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ebs 교양프로
제목 : 세계문명사, 강대국의 비밀 2부, 대영제국의 탄생
불과 17년 전,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가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세계의 최강자로 군림했는데, 그 자리를 영국에 물려줘야 할 운명에 놓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하면 영국을 떠올리지만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16세기 스페인 이었다.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의 수호자였다. 종교적 신념이 투철하고 이단에게는 가혹했다. 신교도국가 영국은 그에게 눈에 가시였다. 펠리페 2세는 영국을 가톨릭으로 되돌리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냉정한 거절이었다.
게다가 영국 해적들은 스페인 보물 선을 가로채는 골치 덩어리로, 신대륙으로부터 스페인에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보물을 약탈해갔다. 스페인은 영국 왕실에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여왕은 해적 왕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사실 해적의 배후엔 엘리자베스 1세가 있었다. 동업자 관계에 있었다고 할까, 영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영국왕실 재정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해적질은 영국왕실이 포기할 수 없는 수입원이었다.
펠리페 2세의 감정을 건드린 또 하나의 사건은 네덜란드 독립군에게 병사를 지원한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 국왕의 영지로 전쟁 중 이었다. 펠리페 2세의 분노가 폭발했다. 우는 아이의 울음도 멈추게 한다는 아르마다가 위력을 보여줄 때라고 판단한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에 출전을 명했다.
1585년 영국침공 결정과 함께 무적함대 아르마다 와 네덜란드에 주둔 중인 파르마공의 육군이 합동작전으로 영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무적함대가 영국해군을 물리치고 영국내륙에 상륙하면 엘리자베스 1세의 운명도 끝이 날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드레이크는 해적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훌륭한 전략가요, 용맹한 선원이었다. 스페인보다 먼저 스페인을 선제공격할 것을 제안한 것도 드레이크였다. 1587년 4월27일 드레이크는 카디즈 항을 기습공격해서 스페인 배 37척과 수천 톤에 달하는 식량과 화물 보급품들을 파괴했다. 그리고 해적답게 보급품들을 잔뜩 약탈한 드레이크는 유유히 항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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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전함을 능가하는 새로운 배의 탄생 비화는 카리브 해의 싼후안 데 울루아라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568년 이곳에 영국 배들이 들어왔다. 존 호킨스와 프란시스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이 선단의 실질적인 주인은 여왕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납치한 노예들을 아메리카에 팔고 신대륙의 황금을 얻어왔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황금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으로 가져가는 것은 불법이었다. 스페인 함대는 영국함대의 안전한 입항을 보장 했으나 항구에 들어서자마자 돌변해 무차별 사격으로 2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호킨스와 드레이크는 겨우 탈출했고 그들은 삶의 목표가 스페인에 대한 복수가 되었다.
우선 가볍고 빠른 선박을 건조하기위해 높은 갑판을 낮추고 선체를 유선형으로 설계해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배를 만들었다. 이 배가 바로 레이스 빌트 갈레온 이다.
1588년 5월 28일 천신만고 끝에 펠리페 2세는 불굴의 의지로 함대를 재구성한 후 메디나 시도니아공을 총 사령관으로 한 무적함대를 출전시켰다. 무적함대 아르마다의 특징은 바로 엄청난 숫자의 보병이다. 과거의 해전은 적함에 올라가 창이나 칼, 화승총 등으로 육박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영화에서 해적들이 싸우는 방식을 생각하면 된다. 싸우는 장소가 배 위일 뿐 육지에서의 전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영국의 경우 항해에 필요한 인력, 대포를 장전할 인력을 수용하기에도 공간이 비좁았기 때문에 보병을 탑승시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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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7월31일, 드디어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갖추고 항해하는 아르마다 함대 뒤편에서 영국의 함선이 대포를 쏘았다. 영국해군이 시종일관 거리를 두고 공격해 갈고리를 걸 수 없던 스페인 육군은 갑판 위에서 싸움을 할 수 없었다. 무적함대 아르마다의 위용을 잘 아는 영국군은 근접전은 피했다. 먼 거리에서 쏘는 함포는 배에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16세기 대부분 나라가 청동 대포를 쓸 때 영국은 주철 대포 개발에 주력했다. 청동 대포는 비싸고 실용적이지 못했다. 포신이 열 받으면 부풀어 올라 대포 사용을 멈춰야 했다. 반면 주철은 충격에 약해 포열이 폭발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해 포를 쏘던 병사들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영국해군은 주철의 강도를 보다 튼튼하게 해서 포 사격에 적합한 대포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이 포를 레이스 빌트 갈레온에 탑재했다. 빠른 선박에 계속 포사격이 가능한 배는 16세기에 아르마다를 능가하는 영국해군의 전략 선이었다.
세계를 지배하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왜 대포 도입에 열성적이지 않았을까. 당시 해전의 양상은 양쪽의 함선이 근접해서 선상에서 보병끼리 치열한 싸움을 하는 것에서 승부를 가리기 때문에 대포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았었다.
펠리페 2세는 기존의 질서를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가 가톨릭을 오랫동안 믿어왔기 때문에 신교를 반대하듯 그는 오랜 전투방식이 옳다고 믿었다.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는 권력체계가 옳다고 믿었다. 펠리페 2세에게 변화는 악이었다. 불과 17년 전에 파비아 전투나 레판토 해전에서 보병으로 적을 물리친 아르마다 무적함대에 대한 신봉이 해군 전력의 혁신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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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5월29일 오스만 트루크 매머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1천년 이상을 버터 온 난공불락의 성벽을 무너트린 것은 바로 대포였다. 불을 뿜는 도마뱀이라고 불린 대포는 포신만 8.2미터, 무게 19톤에 포탄은 500키로 그램 이상의 돌덩이를 깎아 만든 포탄은 최소 1.6키로 미터를 날아가는 괴물이었다.
스페인의 전략대로라면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파르마 공의 육군을 아르마다 함대에 싣고 영국본토로 가 상륙작전을 펴는 것이다. 그러나 메디나 시도니아 함대 사령관이 보낸 연락병이 소식을 전했다면 칼레 해변에 파르마 공의 육군이 기다리고 있어야 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병력의 이동준비가 끝날 때까지 칼레해안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드레이크 장군은 화공선 8척을 띄워 칼레해안에 정박 중이던 아르마다 함선에 접근 시켰다. 불타는 배가 접근하자 스페인 함대는 산개했고, 영국군을 위협하던 초승달 대형이 무너지자 영국군함은 근접거리까지 접근, 스페인 함선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해상에서 전투 방식이 바뀌었다. 선상에서 육박전은 사라졌다. 또 노를 저어 동력을 얻는 갤리선 시대는 끝났다. 영국은 바다와 해외에 장래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다를 제폐한 국가신화가 창조되고 이후 영국에 해양을 지배하는 영웅이 배출되었다. 결국 지중해식 해전 시대는 가고 근대적인 포격전의 시대로 바뀌면서 아르마다의 무적함대의 영광은 그 빛을 잃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제국시대도 역사 속에 묻혔다. 영국이 세계바다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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