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ebs 교양프로
제목 : 위대한 로마 1부 / 황제들의 정치무대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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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 로마의 어느날 밤, 그밤 로마사람들은 잠을 설첬다. 내일 시작될 엄청난 축제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집을 뛰쳐나왔다. 그들이 달려간 곳 그곳에 새로운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오늘이 바로 경기장에 개장식이 있는 날이었다. 경기장이 건설을 시작하여 개장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어언 8년, 경기도 경기지만 건축물 그 자체로도 로마사상 최고의 위용을 갖춘 구경거리였다. 시인 마르테알리스(MARTIALLIS)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이집트인들아 ! 피라미드를 자랑하지 말라. 앗시리아인들아 ! 바빌론을 입에 담지말라. 황제의 새 원형경기장 앞에서 그것들의 설 자리는 없으니 모든 명성은 이를 위한 것, 모두가 이 그림자에 가려 지리라." 시인이 비길데 없이 위대하다고 일컬은 황제 원형경기장 그것이 바로 콜로세움 이었다.
로마에서는 시간이 길을 잃게 한다. 천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는 아직도 이 도시에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만나는 찬란한 예술과 문화, 놀라운 기술 혁신의 흔적들 ! 역사가는 말한다.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湖水)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그 호수로 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로마는 말 그대로 서양문명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위대한 로마문명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첫 손가락에 꼽는 것이 콜로세움이다.
지금 현재 남아있는 콜로세움은 원형에 겨우 삼분에 일(1/3)규모, 그러나 당대 이 건축물은 명실상부 로마 최고, 최대를 자랑하는 원형극장형 경기장이었다. 또한 이곳은 황제들의 놀라운 정치무대 이기도 했다.
서기 80년 바로 이곳에서 콜로세움을 축하하는 성대한 축제가 벌어졌던 것이다. 축제는 무려 백일간이나 계속될 예정이었고 날이면 날마다 진귀한 구경거리가 예고되어 있었다. 축제의 주인은 티토스 황제. 막 寶位에 오른 황제가 시민들에게 베픈 대 향연이었다.
콜로세움 내부에서 다양한 경기들이 벌어졌는데 많은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경기 중 하나가 나우 마키아라고 하는 모의 해상전투였다. 경기장 내부에 배를 띄워 모의 해상전투를 벌이는 거였다. 이곳에서 해전을 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백일 축제를 기록한 마리테알리스는 그날의 현장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먼곳에서 처음으로 이 성스러운 공연을 보러온 당신, 바다같은 물, 배들에 전쟁, 놀라지 마오 ! 나는 당신에게 말했지. 이곳은 원래 육지였다고," 어떻게 이런일이 가능했을까? 콜로세움내에 백개가 넘는 음수대(飮水臺)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송수로가 연결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경기장 내부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경기장의 둘레를 에워싸고 있는 도랑의 형태가 뚜렸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수로에는 물이 흘러 나갈 수 있는 서른 개의 배출구가 뚫려있다. 이 배출구로 흘러간 물이 경기장 아래쪽 지하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개장 당시 콜로세움의 지하는 지금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유적의 바닥에 빼곡히 자리잡은 지하구조물들은 후일 경기장을 개축하면서 건설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경기장은 어떤 구조였을까? 콜로세움에서는 티투스 황제 당대의 모습을 추정하여 목조로된 가변형 무대를 일부를 복원해 놓고 있다. 모의 해전을 위해서는 경기장 바닥과 나무 기둥을 철거하고 방사형으로 된 경기장 내, 수로와 지하로 이어지는 서른개의 방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했다. 지하 공간에 물을 가득 채우는 데는 두 시간에서 다섯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물의 양은 약 육만 오천 리터, 그 인공적인 호수위에 전선을 띄웠다. 모의 해전은 원래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던 행사로 강이나 호수에서 병사들이 해전을 재현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면서 범죄자나 노예들을 배에 태우게 되었고 한편이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우는 피비린내 나는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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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 축제에 등장한 또 다른 인기 종목은 맹수 사냥이었다. 경기장에 맹수를 풀어 놓고 사람들과 싸우게 하는 것이 경기의 내용이었다. 마르테알리스는 어느날에 맹수 사냥 경기를 이렇게 읊었다. "그는 짐승들의 왕으로 군림하는 저 곰을 칼로 찔렀다. 그는 헤라클레스가 대적할 만한 거대한 사자도,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표범도 죽였다. 동물들은 죽은 후 그냥 버려지지 않았다. 가죽은 시민에게 선물되었고, 고기는 이후 진행될 맹수 사냥을 위해 우리에 갖혀있던 맹수들에게 먹이로 주어졌다. 그런 잔해가 콜로세움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다.
