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봄 남프랑스 아를을 여행하기 전 고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그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한 예술가의 고독함이 이토록 처절할 수 있는가?"라는 충격과 함께 그에 대한 연민이 싹텄었다. 특히 아를에서 작품 활동을 할 때 고흐는 배고픔과 고독 그리고 병마와 싸워야 했다.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폴 고갱과 함께 생활하면서 잠시잠깐 생기를 되찾는 듯하기도 했다. 고흐는 폴을 예술가로서 추앙하며 그 또한 화가로 인정받으려 애썼지만 격차(隔差)에 대한 비애감을 느껴야 했다.
폴 고갱의 그림은 찾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은 외면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폴 고갱은 자기 스스로 명망을 얻은 화가라고 생각했던 반면 고흐에 대해서는 자기 화풍을 완성하지 못한 연습생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흐의 그림을 대할 때마다 그림을 너무 성급하게 그리려 하고 붓질이 거칠다며 천천히 섬세하게 터치하라는 충고를 하곤 했다. 따라서 시대를 앞서갔던 고흐의 작품을 미완의 작품으로 여겼고 그림 공부를 더 해야한다고 말하며 자신처럼 프로 화가는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짝사랑하던 고흐를 남겨두고 아를을 떠났다.
고흐는 화방을 운영하는 외가와 목사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한때 친척이 운영하는 화방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는 노동자 생활을 했다. 아마 그가 평생 살면서 돈 걱정 없이 살던 때가 아닐까 싶다. 그 후 그는 아버지를 이어 목사가 되기 위해 전도사로 활동했는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건초더미 속에서 잠을 자며 공동생활하는 것을 보고 마을 주민들이 성직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성품(性品)을 문제 삼자 이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한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 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며 방황하다 뒤늦게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고흐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보다 꾸지람을 자주 들어 아버지 앞에 가면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훗날 정신병을 앓게 된 연원(淵源)엔 아버지의 질시(疾視)가 한 몫 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흐가 그림을 그릴 때 절대적인 후원자는 동생 테오였다. 테오는 파리에서 화방을 운영했다. 화가의 그림을 팔아주기도 했고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화구를 팔았다. 둘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애를 나눴다. 특히 남프랑스 아를에서 생활할 때 고흐에게 큰 힘이 돼 주었다. 고흐는 가난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그린 그림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어 팔리지 않았다. 밀레의 이삭줍기, 만종 등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사실화(寫實畵)가 대중의 인기를 끌던 때라서 추상화(抽象化)는 주목받지 못했다.
유일하게 그의 그림을 인정해주던 사람은 동생 테오였다. 또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생활비를 보내주는 유일한 후원자 이기도 하다. 비록 하숙비와 화구를 사고 나면 이틀에 한 두 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빠듯한 돈을 보내주지만 그마저 끊기면 버텨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늘 배고픔과 싸워야 했고 동생 테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았다. 굶주림과 그가 그린 그림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 앞에서 좌절할 때마다 정신적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불면의 밤을 보내다 보면 헛것을 보게 되고 내면에서 차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 괴성을 지르며 온 마을을 휘젓고 다닐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불편한 시선을 갖고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는 기피(忌避)의 대상이 됐다. 마을에 거지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따라가며 돌팔매질을 하고 놀려대는 것처럼 동네 아이들로부터 거지들이 겪음직한 수모를 당했다. 그는 정신이상에 대한 자각증상을 느끼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정신병원에서 건강 상태를 조사하는 가톨릭 사제(司祭)에게 비교적 또렷한 의식 상태를 보이는 것을 볼 때 그는 미친 것이라기 보다 굶길 밥 먹듯 해서 생긴 의식 상실이며, 가끔씩 괴성을 지르며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중들로부터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유년기 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며 짓눌렸던 감정이 일시에 분출한 것으로 보인다. 고흐는 비록 끼니를 굶어도 붓을 놓는 일은 없었다. 빵 대신 화구를 먼저 챙긴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삶 그 자체였다. 다 떨어진 구두에서 가난과 힘겹게 싸워야 했을 화가의 고단했을 삶을 상상할 뿐이다.
고흐는 아를의 노란 집에서 작품 활동을 함께했던 고갱이 "유명한 화가는 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해야 한다."며 파리로 떠날무렵 '메니에르병'으로 알려진 중이염을 앓았다. 이 병의 증상 중 하나가 환청과 이명인데 귀에서 벨소리가 나 미칠지경이라고 한다. 이런 고통을 견디지 못한 환자들 중 스스로 귀를 자르는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데 고흐도 고갱과 이별할 무렵 귀를 자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명을 견디지 못해 한 행동일 수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자신의 귀를 잘라 술집 여자에게 주면서 고갱에게 전해주라는 말을 했던 걸 보면 고갱과 작별에 대한 충격 또한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아를로 돌아온 그를 마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동생 테오는 파리로 불러 격려했고 함께 살자고 권했지만 동생은 이미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폐를 끼치는 것이 싫었고 그동안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한 삶의 안식처는 아를이라고 생각했던지 파리를 떠나 아를로 되돌아왔다.
남프랑스 아를의 따듯한 햇볕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고흐는 37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그의 죽음에 대해서 자살과 타살을 두고 말이 많다. 그림을 그리던 중 동네 아이들이 쏜 총에 복부를 맞고 쓰러졌다는 설과 자신의 병을 치료해주던 가셰 박사 딸에게 모델이 돼줄 것을 부탁하지만 사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알게 된 가셰 박사가 접근을 불허하자 비관하고 자살했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두고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 동생 테오만 찾았고 그의 손을 붙잡고 죽음을 맞았다.
고흐에게 죽음은 절망보다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받아쓰면서 늘 마음 한편에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동생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굶길 밥 먹듯 하는 가난한 예술가의 옷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채 시대를 앞선 그림을 그리면서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걷느라 지쳐버린 자기 자신을 놓아줄 수 있어 행복했을 것이다. 그 시대 화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고독한 화가 고흐는 그가 예단했듯 21세기의 별이 됐다.
아를의 따듯한 햇볕은 고흐의 영혼을 다시 깨우고 있다. 해바라기에서 고흐의 미소가 배어 나온다. 나는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아를의 론강을 하염없이 바라봤을 고흐를 떠올린다. 또 배고픔과 싸우며, 한편으론 삶의 무게로 짓눌린 상태에서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불후의 명작을 그렸을 고흐를 상상한다.
세밑에 시내 큐브 극장에서 "고흐, 영원의 문에"라는 영화를 보았다. 흔히 "예술가는 창작이라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 고독한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고 말한 존 스트워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이 연상된다. 과연 우리는 질병과 배고픔을 견디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을 고흐의 고통을 만분의 일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당대엔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조차 그를 냉대했지만 고흐는 오늘날 남프랑스 아를 지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들은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발자취를 찾는 관광객 덕에 생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난뱅이 고흐가 미치광이로 내몰리며 그가 그림을 그리던 곳까지 쫓아와 돌팔매질을 했던 과거의 아를 사람들과 데자뷔(deia vu) 된다. 그에 대한 대중의 사랑과 관심이 식지 않고 있는 이면엔 그의 죽음과 귀를 잘라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이 식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지금도 아를의 햇볕 속엔 고흐의 온기가 맴돌고 있다. 해바라기 밭과 언덕 위 밀밭에 까마귀가 나(飛)는 모습에 고흐의 영혼(靈魂)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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