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ebs 교양프로
제목 : 세계 문명사, 강대국의 비밀 1부 / 로마 시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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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제국 로마, 세계제국 몽골, 해가 지지않는 제국 영국, 그리고 20세기 초 강대국 미국까지 과연 무엇이 그들을 강대국으로 만들었을까?
우선 강대국이 되길 원해야 한다. 그리고 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또한 관용을 통해 영향력을 키워가야 한다. 몽골이나 로마, 영국은 다양한 국적과 많은 종교를 국가 체계의 토대로 삼았다. 그리고 성공했다.
강대국이 되기 위해선 어떠한 리더쉽이 필요할까?
강압을 통해서, 대가를 지불해서, 또는 매력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로마는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역할이 피정복민들의 평화와 부를 유지시키는데 있다고 믿었다. 이제 세계 패권의 비밀을 찾아 떠나는 2,500년의 여정이 시작된다.
기원전 216년 8월2일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칸나이 평원은 로마군의 참혹한 시체들로 뒤덮혔다. 이날 단 한 번의 전투로 로마는 8만의 정예군과 원로원 의원 1/3을 잃었다.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은 이제 칸나이와 로마 사이에 적군을 막을 만한 어떠한 병력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로마군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회복할 수 없는 전멸 상태에 빠진 것이다.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한 2년동안 사망한 병력이 10만에 달했다. 고대 역사에서 단기간 동안 그렇게 많은 병력을 잃은 경우는 없었다. 한니발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를 멸망시키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성장했다. 그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신전에 데려가 절대 로마인과는 친구가 되지 않을 것을 맹세 시켰다고 한다. 그 이후 한니발을 군인으로 키우며 로마에 대한 반감을 심어주었다.
로마는 기원전 216년에 破滅 직전까지 갔다. 로마 역사상 이보다 더 참혹한 패배는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부터 2,200년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는 이 일로 로마가 망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있다. 패배한 것은 고대 최고의 전략가 한니발이었다. 한니발이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전쟁에서 패한 이유가 무엇일까?
한니발의 고향 카르타고는 오늘날 튀니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중해의 지배권을 쥐고있던 북 아프리카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시리아와 지중해를 모두 빼앗겨야 했다. 당연히 복수심에 불탔고 한니발의 부친은 카르타고가 과거의 세력을 되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강경파 중 한사람이다. 그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새롭게 강력한 지역기반을 만든 뒤 대군을 키워 훈련을 시키고 준비했다. 그가 죽고난 후 사위가 지도권을 이어받았고 한니발이 그 뒤를 계승했다. 바르카 가문의 가업이 되었고 한니발은 로마에 대한 복수를 숙명으로 여기며 성장했다.
기원전 219년 한니발은 스페인 반도 안에 있던 로마의 동맹도시 사군톰을 공격함으로서 전쟁을 시작했다. 동맹도시가 공격받자 로마는 지원군의 파견을 결정한다. 스페인으로 병력을 파견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는 한니발이 스페인에서 영토확장을 계속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니발에게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중해는 이미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와 있었다. 또 이탈리아와 연결된 육지는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양떠를 모는 목동이라면 몰라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껏 카르타고가 그런 전략을 취한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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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예상을 뛰어넘는 전략가였다. 혹한에 알프스를 넘는 모험을 강행했다. 5만의 병력과 37마리의 코끼리를 대동하고 적대적인 갈리아인들과 싸워가면서 프랑스 남부를 횡단한 후, 알프스를 넘었다. 기원전 218년 11월, 한니발의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했다. 알프스를 넘는 모험은 한니발 군사들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5만이던 병력이 2만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한니발을 기다리고 있던 로마군은 총 75만 명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엄격한 군기와 강력한 전투력으로 정평이 나있는 로마군단이었다. 한니발은 3만 5천의 병력으로 100만 대군의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전략을 철저히 분석했다. 한니발의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당시 로마가 단일국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원전 3세기 로마는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맹주로 하는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였다. 그 안에는 로마인과 유사한 라틴계도 있었고 전혀다른 그리스계 도시도 있었다. 심지어 당시로서는 야만인인 갈리아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불과 2 ~30년 전만해도 로마와 칼을 겨누던 사이었다.
