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 이야기

함께 걸어온 30년, 함께 걸어 갈 30년

해암 송구호 2019. 12. 2. 10:57



 결혼 후 아내와 살을 부비며 산 세월이 30년이다. 불과 2개월만에 부부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피를 나눠야 가족이요, 형제인줄 알았는데 부부는 족보와 관계 없는 사람들끼리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자식들에게 새옷 한 벌 제대로 사입히지 못했고, 먹고 싶은 것 풍성히 먹이지 못하면서 10평 남짓 한 셋방에서 8년을 살아야 했다. 신혼 초 아내가 근무하던 직장 가까이에 반지하 방을 얻어 살 때 여름 장마로 침수가 됐다. 담이 없어 윗집에 빗물이 우리가 살았던 방으로 밀려들어 왔고 새벽에 잠자던 중 날벼락을 맞고 황망한 중에 눈을 떠보니 요가 방에 둥둥 떠서 마치 쪽배를 타고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문제들을 만나 해결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희비쌍곡선이 갈리게 되고 웃고 울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침수 사건으로 결혼 때 마련한 가구들이 물에 젖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서둘러 서울 처가댁 근처로 이사했다. 10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8년 가까이 살면서 두 아이를 낳아 길렀는데 새장같이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느라 스트레스가 컸다. 지금도 그곳에서 살 때를 떠올리면 여름에 아내와 통로 벽에 기대어 부채로 더위를 견디던 것이 마치 감옥살이를 한 것같은 기분이 든다. 아이들을 돌봐주던 아주머니 댁은 옥상도 있고 넓었다. 아이들이 거기서 놀다 집에 오면 짜증을 내고 우는데 아마도 공간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힘든 시간이 닥쳐와도 그 순간이 아프고 힘들 뿐 견디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통증은 사라진다. 내가 살면서 겪었던 고통도 아마 그런 과정을 겪으며 순화돼 왔을 것이다.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아찔했던 것 중 하나가 군복무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GP 수색소대 근무 중 야간 매복을 들어갈 때 분대원 8명이 계획 지뢰밭 사이로 들어갔다 새벽녘에 철수하는 것이 통례인데 나오면서 보니 우리가 계획 지뢰밭 안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또 여름휴가를 5년 동안 삼척으로 간 적이 있다. 휴가 마지막 날 뒤늦게 상경하는데 도로가 꽉 막혀 미동조차 하지 않으면서 자정을 넘기게 됐고 다음날 출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졸음운전을 하며 수차례 사선을 넘나든 적이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여름휴가를 제주도로 갔었다. 때로 살다보면 죽음이란 경계선을 오갈 때도 있다.     

 결혼 전 내겐 가진 것은 없어도 살아가면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있었던 것 같다. 아내는 그런 내가 좋았다는 말을 지금도 가끔 한다. 부부가 되어 30년을 살면서 꼭 지키려했던 것 중 하나는 아내를 속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부부는 신뢰(信賴)가 깨지면 사사건건(事事件件) 의심하게 되고 감정이 부딪치면서 상대방에 대한 증오감(憎惡感)과 함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시각(視角)으로 매사를 바라보게 되어 결국 파경을 맞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화학 선생님은 화학 기호 대신 인생관을 심어줘서 지금도 그 가르침이 기억에 남는다. "아내를 여왕처럼 대접하면 내가 왕의 대접을 받을 것이요. 아내를 친구처럼 대하면 나도 친구 대접을 받게 되고 아내를 하녀처럼 대하면 나도 머슴이 된다"라는 말이다. 비록 아내에게 여왕처럼은 아니어도 최소한 각자의 삶을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으며 살려고 노력했다. 부부 관계(關係)는 깨끗하게 닦여진 유리거울처럼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깨어진 거울은 아무리 노력해도 내 모습이 일그러진 상태로 비춰진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하지만 서로 30년을 다른 환경과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신혼 초엔 머리는 두 개이고 몸은 하나인 기형적인 괴물이 탄생하게 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처럼 같은 공간에 있어도, 똑같은 공기를 마셔도 생각은 제각각인 것이 신혼부부다. 각자의 생각대로 움직이다보면 이 괴물은 단 한 발자국도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둘이 한 몸처럼 움직이려면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고 같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화는 두 사람의 생각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대화 중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상황이 발생할 때 감정을 삭이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의 찌꺼기들이 끓어오르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진 말이 상대에게 더 임팩트(impact)있게 각인 된다. 

