이때 덧붙인 말이 인상적이다. "이와같은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죄를 물을 때  태종이 주변 신하들에게 의향을 밝히면 나머지 신하들은 앞다투어 상소해서 그 방향으로 밀어부친다. 이것이 조선의 왕조정치다. 이무렵 하륜이 물러나고 박은이 하륜자리를 대신했다. 태종은 이숙번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봤다. 삼사에서 국문을 요구했지만 태종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고 유배를 결정했다. 후일에 태종은  유정현, 박은, 심온 등과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이숙번 유배결정에 대하여 "뒤에 자손들이 아버지가 신용하던 사람이라하여 그에게 일을 맡겼다가 큰 문제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소회를 밝혔다. 태종이 민무구 형제를 숙청한 것도 앞을 내다보고 단행한 조치였다. 조선의 왕 중 과연 태종만한 인물이 있을까? 예전에 어느 배우가 시상식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다 차려놓은 밥상에 나는 숟가락만 하나더 얹었을 뿐"이라고,  세종은 아버지가 닦아놓은 길을 무탈하게 갔을 뿐이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타고 영광을 누리는 배우처럼 성군의 칭호를 받았다. 역사를 보는 시각도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다. 결과보다 과정의 땀을 잊으면 안된다.

 

'역사고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종  (0) 2014.11.22
태종  (0) 2014.11.22
태종  (0) 2014.11.20
태종  (0) 2014.11.17
태종  (0) 2014.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