우린 이와 유사한 형태를 아테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성기에 아테네도 로마처럼 도시국가를 거느리고 거느리고 있었다. 주변에 무수한 도시국가들이 아테네를 맹주로 받들었다. 아테네나 로마뿐 아니라 페르시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페르시아인의 패권 아래 메디아인,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유대인, 페니키아인, 앗시리아인, 그리고 그리스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국의 응집력은 생각보다 약했다. 대규모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면 제국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붕괴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불과 3만6천의 병력으로 100만 대군의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본격적인 첫 대결인 이수스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에게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페니키아인, 이집트인, 이오니아인이 알렉산더의 우군으로 변했다. 두번 째 대결이었던 가오가멜라에서 마져 다리우스 3세가 참패하자 이번에는 메소포타미아지방까지 알렉산더에게 성문을 열었다. 고립된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는 추격할 필요조차 없이 자멸하고 말았다.
한니발은 이탈리아도 페르시아와 똑같은 상황으로 인식했다. 첫번째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승리는 곧 로마동맹의 붕괴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한니발은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에서 했던 일을 이탈리아에서 재현하려 한 것이다. 군사적인 천재인 한니발이 로마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면 로마의 동맹국들은 자연스럽게 한니발쪽으로 넘어올 것으로 판단했다. 두, 세 차례 압도적인 승리가 겹처지면 로마연합은 붕괴할 것이고 한니발은 손쉽게 로마를 멸망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첫 번째 충돌은 로마가 가장 최근에 정복한 지역인 갈리아 카살피아 지역에서 벌어졌다. 갈리아 카살피아는 현재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으로 당시엔 원주민인 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3세기 후반 로마는 포계곡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갈리아인은 땅을 빼앗겨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는데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하자 한니발이 승리하면 포계곡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는 갈리아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단을 출동시켰다. 로마군단과 한니발이 맞 붇은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이 완패를 했다. 그러자 이수스 전투 이후에 페르시아에서 일어났던 일이 갈리아 카살피아에서도 일어났다. 갈리아인들이 일제히 로마에 반기를 들고 한니발 휘하로
몰려들었다. 한니발 병력은 단번에 5만으로 늘어났다. 한니발은 로마 동맹국에게는 일관되게 자비를 베풀어 로마연합의 결속을 와해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로마연합 포로에게는 몸값도 받지 않고 풀어줬다. 나의 적은 오직 로마뿐이다. 자유와 독립도 보장하겠다. 이런 사실을 너의 나라에 알리라는 것이 포로에게 당부한 전부였다. 트레비아 전투 패배로 로마는 갈리아에서 패권을 상실했다. 국가 원수격인 집정관 마져도 전사한 참패였다.
한니발의 전술 요지는 병력을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하며 로마군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로마군을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하는 것이었다. 심리전을 처음으로 이용했던 인물이 바로 한니발이다. <데이비드 포터/ 미시건대, 그리스 로마 역사교수>
로마군을 물리친 한니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마를 우회해서 이탈리아 남부로 남하한 것이다. 갈리아인과 라틴계 도시에 이어 이번에는 그리스계 도시들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 줄 차례였다. 이탈리아 남부는 곧 한니발의 무자비한 폭력앞에 노출되었다.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국들을 약탈하고 파괴하면서 이탈리아 남부를 휩쓸고 다녔다. 농장과 마을을 불지르고 소를 약탈하고 수확물을 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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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도 더이상 참지 않겠다는 각오로 강경파인 바로를 집정관으로 선출하고 총 동원령을 내렸다. 8만의 보병과 7천 명의 기병이 동원됐다. 총력전임을 보여주기 위해 원로원 의원도 80명이나 참석했다. 기원전 216년 8월 드디어 양군이 칸나이(Canne)에서 만났다. 페르시아는 이수스와 가우가멜라 단 두번의 대전으로 붕괴했다. 로마도 두차례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칸나이 평원에는 14만명의 대 병력이 집결했다. 지금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이정도에 병력이 한 장소에 집결한적은 없었다. 8월2일 아침 오판토 강 오른쪽에 로마군이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로마군의 전략은 힘의 우위를 이용한 정면돌파였다. 적에 비해 두배나 많은 8만의 정예부대를 중앙에 집중시켜서 힘으로 밀어 부칠 계획이었다. 한니발도 곧 진영을 갖추기 시작했다. 중앙 돌파에 집중하는 로마군에 대해 한니발은 길게 늘어트렸다.
갈리아인 보병을 중앙 선두에 배치해 로마군을 유인하는 역할을 맏겼다. 로마는 넓은 대형으로 진군을 하다가 갈리아인 병력에 다가가면서 밀집대형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한니발의 전략이었다. 로마 병사들 간의 간격이 좁아지면 효율적으로 싸우지 못할 것이란 점을 간파한 것이다. 갈리아 병력을 전면에 배치해 로마군을 유인하고 한니발의 기병은 공간을 확보하는 아주 기가 막히는 전술이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비록 보병전력은 적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기병은 로마보다 우위에 있었다. 7천명인 로마 기병보다 많은 1만의 기병이 있었다. 유목민 출신의 이들 기병은 로마기병보다 전투력이 뛰어났다. 한니발은 이 기병대를 양쪽 끝에 배치했다. 한니발은 전투에서 공간 사용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기병들이 효율적으로 싸우기 위한 공간이 필요했고 그의 대형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뤄냈다.