콜로세움 제 2 전시장에 보존 되고 있는 뼈 중에는 로마 일대에 서식하지 않는 열대 동물들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동물들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당시 로마는 세계제국 이었다. 그 영토가 북쪽으로는 스코틀랜드, 남쪽으로는 지중해를 휘돌아 이집트까지 걸쳐있었다. 그 광대한 지배 권역에서 북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 누비아에서는 하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자가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콜로세움 경기장에 쓰인 동물들은 대단히 중요한 상징성을 띠었다. 이 경기는 문화적 차원의 기능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동물들을 정복함으로써 로마가 정복한 도시들을 환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마가 더 멀리 진출할 수록 더 이국적인 동물들을 데려왔고 이는 로마의 힘을 과시하는데 안성 맞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00일 축제 중 첫날 하루에 맹수 사냥으로 죽어나간 동물들 수가 무려 5천 마리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런 엄청난 규모의 축제가 100일 동안이나 계속 되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티토스(AD79 ~ 81)황제는 대체 이런 어마어마 한 축제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티투스의 아버지였던 선왕 베스파시아누스 (AD69 ~79)황제 시대로 돌아가봐야 한다. 서기 69년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로마의 변방 유대전선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로마의 민심은 내전으로 흉융했다. 네로 황제가 반란군에 쫓겨 자살한 후 1년사이 3명의 황제가 바뀌는 대 혼란기였다. 로마의 동쪽 방어선을 맏고있는 동방군단은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로마의 9번째 황제로 추대했고 원로원이 이를 공식 승인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전선을 아들 티투스에게 맞기고 로마로 귀환했다. 새로운 황제에게 주어진 과제는 내전으로 황폐해진 로마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일은 황제로서 자신의 위상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이전 황제들과 달리 황족도 귀족도 아닌 평민출신이었다. 그가 황제로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폭군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던 네로(AD54 ~ 68)황제와 자신을 분명히 차별화 해야만 했다.
학정(虐政)과 전란에 지친 로마 시민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 것인가? 그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내놓은 가장 큰 선물이 콜로세움 건설이었다. 사실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곳곳의 도시에 경기장을 건설했다. 어떤 공공시설보다 검투를 할 수 있는 경기장을 제공하는 것이 민심을 얻는 데는 제일 이었기 때문이다. 혈통의 정당성이 부족했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그것은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검투사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승률이 높은 검투사들은 어데를 가나 주목을 받았다.
경기 전날 밤에는 항상 잔치가 열렸다. 검투사들은 대개 전쟁포로 출신의 노예들 이었으나 신분과 상관없이 그들은 당대 제일가는 스타들이었다. 그들의 땀은 향수로 팔렸고 여자들은 돈까지 내며 검투사들을 만났다. 검투는 로마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검투경기장을 건설하고자 한 것도 그때문 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아주 특별한 무엇이 되기를 원했다. 어느 황제의 경기장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역사상 전무후무 한 건축물이기를 바랬다.
콜로세움은 다분히 정치적인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경기장을 짓는 위치부터 특별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지목한 위치는 시가 중심부에 자리한 네로황제의 궁전자리였다. 바다처럼 보이는 인공호수와 150개의 방을 거느린 초 대형의 호화궁전으로 그 이름도 찬란한 황금궁전으로 불리던 곳이다. 서기 64년 로마에 큰 화재가 일어나 도시의 2/3가 불타고 수천명의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때 네로는 일반 시민들의 주거지였던 화재지역 땅 80만 제곱미터를 몰수해 자신의 개인 소유로 만들었으며 바로 그자리에 지어진 것이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였다. 네로 개인만을 위해 지었던 궁전을 허물고 그자리에 시민 모두를 위한 공공시설을 짓겠다. 그것이 베스파시아누스가 택한 방식 이었다. 콜로세움이 다른 경기장과 달리 로마시가 한 복판에 자리잡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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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황제는 자신의 거대한 궁전을 짓기위해 로마인들의 집을 허물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황제의 궁을 허물고 콜로세움을 지음으로써 시민에게 공간(空間)을 되돌려주었다. 이 결정을 내리고 나서 베스파시우스는 정치적인 큰 이득을 보게되었다.