신뢰는 상대에 대한 배려(配慮)에서 시작된다. 가식은 짧은 시간 동안은 빛을 발할 수 있어도 오래가지 않는다. 사람의 뇌신경은 상대방의 손짓, 발짓, 목소리, 언어의 표현, 얼굴표정 등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으고, 모아 분석과정을 거친 후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읽어낸다. 따라서 거짓 정보가 하나라도 드러나면 의심(疑心)의 눈초리를 보이게 되고 과거로부터 상대방의 행동들을 추론하며, 또 다른 오류를 떠올리게 되는데 합리적 의심이 강화될수록 상대방의 정보를 부정적 시각에 놓고 재단(裁斷)하게 된다. 그 단계에 도달하면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고 상대의 기를 꺾으려는 힘이 작용하는데 이것을 혹자는 부부싸움이라고 착각하지만, 감정의 골은 깊어지고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에둘러 성격차(性格差)라며 가정법원으로 향하게 된다.

 부부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할 때 싫어서 한 사람은 한 쌍도 없다. 그러나 살다보면 절반은 이혼을 한다. 가정의 중심축인 가장의 권위가 무너질 때 위기가 찾아온다. 부부가 살다보면 자녀를 낳게 되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기에 대해 사랑을 쏟다보면 서로 소홀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자녀가 금지옥엽일지라도 부부 사이에서 생겨난 사랑의 결과물일 뿐이다. 따라서 아기보다 부부가 첫 번째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유명한 연예인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잘나가는 외과 의사로 방송에도 자주 출연한 스타 닥터다. 이 집안은 3형제가 의사라서 대중들에겐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녀는 자녀를 잘 키워보겠다는 생각만으로 남편과 떨어져 외국에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7년을 보낸 뒤 국내에 들어왔고 그 뒤 남편이 해외에서 아이들과 7년을 더 살았다. 도합 14년을 떨어져 지내면서 이 부부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식어있는 걸 깨닫고 이혼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다. 감정이 식으면 부부는 남이 되는 것이다.

 가정을 똑바로 세우는데 필요한 자재는 인내(忍耐)다. 결혼하기 전 두 사람은 서로의 패를 보여주면서 짝인가 아닌가를 가리는 작업을 한다. 상대를 속이고 한 결혼 생활은 거짓이 드러나지 않도록 위선이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한다. 예전엔 학벌을 속이고 결혼하거나 장애(障碍)를 속인 채 중매로 만나 불행한 삶을 살았던 부부가 종종 있었다. 부모가 중매쟁이를 앞세워 하는 결혼의 경우 그 집안의 평판과 경제적인 규모를 우선 따져서 양가가 서로 엇비슷하면 혼사를 성사시키다 보니 혼인 후 몇 달을 넘기지 못해 과부가 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청상과부(靑孀寡婦)라고 해서 재가(再嫁)도 쉽지 않아 평생을 외롭게 살아야 했다. 

 요즘은 대부분 남,여가 자유연애(自由戀愛)를 한다. 결혼 전엔 두 눈을 부릅뜨고 본 뒤, 결혼 후엔 한쪽 눈을 지그시 감으라는 옛말이 있다. 부부는 서로의 허물을 들춰내면서 사는 경우처럼 불행한 경우는 없다. 모자란 것을 보완해주고 흉허물은 덮어가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남이 만나서 가족이 되는 것은 부부가 유일하다. 물론 입양을 통해 가족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부부는 혼인서약 때 한 약속처럼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평생을 함께 걸어가야 할 지기(知己)다.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까지 함께 할 길동무가 바로 부부다. 둘은 살면서 온갖 풍파를 겪어야 하고 견뎌야 하는데 누군가는 길잡이가 돼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그를 응원하고 믿어주고 격려해주는 지지자가 돼야 한다. 이 때 대부분 남자가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고 여자는 믿고 따라주는 길동무가 된다. 그 때 필요한 것은 참고 견뎌내는 인내다. 가는 길이 멀고 험해도 서로에게 길동무가 돼 줄 수 있는 게 참된 부부다.

