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세자 양녕(世子 讓寧)
1. 유년시절
양녕이 출생한 1394년 무렵 정안군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 개국에 깊이 참여했지만 공과를 따진 논공행상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정치에도 일절 참여하지 못했다. 세자는 계비 강씨의 둘째아들 방석에게 돌아갔다. 왕은 고사하고 자칫 잘못하다가는 목숨까지 잃게될 지경이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 양녕이 태어났다.
양녕은 어린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스승이기도한 驪興 府院君(임금장인, 정일품직) 민제다. 양녕은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외롭게 보내야 했다. 외로움은 훗날 양녕이 여성 편력을 보이는 행태와 무관하지 않다.
1398년7월19일 정안군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戊寅靖社(1차 왕자의 난)는 부왕을 권좌에서 내려 앉히고 2년 후 왕좌에 오른다. 사실상 쿠테타다.
무인정사 때 맨 먼저 칼끝이 향한 곳은 부왕이 머무는 경복궁이다. 부왕을 제압하지 않았다면 쿠테타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종2년(1402)에 양녕은 세자가 되었다. 그는 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서연제도를 도입했다. 사(師 : 영의정), 부(傅 : 좌의정, 우의정), 빈객(賓客 : 정2품;좌빈객,우빈객, 종2품;좌부빈객, 우부빈객)과 전담 선생을 두었는데 선생의 학식은 훗날 그 시대를 대표할 뛰어난 인재 중에 선발 했다. 서연은 왕위에 오르면서 경연으로 바뀌게 되는데 경연에서는 국정 전반을 논하게 된다.
양녕은 태종의 바램처럼 학문에 열중하지 못했다. 태종5년 9월14일 양녕이 12세 때 글을 외워보라 했으나 외우지 못했고 식사 예절도 엉망이어 크게 실망했다.
2. 사냥과 여색에 빠진 세자
요즘도 그렇지만 부부가 화목하고 자녀를 사랑으로 키우면 아이는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무슨 일에든 집중력을 발휘한다. 어린 시절 양녕은 외가에서 자랐다. 외조부 슬하(膝下)에서 자랐으니 엄격하게 예의범절을 익히기 보다 자유롭게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자랐을 것이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커서도 내면적으로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런 사랑에 대한 갈구는 성인이 되면 여성 편력으로 바뀌게 된다. 먹어도 먹어도 목마름이 가시지 않는 소갈증처럼 많은 여성을 만나도 원천적으로 유아시절에 채워지지 않은 사랑이 채워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양녕도 어릴 때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이러한 심리적 기조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보니 학문에 열중하지 못하고 색, 음악, 사냥 등에 빠져들었다. 태종과 부인 원경왕후의 부부 갈등도 양녕이 밖으로 나도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양녕은 궐밖 사정을 잘 알았다. 세자궁 내시들의 양자와 어울려 매사냥을 하거나 악공 구종수와 이오방을 대동하고 기생 봉지련과 음주가무를 즐겼다. 이것도 모자라 봉지련을 궁중에 끌어들여 주색을 즐기다 태종에 발각되기도 하였다. 태종10년 11월3일 그의 나이 17세 였다. 세자의 일탈은 가정불화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태종이 화를 내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멈추지 않고 번복하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태종 17년 1월1일 신년하례 때 박은은 세자 앞에 꿇어 업드려 " 세자께서는 장차 보위에 오르실 분인데 어찌 국왕의 명을 따르지 않습니까?"하며 간언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럴 수 없다. 어찌보면 양녕은 아버지 태종을 상대로 시위를 했다고 봐야한다.
3. 어리 간통 사건
전 중추 곽선의 첩 어리의 미모와 재예(才藝)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은 세자는 어리를 데려오라고 했다. 이오방은 곽선의 조카사위 권보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처음에는 수긍하지 않다, 세자의 명이란 말에 자신의 첩을 통해 어리 의중을 살폈으나 싫다는 답을 전했다. 이때 악공 이법화는 선물로 환심을 살 것을 제의했고 패물을 마련 전했으나 어리는 받지 않고 몰래 곽선의 양자 이승집으로 옮겨갔다. 이법화는 세자를 데리고 이승의 집을 찾아가 어리를 내놓으라 했다. 처음엔 모른다고 잡아 떼었으나 장차있을 화가 두려워 어리를 내놓았다. 세자는 어리를 데리고 이법화의 집에가 동침했다. 태종 17년 2월15일 어리의 간통사건이 조정에 알려지자 태종은 17일 세자를 사가(김한로의 집)로 내쳤다. 신하들이 다시한번 기회를 주자고 청해서 2월22일 변개량이 대필한 8개항의 반성문을 작성, 왕에게 올린 후 궐에 돌아왔다. 이후 세자의 행실은 더욱 눈에 띄게 나빠졌다. 서연을 수시 중단하고 태종이 지방을 순시차 떠나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온갖 여염집 여인을 건드렸다. 이렇게 1417년은 흘러갔다.
태종 18년 2월4일 성녕대군이 죽었다. 태종은 막내아들 성녕을 아끼고 사랑했다. 슬픔이 너무커식음을 전폐한 채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5월10일 터졌다. 세자가 어리를 임신케 한 사실과 성녕이 죽었을 때 활을 쏜 사실이 뒤 늦게 알려졌다. 태종은 대노했다. 비밀리 조정 대신을 불러 세자문제를 상의했다. 이때 세자는 태종에게 편지를 써 부왕의 여성 편력을 되려 문제 삼았다. 아버지는 시녀와 놀아나며 왜 자신은 안되냐는 것이었다. 만약 양녕이 왕이 되려는 생각 이었다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그래야 옳았다. 그러나 양녕은 아버지에게 대들고 있다. 가정 불화로 불편한 내면을 드러낸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효과라 한다. 양녕의 마음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컸다. 태종의 외척 발호를 억제하려한 정책의 부작용일 수 있다. 태종은 6월2일 양녕을 폐세자 했다.
4. 세자 양녕의 마음
어릴 때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해 애정 결핍을 지닌 양녕은 성인이 되어 여성 편력을 갖게 됐다. 부모가 점점 외가 문제로 다투고 첩 문제로 갈등 하게 되면서 자신의 본분이 학문을 하는 것임에도 이를 등안하고 사냥,색, 음악에 빠져든 것은 아마도 자신을 망가트리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저항하려한 것은 아닐까? 외가에서 자란 그는 외가식구를 박하게 대하는 것이 불만스러웠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