전투가 시작되자 중앙 돌파를 노리는 로마군과 한니발군의 제 1열이 충돌했다. 로마군이 중앙에 맹공을 퍼붓자 한니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예상대로 움직였고 로마군들 역시 자신들의 전술이 통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기병끼리의 전투는 로마의 생각과 달리 전개되었다. 숫적으로 우세하고 전투력도 뛰어난 한니발군이 로마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보병끼리의 싸움도 로마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한니발 군대의 1열이 후퇴하면서 둥그런 주머니 모양을 만들자 정예병력인 카르타고 보병이 로마군의 좌우에 등장했다. 로마군은 3면에서 공격을 당하기 시작했다.
로마 병사들은 마치 경기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군중 무리처럼 꽉 끼인 상태로 옴싹 달싹 못한 채 전진하는 상황이었다. 카르타고의 정예병들은 로마군의 얼굴을 보면서 살육을 해야했다. 5만의 병사들은 싸움보다 죽음을 기다리는 자처럼 서서 당해야 했고 카르타고 보병은 마치 도살을 하듯 기다리고 있다 순서대로 로마 병사들을 죽였다.
한니발은 로마연합이 동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포로를 로마군과 동맹국 병사로 나눈 뒤 동맹국 병사들에게는 몸값도 요구하지 않고 돌려보내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 로마병사는 무참히 죽였다. 한니발의 동생 마고는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카르타고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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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세계제국이라고 불리었던 페르시아는 이수스 전투와 가오가멜라 전투, 단 두번의 전투에서 패했을 뿐이지만 동맹국들의 이탈로 패망했다. 로마도 세 차례의 전투에서 패했다. 이 전쟁에서 누구나 동맹국들이 로마를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트레비아, 트라시메노, 칸나이 전투까지 세차례나 한니발에게 참패를 당했다. 역사적 사례를 비춰본다면 로마연합은 곧 붕괴할 것이다. 맹주로서 동맹국들을 지킬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를 돌아다니며 동맹국들의 이탈을 기다렸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로마의 동맹국들은 로마를 버리지 않았다. 카푸아 등 이탈리아의 남부도시 일부에서 로마의 반기를 들었지만 그들의 결속은 굳건했다. 오히려 로마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 비밀은 바로 로마 시민권이었다.
건국초기 로마인들이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해서 아내로 삼은 일은 루벤스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그림의 소재가 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신랑이 신부를 안고 문지방을 넘는 서양 풍습의 기원이 된 일화 이기도 하다. 사비니 여인을 약탈한 후 두 부족은 전쟁을 했다. 자기 딸들을 훔쳐갔으니 가만둘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4번에 걸친 싸움의 결과는 로마쪽의 승리였다. 한데 승리한 로마인들은 패배한 사비니인들을 그대로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귀족들은 그대로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 되었으며 왕도 두 부족의 왕이 공동 통치하기로 했다. 이처럼 로마는 건국 초부터 패배자들 조차도 자신들과 동등한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카이사르를 배출한 율리우스 가문이나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로마를 통치한 클라우스 가문 역시 로마에 합병당한 부족출신 이었다.
로마인들이 다른 제국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보여주는 다른 예는 바로 노예에 대한 예우였다. 그 당시 가사노예들은 요리, 정원관리, 집사 및 아기 돌보는 일 등을 했다. 이들에게는 10년간의 노예생활 후 자유가 주어졌다. 여기서 부터가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지만 이들의 자녀들에게는 자동적으로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개인의 혈통이나 문화, 배경, 종교 따위는 상관 없었다. 단지 로마를 위해 어떤일을 했는지가 중요했다.
