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端午風情)은 단오 날에 여인들이 그네를 타며 즐기는 모습과 냇가에서 몸을 씻는 모습 뒤로 떠꺼머리총각들이 여자들의 반나체를 몰래 훔쳐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 여인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치마를 위로 들어 올렸는데 고쟁이를 입지 않아 속살이 드러나 있어 성적인 충동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다른 세 명은 냇가에 나란히 앉아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는데 상체를 벗었다. 이를 훔쳐보는 두 사람의 시선도 재미있다. 한 명은 가슴과 아랫도리를 드러낸 여인에게 눈길을 주고 있고 다른 한 명의 시선은 가슴을 드러낸 채 머리를 감는 두 여인에게 가 있다. 이성의 내밀한 부분을 훔쳐보는 관음증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나보다.
조선시대만 해도 남녀 7세 부동석이라 해서 남, 여는 서로 자리를 함께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자가 외출할 때는 쓰개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신윤복의 「월야밀회」에서 담벼락에 한 여인이 쓰개를 걸친 장면이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풍습과 비슷한 사례는 중동 이슬람교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여성은 외출할 때는 히잡(hijab), 차도르(chador), 브르카(burka), 니캅(niqab)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열사의 나라에서 브르카를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삶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복식 착용에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 사회적 규범과 종교적 신념이 만들어낸 결과다. 가부장제가 사회 전반에 남아 있어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한하고 있고, 코란에서 여성의 순결(純潔)과 정숙(貞淑)함을 위해 브르카 착용을 요구한다.
조선시대 혼례 중에 신혼부부가 신방에 들면 창호지를 뚫고 안을 들여다보던 풍습이 있다. 친영 례(親迎 禮)는 남자가 신부 집에 조랑말을 타고 가서 신부를 가마 태워 집으로 데려온 후 혼례가 시작된다. 혼례식이 끝나면 준비한 음식을 이웃과 나누고, 여흥을 즐긴 후, 저녁 잠자리에 들게 되는데 이 때 동네사람들은 신방을 훔쳐보는 게 결혼잔치의 하이라이트였다. 신랑이 신혼 방에 들면 약속이나 한 듯 신혼 방으로 몰려가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방안을 훔쳐보는데 아랫목엔 비단금침이 깔려있고 방 한쪽엔 간단한 주안상이 마련돼 있었다. 안에서는 호롱불 아래서 침묵과 긴장 속에 긴 호흡이 오가고 밖에선 호롱불이 꺼지는 순간을 마른침 삼키며 훔쳐보데, 당사자보다 더 긴장되고 떨리는 것은 아마도 신혼방에서 전개될 상황을 미루어 상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음증(觀淫症)의 속성은 이성의 은밀한 부위를 훔쳐보면서 성욕을 채우려는 심리다. 과거엔 왜 그들의 성적 욕망이 죄로 다스려지지 않았을까? 모르긴 해도 신분제도가 한 원인이 됐을 수 있다. 당시엔 신분의 격차(格差)가 존재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노류장화(路柳牆花)나 아랫것을 통해 해소할 수 있었다. 반면 현대사회는 계급이 사라졌고 남, 녀간 평등사회가 됐다. 그러나 외형상 계급은 타파됐지만 물질만능주의가 보이지 않는 계급을 만들고 있다. 돈으로 안 될게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과거부터 이어져왔던 관음증의 속성을 재현한 비밀 방(n번방)사건이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운영자는 n번방을 만들어 놓고, 텔레그램의 안전성을 미끼로 성도착증자들을 유혹해 뒷돈을 챙겼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불법으로 개인정보를 빼낸 후 그것을 이용 여성들을 협박해서 얻어낸 나체 시진을 이용, 또 다른 성 착취를 위해 그녀들을 아바타처럼 지배한」사건이다. n번방 운영자는 피해 여성을 통해 받은 나체사진이나 clip을 자신이 운영하는 비밀방에 올려 놓고 선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회원들에게 차등해서 돈을 받았다.
그는 불법으로 취득한 개인정보를 이용 전화와 문자 등으로 가해 여성을 협박해서 노출 사진을 요구했고, 보내온 사진으로 협박해 더 높은 수위를 찍어 보내도록 강요했다. 마치 전래동화 “해와 달”에서 호랑이가 어머니를 상대로 떡을 빼앗다 최후엔 어머니를 잡아먹고 자녀들마져 집어삼키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자녀에게 접근한 전래동화와 매우 닮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협박에 수긍하는 대상자들을 노예(奴隸)라고 칭(稱)하면서 원격(遠隔)으로 조정했는데 그 핸들 역할을 한 것은 피해 여성들이 앞서 보낸 노출사진이나 clip이 빌미가 됐고 피해 여성들은 자신이 보낸 사진이 수렁이 돼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마치 파리지옥처럼 「개인정보」라는 함정(陷穽)을 파놓은 후 그들의 영혼까지 악랄하게 착취(搾取), 유린(蹂躪)한 것이다. 범죄의 유형이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누군가의 영혼(靈魂)을 파멸(破滅)시키는 잔혹(殘酷)한 행위(行爲)다.
