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ebs 교양프로
제목 : 위대한 로마 2부 / 폼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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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완벽한 폐허, 그러나 2천 년 전 번성했던 한 도시의 역동적인 삶을 간직하고 있는 폐허다. 수호신처럼 도시를 감싸고 있는 것은 베수비오 화산이다. 베수비오는 화산이지만 1세기 어느날 까지는 천 년 동안 폭발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씨 좋은 거인처럼 광물질을 뿜어내, 주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그 기름진 땅에 자리한 이 도시가 로마제국 폼페이다. 폼페이의 시간이 멈춰선 것은 서기 79년 8월24일, 운명의 그날도 폼페이 사람들은 여늬 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했다. 베수비오 산이 폭발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화산폭발이었다. 순식간에 수백만톤의 화산 폭발 잔여물이 도시로 쏟아졌다. 사람도 도시도 그렇게 잿더미에 묻혔다.
폼페이의 부활은 기적에 가까웠다. 지하 4미터, 화산재 아래 봉인돼 있던 폼페이는 우물을 파던 한 농부의 우연한 발견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폼페이의 봉인이 풀리자 옛 로마제국의 도시문명이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발굴에 첫 삽을 뜬 지 올해로 삼백여 년, 초기 발굴은 대체로 무책임하게 이뤄졌다. 발굴자들이 주로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60년 이러한 발굴 방식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발굴을 체계화시킨 것은 로마 대학의 주세페 피오렐리 교수였다. 그런데 발굴이 본 궤도에 올랐을 때 폼페이 최대의 미스터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도시가 그대로 화산재에 덮였는데 몇 구의 화석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발굴한 어느 집에서는 식사 중에 봉변을 당한 듯 음식을 담아 두었던 그릇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주변에 어떤 형태로든 사체의 흔적이 있어야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용암과 화산재가 굳어진 화산재 사이에서 이상한 형태의 빈 공간이 건물마다 남아 있었다. 피오넬리는 이 의문의 공간에 주목해 석고를 부었다. 그리고 석고가 굳은 다음 석고 주변의 흙을 걷어내자 빈 공간을 채운 놀라운 형체가 드러났다. 순간 발굴단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폼페이 최후의 날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화산 폭발 때 생성되는 화산재가 희생자들의 피부를 완전히 덮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화산재는 굳게 돼 고유의 형태를 갖게하고 육체는 썩어 빈 공간이 생겨난 것이다. 그 빈공간에 석고 반죽을 채워 넣자 폼페이 사람들의 최후 모습이 살아난 것이다. 폼페이 최후를 증언하는 사체 캐스트의 발굴로 폼페이는 비로서 온전한 본 모습을 드러냈다.
뜨거운 화산재의 열기를 견디지 못해 입과 코를 막은 채 앉은 자리에서 숨진 마부, 뱃속에 아기를 보호하려고 엎드린 모습의 임산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죽음을 맞은 개, 연인이 손을 맞잡고 재앙으로부터 달아나려 했던 애틋한 모습까지 폼페이의 순간의 모습이 과거로부터 현재로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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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는 나폴리만 연안에 자리한 로마의 지방도시였다. 나폴리만 평원 위쪽에 높이 솟은 이 산이 폼페이를 삼켰던 베수비오다. 걷보기엔 온화해 보이지만 지금도 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이다. 베수비오산 동남쪽 기슭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 이름이 폼페이다. 이천 년 전 로마제국으로 들어가는 시간의 통로와도 같은 곳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곧게 뻗은 도로와 즐비한 건물들, 당시 사람들이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로마시대 전성기 도시문화를 오롯이 만날 수 있다. 옛 로마제국의 도시 가운데 폼페이처럼 도시 원형이 잘 보전된 곳은 또 없을 것이다. 폼페이는 로마제국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매우 놀라운 창이다. 도시 생활의 디테일이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다. 역설적이지만 화산 폭발로 발생한 매우 잔인한 붕괴는 그 어떤 곳보다도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존해 시간을 거스르는 과거 여행을 가능케 했다.