마침내 황금궁전 중심에 있던 인공호수에서 물을 빼기 시작했다. 서기 72년 콜로세움 건설공사가 시작 된 것이다. 당시 콜로세움 공사는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었다. 두개의 원형극장을 합처놓은 것 같은 이런 형태의 경기장은 처음인데다 둘레 527미터, 길이 18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건축해야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52미터에 달하는 높이였다. 이 높이는 오늘날 아파트 17층이나 18층과 맞먹는 엄청난 것이었다. 당시 돌로 지은 건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구조적 발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치의 발명이었다. 아치를 만들때는 우선 목조틀을 지지대로 만들어 돌을 쌓고 꼭대기에 쐐기돌을 넣는다. 쐐기돌이 돌의 무게를 양쪽으로 분산시킴으로서 아치위에 더 많은 돌을 쌓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콜로세움 건축은아치들의 교향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내부에도 수 없는 아치들이 연속돼 이런 겹겹의 아치들이 벌집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치는 로마 건축의 공간 개념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었다. 재료는 적개들이고 무게는 줄임으로써 고층의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기술이었다. 그러나 아치만으로는 52미터에 달하는 높이를 지탱하기 어렵다. 여기에 또다른 혁신적인 발명품이 등장한다.
콜로세움 유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오늘날 현대 건축에서 흔히 쓰이는 것과 같은 건축재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벽돌과 콘크리트의 흔적이다. 로마인들은 당시에 이미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그들은 후일 시멘트라 불리는 단어의 어원이 되는 시멘텀이란 물질을 만들어 썼는데 여기에 모레와 자갈을 혼합한 것이 콘크리트다. 시멘텀은 석회에다 물과 특별한 재료를 한데 섞은 것이었으니 이 특별한 재료가 바로 화산재였다.
로마인들은 서로 다른 자재들을 교묘하게 혼합해 크고, 높은 구조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보다 가볍고 견고한 건축재에 발명과 활용 이것이 로마 건축에 혁명을 가져왔고 콜로세움 건축을 가능하게 한 열쇠였다. 콜로세움은 최 첨단 건축재와 건축기술의 전시장 같았다. 당대 로마인들이 고안해낸 최신 기계장치, 기중기도 그 하나였다. 콜로세움 건축현장에는 도르레를 이용한 기중기가 동원되었다. 무거운 건축재를 2층에 올리기 위해서는 기중기가 필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다. 콜로세움은 그가 원한 그만큼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데 충분한 위용과 아름다움을 갖추어갔다. 콜로세움의 외벽은 대리석으로 장식됐고 각 층을 지탱하는 기둥은 각각 다른 그리스 양식이 채택되었다. 1층은 간소하고 중후한 도리아식, 2층은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이오니아식, 3층은 화려한 코린트식이었다.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가 채워지고 5만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계단식 관중석은 대리석으로 완비되었다. 콜로세움의 맨 위층에는 나무기둥을 박아 벨라리움(Velarium) 이라고 불리는 개폐식 차양막을 설치했다. 수병 천여명이 줄을 당겨 필요할 때마다 차양막을 열고 닫았다. 덕분에 햇볕이 뜨거운 날에도 관중석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울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 콜로세움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은 아치에 장식된 조각품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개인 정원을 장식하고 있던 조각품들을 공공의 것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네로가 자신의 모습을 본따 황금궁전 앞에 세웠던 거상은 없애지 않고 태양신으로 변조했다. 이거상의 이름 콜로소(Colosso)에서 콜로세움이 유래했다고 와전돼 있으나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세스(Colossu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콜로세움을 통해 자신이 로마의 본질인 공공성을 회복시킨 황제로 기억되길 바랬다. 그리하여 공사가 시작된지 8년 마침내 드러난 콜로세움의 그 모습은 시인 마르테알루스는 이렇게 찬양했다. "황재의 지도력 아래 로마는 본연의 모습을 회복했고 폭군 개인의 쾌락이었던 이 공간은 이제 시민들의 기쁨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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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 학자들에게 콜로세움 건설은 큰 의문이었다. 