20세기 패권국가인 미국과 로마는 그런점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미국은 지구상 모든 인종이 뒤 섞인 다민족 국가다. 로마도 마찬가지 였다. 다양한 인종이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로마인들이 이렇듯 인종에 대하여 자유로운 것은 자신들의 뿌리가 두 곳에서 유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하나는 아이네스를 들 수 있다. 로마 서사시에 등장하는 아이네스는 트로이 출신이며 로마인들은 아시아계 선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 다른 뿌리는 로마라는 이름을 따온 로물루스라는 인물로 순수 이탈리아 인이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혈통은 혼혈이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다른 문화가 유입되는 데 있어 개방적일 수 있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대결한 상대는 삼니움족 이었다. 강건한 산악민족이었던 삼니움족은 로마인들에게 여러차례 패전을 맛보게 했으며 무려 40년동안 전쟁을 계속했다. 40년간 싸웠다면 원한이 사무칠 만한 사이가 될법도 한데 무수한 희생을 치루고 삼니움족을 굴복시킨 로마는 이번에도 그들에게 시민권을 나눠주는 정책을 취했다. 시민권만 나눠준 것이 아니다. 한창 카르타고와 전쟁 중이던 기원전 263년 오탈리우스 크라수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데 그는 삼니움족 출신의 평민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삼니움족이 로마에 항복한지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이다. 이것은 동시대 고대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로마보다 훨씬 먼저 에게해와 지중해를 지배했던 아테네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당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에게해 지배권을 장악하고 사실상의 제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민권에 대한 관념은 로마와 완전히 달랐다. 아테네는 양친이 모두 시민권자인 경우에만 자식들도 시민으로 인정했다. 다른 도시민들은 물론이거니와 양친중 한쪽이 아테네 시민권자가 아닌 경우에도 아테네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연 최고 지도자 페리 클레스(기원전 495 ~429)의 아들조차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재혼한 아내가 외국인 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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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가 그리스 섬들을 제국에 편입시켰을 때도 아테네는 그리스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시민권을 취득할 방법조차 마련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편입된 도시국가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2류 시민이라고 했고 실제로 그런 위치였다. 이들은 그리스에 대하여 로마인처럼 협력적이지 않았다. 아테네 시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강대국이었던 스파르타의 시민권 제도는 더 폐쇄적 이었다. 건국 초기 스파르타는 전체 토지를 9천 개로 나눈 후 토지를 소유한 9천 명에게 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아테네의 경우처럼 양친이 모두 시민권자인 경우에 만 시민권을 주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자신들끼리 만 뭉쳤다. 외부인에 대해선 배타적이었다. 결국 스파르타는 로마와는 정 반대로 시민권자가 점차로 줄어들었다. 기원전 480년 전성기에 스파르타 시민권자가 8천 명 이었지만 불과 100년 후인 기원전 371년에는 시민권자가 고작 1,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스파르타군이 무적의 전사라고 해도 1,000 명밖에 안되는 시민으로 패권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결국 이민족을 동료로 받아들이지 못한 페르시아, 아테네, 스파르타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하는 순간 곧바로 붕괴했다. 동맹국들이 강한 주인을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는 달랐다. 동맹국에게 로마란 일시적으로 충성하는 주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 시민권자였다. 로마는 이미 그들의 조국이었다.
다시 한니발에게로 돌아가보자. 한니발은 진퇴양란에 빠져버렸다. 알프스를 넘으면서까지 감행한 이 모든 전략이 숲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알렉산더의 전략을 모방한 한니발은 로마에서 통하지 않는 것을 뒤 늦게 깨닫았다. 한니발과 정면 대결이 위험성을 인지한 로마는 전략을 지구전으로 바꿨다. 지구전을 추구해온 파비우스가 독재관으로 등장했다. 파비우스는 자신의 영광보다 로마제국에 최선책을 추구했으며 로마군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했다. 한니발의 세력을 고사시키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에게 물자를 지원할 수 없었다. 지중해를 로마가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에 겨우 한 차례 지원을 했을 뿐이다. 한니발은 계속 줄어드는 병력을 거느리고 이탈리아 남부를 배회했다. 칸나이 전투 이후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소강 상태에 빠졌다. 로마의 패망을 상상했던 한니발은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한니발쪽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드디어 로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장군이 등장했다. 그의 이름은 스키피오다. 적에게 배워 적을 공격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을 그대로 적용하는데, 군대의 중심부를 약화시키고 양 날개를 강화시켜 적군을 포위하는 전략으로 한니발 군대를 뛰어넘는 강한 군대를 만들었다.
기원전 202년 여름, 카르타고 남서쪽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을 모방하여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한니발은 자마에서 한번 패했을 뿐이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했다. 카르타고의 패배로 지중해는 로마의 바다가 되었다. 이후 로마는 제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니발 전쟁을 통해 로마는 멸망의 수렁에 빠질 뻔 했으나 위기극복 후 세계제국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로마는 튼튼한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로마 시민권제도다. 플로타쿠스가 "영웅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패자조차 자신들에게 동화시키는 힘은 바로 로마 시민권이었다.
서기 193년 4월14일 셉티 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의 새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북 아프리카 출신의 황제였다. 로마는 자신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 넣은 적국의 후손조차 황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다. 그 당시 원로원 의원 중 2/3는 이미 식민지나 속주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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