상공에서 보면 폼페이는 일정한 간격으로 구획되어진 격자형 도시다. 전형적인 로마제국의 도시 구조다. 도심 곳곳으로 연결되는 중앙도로는 큼직한 판돌을 깔아서 만든 견고한 포장도로다. 마찻길 양옆으로 보행자용 도로가 따로 있고 횡단보도에 해당하는 곳에는 디딤돌이 놓여 있다.
마찻길에 일정한 구간마다 이처럼 디딤돌을 설치해 보행자가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만들었다.
디딤돌 주변에는 선명한 바퀴자국이 남아 있다. 달려오던 마차가 디딤돌 사이를 통과하기 위해 속력을 줄인 흔적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로마시대 살아 있는 일상을 만날 수 있다. 갖가지 물건이 거래되었던 폼페이의 쇼핑상가 지구는 고대도시의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다. 고대에는 의식주를 모두 자급자족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폼페이 사람들은 쇼핑 상가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했다. 그동안 폼페이에서 발굴된 상점만 400여 개에 달한다. 폼페이 번화가에 해당하는 아본단차 거리, 실제로 이 일대에서 상점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여러개의 화덕이 설치된 대리석 조리대가 남아 있어 음식점이었던 곳임을 알 수 있는 곳은 요즘으로 치면 패스트 프드점과 같은 곳이다. 도시에는 대형 빵집이 있어 집에서 빵을 만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 벽돌로 만든 대형 오븐과 커다란 맷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규모가 큰 빵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응회암으로 만든 맷돌 옆구리에 구멍이 나 있다. 여기에 손잡이를 끼워 넣고 맷돌을 돌려 밀을 빻은 것이다. 맷돌은 노예가 직접 손잡이를 돌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노새나 말을 이용해 돌리는 것도 있었다. 빵은 붉은 벽돌로 만든 가마형 오븐에 구웠다. 갖 구어낸 빵은 폼페이 사람의 주식으로 팔려 나갔다. 빵집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빵굽는 오븐이 없는 서민들이었다. 고소한 빵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폼페이 시민들은 한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빵집 앞에서 차례를 기다렸을 것이다.
아본단차 상가 구역에서 발견된 또 다른 건물, 발굴 당시 건물 출입구 옆에는 큰 항아리가 놓여있어 그 단서를 제공했다. 건물 앞을 오가던 사람들이 오줌을 누울 수 있도록 놓아 둔 항아리였다. 로마시대에는 세탁을 할 때 오줌을 세제로 사용했기 때문에 세탁소 건물 앞에는 항아리를 놓아둔 것이었다. 이미 그 시대에 폼페이와 같은 로마제국 도시에는 오늘날처럼 바쁜 도시사람들을 위한 세탁소가 있었던 것이다.
쇼핑상가는 젊은 연인들에게 좋은 데이트 장소였을 것이다. 첫 데이트에 나선 빵집 총각은 이곳에서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하고 프로포즈를 했을 수도 있다. 젊은 연인들을 유혹하는 새로운 상품과 흥정 소리로 폼페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아본단차 거리에 또 다른 흥미로운 상징물이 있다. 마찻길에 새겨진 남근 형상이다. 도심 곳곳에서 다양한 남근 형상이 발견된다. 왜 !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도심 곳곳에서 이같은 남근 형상을 만들어 둔 것일까? 이에 대한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사창가의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게 신빙성 있는 이론은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사회에서 남근은 오히려 부와 행운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길거리나 상점 위에 남근형상을 설치해 놓고 부와 행운을 가져다 주기를 빌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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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전, 폼베이는 지중해의 국제무역 도시였다. 바다로 이어지는 성문 밖은 국제 무역선들이 닻을 내리는 항구였다. 지중해의 해상 무역선들은 인도와 중국까지 나아가 동방의 진귀한 사치품을 수입해 왔고 폼페이는 동서양을 오가는 상선들이 반드시 거쳐가는 거점도시로 눈부시게 발전해 갔다.
