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해와 달처럼

해암 송구호 2020. 5. 30. 05:20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의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군주다. 역사의 기록이 승자 중심으로 쓰여저 있기에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부분도 있겠지만 두 사람에게 공통된 것은 부왕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어머니가 폐비 윤 씨로,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 한 씨가 자식 없이 죽은 뒤 계비가 되어 적장자인 연산군을 낳았다.

 부왕 성종은 임금이 되는 과정에 적통 승계(嫡統 承繼)라기 보다 정치적 술수가 작용했었다. 한명회의 딸이 자을 산군에게 시집을 갔던터라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는 예종의 아들 월산 군이 있었지만 배제하고 의경세자의 맏아들 제안대군까지 제치고 차자였던 자을 산군을 보위에 올렸는데 그가 바로 성종이다. 한명회의 사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조는 조카였던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고 그의 장자방이던 한명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과거 한나라 고조가 장량을 경계하듯 늘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딸들을 며느리로 삼거나 손자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정략혼(政略婚)을 통해 왕실의 안위를 담보코자 했는데 그 수혜자가 성종이었던 셈이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한확의 딸로 의경세자와 혼인을 했으나 의경세자(덕종)가 일찍 죽자 궐에서 나와 생활하다 예종이 죽으면서 한명회의 딸을 맞은 인연으로 다시 궐에 들어가게 된 여제다. 자을산군이 12세에 왕에 오를 때 비로소 소혜와 후라는 존호를 받았고 남편도 덕종으로 추존됐다. 훗날 인수대비가 된 그는 당대 명문가문의 딸이다. 반면 폐비 윤 씨는 판 봉상시사 윤기견의 딸로 아비를 일찍 여의고 홀어미 밑에서 자라며 베틀을 짜던 한미(寒微)한 집안의 여식이었다. 그녀가 며느리로 탐탁지 않게 여기지 않은 것이 훗날 폐비 윤 씨가 사약을 받게 되는 토대가 됐다. 

 폐비 윤씨의 사건은 권력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 가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한 순간에 추풍낙엽처럼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헌왕후(폐비 윤 씨)는 왕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친잠(親蠶)을 열어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려 했다. 대비전(정희왕후, 소혜왕후)에서는 윗전을 뛰어넘는 왕비의 태도가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친잠은 하되 진연(進宴)을 금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후행사가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되는 꼴이라 대비 전에 수차례 사람을 보내 겨우 허락을 받긴 했으나 대비전에서 제헌왕후를 곱게 보지 않은 모양이다. 폐비 윤 씨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패악한 여자로 전락했고 사가에 유폐된 지 3년 뒤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사됐다.

 연산은 어머니가 정치적으로 희생된 후 계모와 소혜왕후 밑에서 자랐다.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는 중종의 친모다. 한 사람은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훗날 자신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진성대군(중종)의 어머니다. 어린 나이라고 하나 자신을 예뻐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은 가릴 줄 아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연산은 사랑보다 자신의 흠을 들춰내는 사람들 속에서 위축된 상태로 숨죽이며 살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본 성종은 연산에 대하여 문리 불통(文理 不通)이라며 그를 나무랐다. 아마 연산은 자신이 알고 있더라도 자신감 있게 말을 하지 못 했을 것이고 또 주변에서 연산에 대한 험담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성종이 지레짐작으로 힐책(詰責)한 말일지도 모른다.

 연산이 왕위에 오른 후 초기 몇 년동안은 왕도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당시 훈구세력과 사림 세력 간 알력이 팽배하기 시작했고 그 틈새를 노리던 척신(戚臣)이 주도권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중에 척신 임사홍은 연산의 유년기 억눌 렸던 감정을 폭발시킬 폐비 윤 씨의 사건을 기록한 실록 내용을 귀띔해 줬고 연산은 실록을 열람(閱覽)했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후 100년 동안 폐비 윤 씨 사건을 발설하지 말라고 했지만 권력싸움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척신 임사홍은 이 것을 불쏘시개로 활용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는 조선 최초로 방계 혈통에서 왕이 된 경우에 해당 된다. 그는 명종의 총애를 받아 자주 궁에 들어갔는데 명종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그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선조는 혈통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광해는 서자 중 차자로 중국에서도 세자의 당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정치적 불운을 겪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쩔 수 없이 선조는 피난을 떠나는 와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명하며 분조(分朝)를 책임지도록 했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선조는 변심해서 광해를 세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은 후 더욱 그의 마음은 흔들렸다. 훗날 영의정 유영경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 것이 화근이 되어 커다란 혼란을 겪기도 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니 아랫것들은 군주로 섬기는 것을 꺼리게 돼, 결국 역모를 꾸미고 쿠데타를 통해 새로운 왕을 세우지만 권력은 자신들이 움켜쥐고 놓지 않으니 왕은 허수아비처럼 권력 중심에 서지 못했다.

