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혼이 서린 개경 땅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왕조의 실권을 틀어진 개혁세력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겁박해 왕위를 빼앗았다. 물론 정치적 행위에 따른 헤게모니(Hegemonie) 싸움이긴 하지만 쓰러져가는 고려를 무너트리고 새왕조를 탄생시킨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반추(反芻)해보면 쇄락해가는 국가는 반드시 서민 경제의 파탄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통치자의 권력이 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입에서 나오기도 한다. 통치자를 지지하는 것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배고품이 사라진 후에 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태조는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로 집권 7년만에 아들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만다. 요즘도 가끔 재벌가에서 재산싸움을 할 때마다 채용되는 "왕자의 난"이다. 이성계는 변방의 장수였다. 그가 중앙정치의 무대로 들어가는데 큰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은 신덕왕후 강씨의 힘이 컸다. 재경부인인 강씨의 집안이 세도가였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아들 중 방원은 재향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6남중 5째다. 방원은 이성계가 왕이 되는데 주도적 역활을 했다. 이성계가 왕이되는 과정에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힘이 컸다. 그러나 이성계를 추종하던 세력은 이방원의 공과를 무시했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철저히 배제했을 뿐 아니라 병권마져 빼앗으려 했다. 우리에게는 왕자의 난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무인정사(戊寅靖社)는 결국 왕권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벌인 싸움으로 이방원이 실권을 거머 쥐었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실권 후 태종과 갈등을 격는 과정에서 정종에 의해 버려졌다가 태종이 화해를 하면서 한양 재 천도를 강권해 이뤄졌다.
경복궁은 시경 대아편에 나오는 글로 '君子 萬年介 爾景福'에서 유래했으며 "왕의 만수무강과 복"을 기원한 글이지만 실제로 경복궁은 이름 값을 못했다. 아버지에게 칼을 겨눈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임진왜란 때 선조가 궁을 버리고 피난 길에 오르자 성난 백성들이 불태워 페허가 된 후270여년을 쓰지 않고 버려두다 조선 말엽 흥선 대원군이 대대적인 보수작업으로 정궁의 모습을 되 찾나 싶었는데 1895년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면서 또다시 불운의 궁으로 남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궁궐이란 궁과 궐이 합쳐진 말로 궁은 왕이 정무와 거처하는 곳이고 궐은 궁성, 성루, 성문을 가르키는 말이다. 궐을 드나드는 문은 동,서,남,북에 각각 문을 두었는데 동쪽에 건춘문, 서쪽에 영추문, 남쪽에 광화문,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봄은 동쪽을, 가을은 서쪽 방향을 나타낸다.
경복궁은 영제교가 놓여져 있다. 백성들이 사는 곳과 왕이 사는 곳을 구분짓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천자 오문(五門), 제후 삼문(三門) 규정에 따라 제후국 조선은 삼문삼조(三門三朝)로 구성되어 외조(外朝)는 신하들이 집무를 보던 관청, 치조(治朝)는 근정전과 사정전으로 왕이 공적인 업무 공간. 연조(燕朝)는 왕과 왕후의 침전과 생활 공간으로 사적공간에 해당한다.
대통령의 상징적 문장이 봉황이라면 왕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오봉산 일월도가 있다. 일월 곤륜도(日月 崑崙圖)라고도 하는 오악은 동쪽에 금강산, 서쪽 묘향산, 남쪽 지리산, 북쪽 백두산과 한양 중심의 삼각산(북한산)을 그림으로 그려서 왕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병풍을 치도록 했다.
근정전은 가례, 수연, 왕의 등극 등 국가 대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장소다. 마당에는 품계를 나타내는 품계석이 있다. 조선은 양반사회다. 문반과 무반이 있었지만 문반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중에서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관료는 정삼품 이상을 말하는데 문관의 경우 통정대부와 통훈대부로 나눠 전자를 당상관 후자를 당하관이라 했고 조회 참석, 왕과 국사를 논하는 관료는 당상관이었다.
사정전은 왕의 집무실이다. 편전이라고도 하며 양쪽 동일 선상에 동쪽에 만춘전과 서쪽에 천추전이 있다. 이곳은 국정을 살피고 경연을 열어 경륜이 있는 왕사들과 국사를 논하는 곳이다.
사정전은 중종 때 개혁정치를 주장하던 사림파 거두 조광조를 친국한 장소로 유명하다.
경회루는 태종 12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누각으로 지어졌다. 왕이 주관하는 대연회나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장소로 사용하였다. 최근에 인터넷 신청을 받아 제한적 인원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다. 경복궁 나들이에서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운 좋게 경회루를 오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에 한 눈에 들어온다. 연회석 중앙에 누어 보기도하고 해설사의 말을 들으며 건물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한 조상들의 지혜를 음미해본다. 때 마침 가랑비가 내려 운치를 더한다.
수정전은 세종 때는 집현전, 세조 때는 예문관으로 그리고 고종 때는 잠시 편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변에 200여채에 가까운 행각이 있었고 이곳에서 한글 창제가 이뤄졌다. 고종 말엽에는 군국 기무처로 사용되었는데 정치와 군사 일체를 맏아 보았다. 군국기무처는 국정을 농단하는 일을 서슴치 않아 고종이 가슴 앓이를 했다고 한다.
건청궁은 고종이 정치적 독립을 하면서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지은 곳이다. 앞에는 향원정이 있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정사각형의 못에 중앙에 동그란 섬이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지다는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궁궐이나 사찰의 건축 양식에서도 적용된다.
건청궁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슬픈고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1895년 10월8일 '여우사냥'으로 명명된 일본 낭인들의 조선국모 시해 사건이다. 일본 낭인이 개입되기 전 흥선 대원군은 명성황후를 정적으로 보고 지속적으로 제거하려 했다. 심지어 일본 공사관에 청탁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주동자들이 일본의 최고 엘리트층으로 지식층마져 정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아마 지금도 전쟁 피해국가를 상대로 사죄하기를 꺼리는 것을보면 지식층의 부도덕성이 빚어낸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끝판이다.
조선 말 약탈의 대상이던 민중들이 자각하면서 들불처럼 일어난 민란과 동학혁명 등을을 내부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열강들의 손을 빌려 해결하려 했다. 국내 정세는 열강의 각축전으로 변했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주권을 빼앗기는 참담한 종말을 맞고 말았다. 도둑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꼴이 된 조선은 결국 자기살을 베어줘야하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망국의 길을 걷는 군주의 공통된 점은 나의 일을 남에게 맏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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