항구 주변에는 먼 바닷길을 달려온 국제 상인들을 위한 술집이 즐비했고 매춘을 하는 유곽까지 있었다. 이층 건물의 유곽은 성 행위를 묘사하는 에로틱한 벽화와 돌침대를 갖춘 여러 개의 방들로 이루어져 있다. 벽화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을 위해 그려놓은 것으로 항구에 드나드는 국제 상인과 선원들이 주 고객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해상무역으로 번성한 폼페이에는 재벌급 부자들도 많았다. 저택의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열주식 기둥들만 봐도 그 자체로 웅장하다. 신비의 저택이라 이름 붙여진 아흔 칸 짜리 대 저택은 출입구 통로를 지나면 "아트리움"이라 칭하는 중앙 홀이 나온다. 아트리움 주변은 예순 여개의 방이 둘러싸고 있고 뒤로는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저택의 구조는 로마의 전형적인 주택양식을 따르고 있다. 저택 내부 장식도 화려하다. 신비의 저택 프레스코화, 특히 그 시대에 크게 유행한 것이 프레스코화 장식이었다. 젖은 석회벽에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내는 프레스코화는 부자들이 누리는 최고의 사치였다. 신비의 저택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는 디오니소스 추종 의식을 묘사한 연작 벽화로 폼페이 레드라 불리우는 진홍색 바탕에 실물 크기의 인물을 대담하게 표현해 놓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폼페이 부자들은 사치와 낭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즐겼다. 저택에서는 자주 성대한 만찬이 열렸고 연회장에는 으레 카우치(침대모양의 의자, 누워서 음식을 먹을 때 쓰임)가 마련되어 있었다. 부자들은 카우치에 누워 포크와 나이프를 쓰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음식은 다 먹지 않고 남겨서 버리는 것이 당시 부자들의 미덕이었다. 폼페이 한 저택 식당 바닥에서 발견된 모자이크화도 실제로 먹다 버린 포도송이와 게다리 등 사치스런 식사의 흔적이 잘 묘사되어 있다.
폼페이에서 열린 한 연회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또 다른 벽화다. 한 남자가 다른 손님들 바로 옆에서 토하고 있다. 고대 로마시대 연회에서는 이처럼 구역질하는 손님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계속해서 음식을 먹기 위해 깃털로 자신의 목을 간질러서 먹은 음식을 토해 낸 다음 또 다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에 속했던 많은 도시처럼 폼페이도 빈부 격차가 매우 컸다. 부자들은 도시 내, 부의 대부분을 소유했다. 부자들은 시외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저택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들이 가진 재력만큼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폼페이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폼페이는 빈부 격차가 컸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굶어 죽는 비극은 없었다. 로마제국의 도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제국 황제에게는 시민들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국토 안보 못지 않은 정치적 과제였다.
수도 로마에서는 황제의 이름으로 빵을 무상으로 나눠 주는 식량배급 정책을 실시했고 폼페이 같은 지방 도시에서는 부유한 지도층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벽화에는 흰 투가를 입은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 빵을 나눠 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는 폼페이의 돈 많은 부자이거나 치안 판사 같은 고위층으로 추정된다. 부자들이 구제활동에 적극적인 것은 사회적 지지기반을 확고하게 해, 부는 물론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높은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다.
폼페이가 로마제국에 편입된 것은 기원 전 90년 경 로마의 아우구스트 황제는 무력에 의존하던 제국의 통치기법을 변화시켰다. 점령지에도 수도 로마와 같은 혜택과 권리를 부여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결과 폼페이는 로마의 축소판과 같은 도시로 바뀌었다. 폼페이 길가에 설치된 수도는 당시 로마 도심의 문명 수준을 보여준다. 지금도 사용하는 수도가 2천 년 전 폼페이 사람들이 사용하던 공공수도라면 믿어지는가? 이미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그 시기, 폼페이와 같은 로마제국의 도시에는 이와 같은 공공 수도가 도입되었다. 그것은 로마인들이 개발한 공학적 산물이었다.