당시 네로와 삼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로마의 재정은 파탄상태였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짓는데 드는 재원을 대체 어디서 마련했던 것일까? 단서는 콜로세움 내에 있었다. 콜로세움 남쪽 입구에서 발견된 콜로세움 헌납 비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글자들은 후대에 수정된 것으로 돌에 남아있는 못자국들을 이어보니 전혀 다른 원문이 들어났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전리품으로 새 원형경기장을 지었다. 콜로세움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서기 70년 1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 아버지 대신 유대전선을 지키고 있던 티투스가 마지막 저항을 하던 에루살렘을 함락시킨 것이다.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티투스에 예루살렘 정벌을 기리기위해 세워진 기념물이다. 이문에는 개선장군 티투스의 귀환이 잘 묘사되어 있다. 승리의 기쁨에 취한 병사들이 유대 신전에서 약탈한 보물들, 탁자와 나팔과 일곱 갈래 촛대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모습이다. 당시 티투스의 귀국길에는 수레가 끝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수레에 실려온 수 많은 전리품들이 콜로세움 건설 비용에 충당되었고 삼만여 명에 달하는 노예들은 현장 노동력으로 투입되었다. 콜로세움은 정복자의 경기장이었다.
서기 79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세상을 떴다. 자신의 야심작인 콜로세움의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콜로세움의 개장은 새 황제 티투스의 몫이 되었다. 콜로세움은 티투스에게도 중요한 정치무대였다. 새 황제는 아버지의 대 경기장에 버금가는 거대한 스팩타클을 펼쳐보이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100일축제 프로그램이었다.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각석으로 된 콜로세움 입장권부터 받아야 했다. 입장권에는 경기장에 있는 76개의 출입구 중 자신이 입장해야 할 출입구 번호가 쓰여 있어 그곳으로 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설계는 사람이 많이 몰려도 효율적인 입, 퇴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었다. 5만여 명의 관중이 30분이면 다 빠져 나갈 수 있었다.
각각의 출입구마다 입장할 수 있는 좌석도 정해져 있었다. 귀족들은 맨 아랫단이 지정석 이었다. 그 뒤는 기사들이 기사들 뒤에는 평민들이 앉았고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과 여자들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 가장 불편한 윗쪽 좌석에 앉아야 했다. 대신 그들은 돈은 내지 않았다.
황제의 입장 경로와 황제의 자리는 경기장 어디에서나 잘 보이게끔 신중하게 설계되어 있다. 황제가 로마사회의 정점임을 한 눈에 드러내 보이는 위치였으며 민중들에게 황제의 과시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무대는 없었다. 100일동안 콜로세움은 열광의 도가니었다. 축제의 하일라이트는 어디까지나 검투경기였다. 검투야 말로 로마인들의 피를 끓게하는 것이었다. 검투의 승패는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을 가른다. 사느냐 죽느냐 패배자의 생사는 황제에게 달렸다. 그러나 그것을 황제 마음대로 한 것만은 아니었다. 황제는 군중의 의견을 받아들여 패자의 생사를 선택했다. 경기장은 권력의 최정상인 황제가 민중의 소리를 직접 듣는 자리였다. 콜로세움은 그 규모나 구조에서 황제가 한눈에 관중을 보고 의사를 파악하는 데는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또한 이런 공공 오락시설은 황제가 시민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 이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일반 시민과 소통할 수 있는 매우 상징적인 건물이었습니다. 약 5만에서 6만명이 넘는 관중이 그들앞에 펼쳐지는 경기를 관람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황제가 또한 관중의 환심을 사고, 지지를 얻고, 그들과 소통할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기도 했다. 곧 콜로세움은 단순한 오락시설일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정치적 장소이며, 황제가 그의 시민과 최고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적인 장소 이기도 했던 것이다.
민중의 소리를 듣는 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티투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깨달음을 위해 뼈아픈 댓가를 치뤄 보았기 때문이다.