 공자의 생가에 가면 '계탐도'라는 그림이 한쪽 벽면에 그려져 있다. 해를 삼키려는 모습을 한 상상의 동물로 끝이 없는 탐욕을 경계하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공자는 평생 이 그림을 두고 보면서 탐욕을 경계(警戒)했다고 한다. 거기서 유래된 말이 "견리사의(見利思義) "라는 말이다. 눈앞에 이익(利益)을 두고 의를 생각한다는 말로 공자는 이(利)를 쫒는 자를 소인이라고 했고 의(義)를 쫒는 자를 대인이라고 했다.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 중 하나는 내외풍을 막는 든든한 벽이 돼는 것이다. 가장의 리더십은 위기 때 진가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위기극복 능력은 지도력을 믿고 따르는 무리가 생겨나게 된다. 크기가 크면 클수록 지도력도 단단해지는 것이다. 그 바탕엔 신뢰(信賴)가 있다. 

 가장은 통찰력(洞察力)을 지녀야 한다. 어떤 가정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발바닥에 낀 때보다 못하게 대한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돈이 모아질 만하면 다 날려버리게 되니 그런 가장이 무능해 보이고 형편없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 그러니 그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쒀도 안 믿게 되는 것이다. 통찰력(洞察力)은 신으로부터 부여받기도 하지만 부단한 노력과 예민한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읽어내는 촉이 있으면 가능하다. 딸에게 훈육했던 말 중 " 신문의 앞면을 읽으면 이류(二流)로 살 수 있지만 그 이면을 볼 줄 알게 되면 일류(一流)가 된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이 있다. 소리는 동쪽에서 내고 서쪽을 공격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다. 특히 신문은 '대중 선동매체'로 대중을 계도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그 이면엔 이득을 보려는 자들의 속내가 감춰져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의도를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뉴스 기사 이면에 숨어 있는 수혜자가 누구인가를 간파(看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안목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꾸준한 독서로 그 분야에 전문지식을 쌓아가는 것이다. 통찰력은 하늘이 내려준 촉과 자기가 쌓은 지식이 합쳐질 때 진실의 과녁을 관통할 수 있다. 나는 헤겔의 글을 곱씹고, 곱씹는 게 있다. "세상은 일련의 우연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필연적 존재가 있다."라는 말이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칠 뿐 모든 것이 그 나름의 이유가 있고 거기에 합당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거나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의미 없는 존재로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은 교만(驕慢)하지 말아야 한다. 교만은 곧 하느님을 욕보이는 것이기에 더욱 경계해야한다. 살다보면 남들과 비교하고 나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것에 만족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보석을 몸에 치장하고 명품 백, 명품 옷을 걸치고 나아가 이목(耳目)을 끄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평생을 살면서 기념일 때 아내의 손가락과 목에 변변한 보석 하나 사서 끼워주고 걸어 준 적이 없다. 아내가 보석 타령을 할 때마다 "나보다 더 귀한 보물이 어디 있어?" 라고 농(弄)하며 넘기곤 했지만 내가 경계하는 것 중 하나는 이 물건이 공작의 꼬리가 되어 허영이란 굴레에 갖히면 안 된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 30년을 살며 변변한 예물 하나 없이 사는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늘 있다. 

 사람은 마음이 편해야 두 다리를 뻗고 잠잘 수 있다. 옛말에 "때린 놈은 쪼그리고 자고 맞은 놈은 두 다리 쭉 뻗고 잔다."라는 말이 있다. 살면서 이해관계가 있을 때, 나는 내가 밑져야 남는 장사라고 늘 생각하며 살았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을 보며 놀라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마음 한편이 켕기고 불편했다.

 교활(狡猾)한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지나친 호의를 베풀거나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면서 상대의 경계가 풀어진 틈을 파고들어 간(肝)을 빼가는 수법을 쓰니 대부분 감쪽같이 속는 경우가 생긴다.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믿었던 친구에게 빚보증을 잘못 서 친구와 재산을 동시에 날린 경우를 종종 본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재산의 경계가 분명해야 한다. 