로마 수도교의 기본은 중력을 이용한 것이었다. 물을 고산지대의 수원지에서 도시로 운반하려면 일정한 경사도와 수압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로마인들은 계곡이나 강처럼 지대가 낮은 곳에는 수도교를 놓아 이 문제를 해결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개발한 아치기술을 이용해 웅장한 규모의 다리를 놓고 그 위에 수로를 놓았다.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로지붕을 덮어 맑은 물이 흐르게 했다. 이 물이 로마 시내 350키로미터에 달하는 수도망을 이룬다. 그것은 문명의 혁신을 이룬 대 사건이었다. 폼페이 연인들이 살았던 이 도시에도 로마식 공공수도가 설치되었다. 폼페이 수도 곳곳에 설치된 수도는 분수식이었다. 시민을 위한 공공 인프라를 중시한 로마의 도시정책은 폼페이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맑은 수도물이 공급되면서 로마적 가치와 삶의 양식을 따르는 요소들도 함께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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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국가관이 매우 뚜렷했다. 국가를 의미하는 로마어 Respublica는 공공의 물건이란 의미로 해석된다. 결국 국가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모든 로마의 도시들은 시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시민을 위해 많은 공공시설을 제공했다. 시민에게 제공된 공공시설의 좋은 예가 바로 수도교다. 폼페이 가장 높은 지대에 기발한 시설이 있다. 수도교를 거쳐 물을 저장하고 통제하던 급수탱크 시설이다. 여기서 물은 세 갈래로 나뉘어 공급되었다. 각각의 수로는 시민들을 위한 공공 수도용과 공중 목욕탕용, 그리고 부유층이 돈을 내고 설치한 개인 수로다. 가뭄이 들어 식수가 부족해지면 가장 먼저 부자들의 개인 수도를 끊었고 다음은 공중목욕탕, 하지만 시민들이 식수로 사용하는 공공수도는 마지막까지 흐르게 한 것이 로마의 수도물 공급 원칙이었다.
로마식 공공성은 도시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 폼페이 중심가에 이 공중목욕탕은 세계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로마식 공중 목욕탕으로 미학과 과학이 어우러진 걸출한 건축물이다. 웅장한 규모의 목욕탕 내부는 벽화의 조각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벽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바닥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꾸몄다. 둥근 돔식 천장은 유리창을 달아 햇빛으로 자연채광을 했다. 천정과 벽면에 있는 겹겹의 결은 수증기 방울이 사람들에게 떨어지지 않게 만든 건축적 장치다. 물방울이 맺히면 이 결을 따라 벽면으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공중목욕탕은 무엇일까?
왜 화려하게 만든 것일까? 로마시대 공중목욕탕은 단순히 몸만 씻는 곳이 아니었다. 누구나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 문화시설이었다. 공중목욕탕에는 식당은 물론 휴게실과 체육관 등 갖가지 문화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목욕탕 이용에는 신분 차별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 일과를 마친 폼페이 사람들은 누구든 이곳에 들러 게임도 하고 안마도 받으며 쌓인 피로를 풀었다. 이들에게 공중 목욕탕은 로마식 문화를 누리는 사교의 장이자 로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주는 그런 곳이었다.
로마가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폼페이 도시 구조에도 구현되어 있다. 중심 간선도로를 교차하는 지점을 보자. 폼페이 심장부에 해당하는 포럼구역이다. 포럼은 대리석 기둥으로 둘러싸인 로마식 중앙 대 광장으로 로마의 도시문명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다. 이곳에는 대리석으로 마감한 화려한 기둥들이 남아 있어 과거 웅장했을 회랑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거대한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서 열주식 회랑을 이루며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구조다. 수도 로마의 포럼처럼 이곳 역시 로마식 삶의 바탕을 이루는 공간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층 높이의 열주식 회랑이 중앙에 광장을 감싸듯 에워싸는 직사각형의 닫힘 구조다. 그러나 광장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어 독립성과 개방성을 두루 갖추었다. 도시의 주요 시설들은 광장을 정점으로 들어섰다. 베수비오 화산이 보이는 북쪽에는 세 명의 로마신을 모신 카피톨리 신전이 위치한다. 광장 서쪽에는 로마 시대 법정에 해당하는 바실리카가 있다. 그 사이에 아폴로 신전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의 주요 공공시설이 광장을 중심으로 밀집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광장은 폼페이 시민들이 로마식 삶을 구현하는 공적 활동의 장이었다.