우리사회는 돈과 권력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억울한 성적 모욕과 수치를 당한 피해자들이 많다. 대표적 사례가 “장 자연 사건과 김 학의 사건”이다. 장 자연은 언론사의 대표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졌지만 몇 번 수사라는 변죽만 울리다 유야무야 끝났다. 최근 김 학의 별장 성 접대 사건도 검찰의 비호로 종결처리 되면서 흐지부지 끝났다.
언론과 수사당국에서 “n번방 사건”을 대하는 것은 피라냐떼들이 먹이를 물고 물어뜯는 것처럼 맹렬하고 사납다. 물론 이번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공분, 특히 여성층의 분노가 상당부분 반영된 것이라고 보지만 사회적 약자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의 처리가 다르다는 시각(視角)을 감출 수 없다. "n번방 운영자" 조 주빈은 임대주택에 사는 뚜벅이라고 한다. 그의 가족이 “법무법인 오현”에 변호수임(辯護受任)을 의뢰했지만 법무법인 오현은 25일 사임했다. 그는 변호사의 조력 없이 검찰조사에 임하고 있다고 한다. 범죄자의 죄질이 악랄하더라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받아야 할 권리까지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거 국정농단 재판에 최 서원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가 생각난다. 그 때 그는 국민의 눈총을 한 몸에 받았지만 변호를 포기하지 않았었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해야 한다. 죄질을 논하기 전, 사법부는 이전 판결문에 대하여 국민 앞에 떳떳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란다. 성의 문제는 법의 잣대가 유난히 들쭉날쭉이다. 성추문은 드러나면 치욕(恥辱)적인 행위로, 사회적 매장에 대한 공포(恐怖)를 느끼면서도 그 유혹을 버리지 못하는 허세부리는 남자들도 문제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말처럼 과거에도 여성편력은 능력 있는 자의 유희(遊戲)로 여겼던 적이 있었다. 그 땐 일부 여성이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았기에 가능했다. 기생이 대표적이다. 기생도 사회적 계급 중 하나로 풍류와 오락을 책임졌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은 사랑채에 드리기도 했다.
안방엔 명문가의 규수가 집안을 다스렸다. 안주인이란 말도 따지고 보면 여인의 활동 구역이 주로 집안 살림에 미쳤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들은 사랑채에서 생활하며 벗과 사교하는 것이 주가 됐다. 이때 화류계 품위 있는 여성은 이들의 교류에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현대에 와서 이 모든 사랑방 문화는 사라지게 됐다. 그렇다고 유럽처럼 salon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파티를 통해 이성과 자연스런 만남도 없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남, 녀 간 사교나 교제에 단절이 생기고 있다.
물론 여성을 성욕의 도구(道具)로 생각해서 미투, 야동, “텔레그램 n번방 사건”같은 음성적인 성문화가 사회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다. 외국과 달리 우리는 성을 드러내기보다 가리려하고, 음탕하고, 저질적이고, 더럽다고 생각한다. 성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지창조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영역이다. 이성(異姓)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돈 되면 뭐든 하는 개념없는 자들이 여성의 신체부위를 몰래 촬영해서 you -tube clip에서 공유하는 범죄 산업이 증가하고 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범죄의 수법이 잔인해서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불법으로 개인정보를 빼내서 끊임없고, 집요한 협박과 공갈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착취(搾取)하고 운영자의 요구에 순응하는 아바타로 만들어 성 노예(性 奴隸)화 한 것은 충격적이다. 착취(搾取)는 낱말이 뜻하는 것 이상의 사악(邪惡)함이 존재한다. 인간으로서 감추고 싶은 부분을 자신의 약점 때문에 드러내야 했다. 물론 거기서 멈춘 게 아니라 요구하는 강도가 세졌고 결국 영혼까지 털고 말았다는 점이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란 말이 있다. 사회지도층의 자세가 바로 그 사회의 바로미터가 된다. 어미게가 가라사대 “똑바로 걸어라.”라고 자식 교육을 시키지만 그 자식은 똑바로 걷는 게 옆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대중들은 그를 중형에 처해도 일벌백계(一罰百戒)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 없고 백 없어서 형량이 높은 거라고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힘 있는 사람도 법 앞에서 예외가 없어야 한다. 미국의 부동산 재벌이 어린 아이를 성추행해서 무기징역을 받은 예가 있다. 법은 동일한 행위에 대하여 똑같은 시그널을 보내야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그런 행위를 멈추게 된다.
조 주빈이 검찰로 송치되기 전, 기자들에게 “악마의 짓을 멈추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악한 짓을 멈출 수 없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악마와 비교될만했다는 점은 시인했다. 우리 사회엔 돈을 지불하고 욕망을 불태운 자들은 존재했어도 사이버 범죄를 감시할 안전망은 없었다. 어제 n번방 가입자가 유서를 남기고 한강에 투신했다. 자신의 가면이 벗겨질 때 주위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따가운 눈총을 생각하니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방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불안, 초조함으로 밤잠을 못 잘 것이다. 욕망은 사람의 피를 말린다. “죽을까? 말까?” 이 생각 저 생각에 온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그대들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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