티투스가 유대전선에 머물던 시기 그는 사랑에 빠졌다. 당시 로마에 협조적 이었던 유대왕 아그리파 1세의 딸 베레니카아가 그 상대였다. 이민족의 딸이었으나 그들의 사랑은 뜨거웠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있는 로마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별은 길지 않았다. 연인을 뒤따라 베레니카가 로마로 왔기 때문이다. 실로 꿈같은 상봉 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는 끝 없는 행복만이 펼쳐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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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연인은 티투스의 저택에서 함께 살았다. 티투스는 공식적으로 베레니케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로마 시민의 격한 반대에 부딪쳐야했다. 로마 민중들은 유대공주가 미래 황후가 되는 것을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 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로마가 전쟁에 휩싸였던 과거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티투스에게는 당시 많은 정적들이 있었다. 스캔들에 발목을 잡히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베르니케를 유대로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티투스는 후일 그가 황제에 오른 뒤에도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민중은 황제의 독단적인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국가의 안전, 식량 사법처리까지 황제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고 다수가 원할경우 황제도 그 뜻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황제가 민중의 뜻을 거역하면 성난 군중은 폭동을 일으커 온 도시는 물론 궁궐조차 한 순간에 뒤집어 엎고, 황제를 죽일수도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에 티투스 황제는 로마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집정은 단 2년만에 끝났다.
서기 81년 티투스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서기81 ~96)가 새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 콜로세움의 완공은 사실상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이루어졌다. 도미티아누스는 당시까지 3층밖에 완성되지 않았던 콜로세움에 맨 윗층인 4층을 올려 공사를 마감한다. 더욱 큰 변화는 새로운 지하시설을 만들어 전혀 다른 차원의 쇼를 제공한 것이다. 지하 6미터 모의 해전의 물을 채우기 위해 텅비어 있던 공간은 각종 경기를 위한 복잡한 대기공간으로 바뀌었다. 우리에 갖힌 야생동물들과 처형을 기다리는 죄수, 몇분 후면 싸워야할 검투사들이 나란히 앉아있고 이 어두운 지하 세계는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할 존재들이 함께 숨죽이며 경기를 기다리던 곳이었다.
지하에는 동물이나 검투사를 지상으로 이동시켜주는 승강장치가 있었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캡스턴이 있던 자리다. 승강장치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수 많은 노예들이 달라붙어서 캡스턴을 돌려 승강장치의 동력을 만들어 냈다. 당시 콜로세움에는 적어도 28개의 승강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이런 승강기를 움직여 각종 무대장치와 맹수들을 경기장으로 들어 올렸다. 지상의 경기장에서 앞 순서가 진행되는 동안 지하에서는 다음 출전자들이 승강기로 이동했다. 캡스턴이 돌아갔고 승강기가 움직이는 순간, 지하에서 지상으로 주인공은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며 땅속에서 홀연히 솟아나듯 모습을 드러냈다. 도미티아누스가 대규모 지하시설을 한것은 이러한 무대 연출 효과를 위해서 였다. 그는 콜로세움에 야간 경기를 도입함으로서 극적 효과를 더했다. 그역시 아버지와 형에 이어 상상을 초월하는 깜짝쇼를 주재함으로서 자신의 권능을 대 내외에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중과 소통하려는 황제들의 강력한 정치적 목표가 있었기에 콜로세움은 비로서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 될 수 있었다.
기독교가 지배하게 된 뒤 로마 건축물은 석재 공급처로 바뀌었다. 그들은 콜로세움에서 떼어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가져갔다. 아치마다 놓여있던 수 많은 입상과 벽면을 장식하던 대리석들도 모두 제거되었다. 서기 217년 대화재와 422년에 지진이 콜로세움을 붕괴시켰다. 그후 성당 건물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짓기위한 건축자재와 대리석의 채석장이 되어 파헤쳐졌다. 1744년 베네딕트 교황 14세는 이곳에서 순교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추모하기위해 콜로세움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도의 처형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콜로세움은 뼈대만 남았다. 그러나 괴테는 말한다. 로마를 볼때는 육체의 눈으로 보지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콜로세움도 그렇다. 지금 우리가 보는 콜로세움은 원형에 1/3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으로 보면 그속에 실로 거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 참고 : 글래디 에이터, 스파르타 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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