 부자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 들어오는 돈 길은 크게 하고 나가는 돈 길은 닫거나 좁게 해서 내 손에 움켜쥐는 것이다. 현대건설 창업자 정주영씨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부자가 되려면 손에 들어온 돈을 끝까지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돈을 아껴 써야 모을 수 있고, 모아진 돈이 쌓여야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보통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쓰고 싶어 안달이 난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야 된다는 생각으로 돈쓸 궁리를 한다. 그렇다고 돈을 안 쓰는 게 능사는 아니다. 마음에 빚진 자로 사는 것은 살면서 득보다 실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關係)가 나빠질 수 있고 심한 경우 무리에서 왕따를 당할 수 있다.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경우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무리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모름지기 남자는 줏대가 있어야 한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 더욱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이 선명해야 한다. 물리에서 배운 벡터와 상응(相應)하는 개념이다. 스칼라처럼 방향성이 없으면 무주공산(無主空山)에 표류하기 쉽다. 항상 목표를 세워 자기가 향할 목적지를 지향하는 것이 중요하다. 염원(念願)을 담은 기도(祈禱)는 자기 암시와 함께 흐트러질 수 있는 정신을 일깨우는 채찍이 될 수 있다. 물론 간절함은 내면의 자아를 일깨워 하늘의 마음을 얻는 요체가 된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할 일을 다 한 후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강태공은 낚시를 하며 세월을 낚았다. 그의 낚싯바늘은 굽은 게 아니라 곧게 펴져 있었다. 물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세월을 낚았기 때문이다. 기다림이란 지루함을 동반하기도 한다. 혹자(或者)는 좀이 쑤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어야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열매도 맺히게 되는 것이다. 곰들은 동면 전 연어가 산란을 위해 회귀하는 때를 길목을 잡고 기다린다. 황새도 여울목에서 물살을 가르며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도약(跳躍/ elan vital)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한 곳을 들여다보며 튀어 오르는 순간을 기다린다. 프랑스어로 엘랑비탈이란 말 속엔 심장을 설레게 하는 생명력이 담겨져 있다. 기다림이란 때로 멀게 느껴지고, 지루하지만 그 속엔 엘랑비탈이란 신세계가 숨겨져 있다. 인내는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모든 유, 무형의 일들을 하나의 결정(結晶)으로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는데 그 과정(過程)이 사랑이라면 결실(結實)은 행복(幸福)이다. 

 우리는 힘이 넘치는 청년기 30년을 함께해 온 부부다. 남들처럼 피터지게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다. 그 이면엔 아내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일푼으로 시작하다 보니 열 평 남짓한 비좁은 집에서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감옥살이 같은 생활을 감내해야 했고 또 직장을 핑계삼아 술을 마시고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마다 아내는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않고 나의 귀가를 기다려 줬을 뿐만 아니라 내게 일언반구(一言半句) 불평이나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아내가 해외여행 중 부동산 계약을 하게 됐지만 가타부타 말없이 내 결정을 따랐다. 사사건건(事事件件)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며 따지고 간섭(干涉)했다면 아마 우리는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내가 괴물로 변해 지금과 다른 내가 돼 있을지 모른다. 힘든 상황을 참고 견뎌준 아내의 기다림은 현재 내가 나 되게 한 요체(要諦)다.

 몇 년 전 아내가 직장을 나온 후 우리는 삼식이로 살고 있다. 아내보다 십여 년 일찍 명퇴한 내가 아내의 아침밥을 챙겨주게 되면서 요리 계에 진출한 후 지금은 식사를 둘이 번갈아 하고 가끔 꾀가 나면 외식도 한다. 물론 일 년에 한 두 차례 해외여행을 하면서 신세계를 경험하는 것도 살면서 누리는 낙이다. 또 그동안 아내가 나를 기다려 준 보은(報恩)을 하며 아내의 동반자(同伴者)로 살고자 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상실의 시간을 감내하며 견뎌내는 것이다. 균형감각은 점점 우둔해질 것이고 기억의 오류로 주변사람들과 어색해지거나 시력이 점점 퇴화되면서 또렷하게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 또 면역력이 약화되어 악성 질환에 시달릴 수 있고 배설 기능의 약화로 불편함을 느끼거나 실수를 할 수 있다. 또 죽음이란 어둠의 시간을 느끼며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누구나 사는 동안 건강하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깨끗한 상태로 살다가 죽음을 맞고 싶어한다. 세상에 빚진 자(業)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짊어져야 할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심판(審判)의 형구(刑具)를 쓰고 나머지 생을 사는 것이 노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