 인조의 경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트린 왕이다. 내란으로 어수선한 틈을 노려 여진족이 침략했는데 이들은 장차 천하통일을 염두에 두고 명나라 편에 설 조선의 손발을 묶어두려는 계산하에 침략한 것이다. 국제 정세 변화에 둔감한 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있던 조정은 병자 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며 금과 군신관계를 맺었다.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을 연경에 볼모로 보내야 했고, 죄 없이 끌려간 백성이 수십 만 명에 이르렀지만 그들이 붙잡혀 가는 걸 눈뜨고 봐야 했다. 금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운 후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를 석방하자 원나라의 간자라는 의심을 품고 죽였다. 소현세자는 연경에서 금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외교력을 발휘해 양국의 갈등 관계를 해소하는 등 정치력을 발휘했지만 아버지의 눈엔 정적으로 밖에 안 보였던 것이다.  금에 끌려간 백성 중 큰돈을 주거나 운 좋게 도망친 백성들에게 베푼 은전이 "홍제천(弘濟川)에 몸을 씻으면 더럽혀진 몸이 깨끗해진다"는 말로 삶의 명분을 준 것이다. 당시 유교에서 여성의 정조는 죽음과 맞바꾸던 시절이라 집에 돌아가는 대신 홍제천 인근의 홍은동(弘恩洞)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홍은동이란 뜻은 임금의 넓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니 백성에게 무슨 은전을 베풀었단 말인가? 정치를 잘못해 백성들이 당하지 말아야 할 고초를 겪게 만든 게 누구였나?

 영향력(影響力)은 선하든, 악하든 힘이 미치는 쪽으로 기우는 게 보편적인 원리다. 가족 구성원 내에서도 이러한 원칙은 동일하게 작용한다. 부부가 상생하거나 아니면 권력다툼을 한다. 흔히 부부싸움이라고 말하지만 이 싸움은 누가 우위를 차지하냐의 싸움이기 때문에 서로 세를 드러내기 위한 것들을 늘어 놓고 논쟁을 벌인다. 학벌, 성적, 친구관계, 양쪽 집안의 재산이나 출세한 사람이 미치는 위력(威力)까지 하나하나를 내세워 힘의 세기를 겨룬다. 밀리는 사람이 꽁지를 내리면 이후 평화가 찾아온다. 가족 내에 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에 그 서열에 따라 지배와 복종이 존재하게 되고 질서가 세워졌기 때문에 승자가 정한 룰에 따르면 된다. 그러나 서로 끝까지 대립하게 되면 부부는 성격 차라는 이유로 이혼을 하게 된다.

 힘있는 사람이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처지는 천양지차(天壤之差)다. 아이가 자랄 때 부모로부터 인정(認定)과 격려(激勵)를 받으며 성장한 아이와 온갖 질시(疾視)와 무시(無視)를 당한 경우 전자에겐 누군가를 품을 정(情)이 존재하지만 후자는 남에 대하여 배타적(排他的)이고 함부로 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가정 내 폭력이 심할 경우 아이는 사회에 적개심(敵愾心)을 품고 불특정인에 대한 폭력성까지 내재(內在)할 수 있다. 사람이란 나무는 사랑이라는 양식(良識)을 먹고 자란다.

 로마시대 가부장의 힘은 초법적이었다.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고 있어서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자녀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일지 말지를 가부장이 결정했다. 당시 신탁(神託)을 통해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것이 보편화 돼 있어 주술사의 세치 혀에 따라 아이의 운명은 갈리는데 만약 가정에 재앙을 몰고 온다면 가차 없이 내다 버렸다. 당시엔 강물에 아이를 버리는 풍속도 있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보면 사회를 지탱해줄 근거(根據)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조 o 사태에서 내로남불이라는 불신을 키우더니 위안부(慰安婦) 할머니들을 돕겠다며 나섰던 정oo에서는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고 한다. 사회의 구성원인 국민이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집단이나 봉사 단체라는 명목 하에 후원금을 받아 마치 자기의 돈처럼 유용하는 것이라든지,  oo헌금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털어 넣으려는 무도한 자들이 활게를 치는 세상이 됐다.

  과거 세상이 어지러울 때 나타났던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등의 반 제도권 운동자들을 보면 고을 수령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바람에 민중의 생존 기반이 뿌리 채 흔들리자 불만세력을 규합해서 수탈자의 재산을 약탈한 도적의 수령이다. 예의와 염치를 잃은 치도(治道)는 서리와 군졸 등 하부층의 방종으로 이어졌고, 잔혹한 수탈자가 돼 백성들의 가산을 빼앗는 무도(無道)를 일삼자 삶의 터전을 두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들 중 일부는 유랑민이 되어 비럭질을 하거나 굶어죽었고, 다른 부류는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으로 살았으며, 완력(腕力)을 쓰는 자 중 일부는 도적이되어 유산자(有産者)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우리사회를 좀먹고 있는 일련의 일들이 정부, 국회, 사회단체, 봉사기관, 종교기관까지를 망라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넘어 불신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 민심이 떠난 자리엔 그 어떤 기구도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국난을 겪을 때 의병들이 죽창을 든 것은 왜적이라는 공공의 적이 존재했었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믿고 맡겨야 할 내부의 사람들을 못 믿는 것이다. 불신은 민심이반(民心離反)과 국론 분열이라는 무서운 괴물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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