포럼은 모든 로마 도시 내에 존재하던 매우 특징적인 공간이었다. 포럼에 가서 시장도 보고 공지문도 읽고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공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럼은 법정이기도 했으며, 또한 사람들이 투표하던 곳이기도 하다. 시의원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도시민들이 모두 모여 공중 앞에서 결정을 내리는 곳이기도 했다.
해마다 3월이면 폼페이 중앙 대 광장은 후끈 달아 올랐다. 도시의 행정을 책임질 집정관을 시민 손으로 뽑는 선거가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집정관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광장에서 정견을 밝히고 한 표를 호소했다. 당시에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10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투표권이 있었지만 여성들도 지지하는 후보를 위한 선거 홍보에 나섰을 정도로 그 열기는 뜨거웠다. 아무리 유력한 집안 출신이라도 시민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당선은 불가능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덕목은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었다. 그것은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는 것이었고 또 로마를 세계의 제국으로 만들어준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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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도시답게 폼페이는 풍요롭고 아름다웠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운명의 그 해 8월이 왔다. 폼페이 특산 포도의 수확철인 이 계절은 모든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갖 빚은 포도주는 연인들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했을 것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폼페이 사람들은 여느 날과 다름 없이 활기찬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아본단차 거리의 쇼핑상가는 손님 맞을 준비를 서둘렀고 연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후 한 시 경 사람들은 깜짝 놀라 베수비오산을 바라보았다. 굉음과 함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이다. 폭발은 거의 원자폭탄 강도로 몇 초마다 일어났다. 화산 중심에서 하늘의 성층권까지 30 키로미터의 기둥 모양을 형성하고 그 기둥에서 아주 작은 조약돌 모양의 화산재들이 떨어졌다. 당시 나폴리 만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로마의 젊은 작가 폴리니우스가 그날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전해지고 있다.
첫 폭발이 일어나고 잠시 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폼페이 사람들은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 재앙의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수백만 톤의 화산재와 부식물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불길하게도 바람은 남동쪽으로 불었다. 폼페이가 있는 방향이었다. 폼페이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살길을 찾아 헤매었지만 안전한 곳은 없었다. 임산부도 예외는 아니었다.다친 사람을 다루던 외과의사도 끝내 숨을 거두었고 어떤 가족은 방 안에 피신해 있다 질식사로 죽었다.
화쇄암 폭풍이 폼페이를 한 순간에 덮쳤다. 폭풍처럼 도시를 삼킨 것은 엄청나게 뜨거운 물질로 이뤄진 화쇄나늄, 산중턱을 타고 내려오면서 시속 160키로미터 속도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극은 이튿날인 8월25일 아침이 되서야 끝이 났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폼페이는 4미터 높이의 화산재에 묻혀 버렸다. 사람도, 도시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폼페이 사람들은 최후의 순간을 맞았던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발굴을 담당했던 피요롤레 교수가 찾아낸 그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찾아낸 주검은 2천 여구, 폼페이 주택의 작은 방에서 죽음을 맞은 이들은 가족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어린이를 꼭 껴안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엎드린 채 발견된 남자는 의사였을 것이다.수술용 칼을 지니고 있었다. 죽어가면서도 서로를 지켜주려한 폼페이 연인도 있었다. 2천년 전 폼페이 사람들은 한 찰라에 영원의 시간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영원의 시간 속에 로마의 도시 폼페이의 오늘이 있다.
☞ 참고 : 폼페이의 최후, 볼케노(Volc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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