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과거제도를 통해 중앙관료로 진출해야 양반가문으로서 행세를 할 수 있었다. 3대가 과거급제에 실패를 하면 무늬만 양반인 잔반(殘班)으로 전락하게 되어 평민과 처지가 비슷해지게 되니 가문이 쇠락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따라서 명문가로서 솟을대문을 세우고 지역의 유지로서 행세를 하기 위해 과거 급제를 위한 피나는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고위 관료가 된 집안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파벌이 형성돼 일족들이 대소사에 모여들게 마련이다. 또 역모를 꾀하거나 흉사(凶事)에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면 멸족을 면치 못하게 되니, 일족으로 산다는 것은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세도가문엔 손가락 마디를 넘는 먼 친척도 제사 때마다 얼굴을 내비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생존(生存)을 위한 처세술 이었다.
웬만한 양반도 눈치를 봐야할 만큼 세도가 집 머슴은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상민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주인의 혀처럼 굴었고, 손, 발 노릇을 하며 사는 종들은 그들이 맡은 직분에 따라 위세도 달랐다. 때론 집행관으로 완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윗전의 말씀을 전하는 배달부의 역할도 감당했다. 과거에도 경제는 가진 자를 축으로 돌아갔다. 흉년이나 전염병으로 한해 농사를 망치면 목숨부지를 위해 지주에게 땅을 담보하거나 자식을 담보해서 목숨을 연명하는데 다음해로 이어지는 경우 맡겼던 땅과 자식을 되찾지 못하고 소작농이 되거나 노비 또는 솔거노비로 전락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양반들은 과거에 급제해서 당당하게 출세 가도를 달리기도 하지만 세도가의 문객으로 문간방에 머물면서 입신을 꿈꾸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낙하산 인사쯤 될까? 세도가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낙점되면, 관직에 출사(出仕)하게 되는데, 이들은 세도가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니, 요즘 국회의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당파싸움은 사화를 일으켜 문신들의 죽음을 불러왔고, 정쟁으로 국력을 소진했다. 탕평책을 펴 국정을 안정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당리당략으로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다.
종가집하면 떠오르는 것이 제사다. 이 때가 되면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가족 친지들이 한곳으로 모여든다. 서로가 핏줄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조상을 섬기는 것을 효의 근본으로 여기던 시대라 제사의 절차도 한치에 어긋남이 없어야 했다. 양반은 4대, 평민은 2대 봉사를 법으로 규정했는데 이것은 양반 위세(位勢를)를 평민이 따라할 수 없도록 못박아 놓은 것이다. 돈이 많아도 혈족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니 사회의 주류로 자리매김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제사 모임은 운명 공동체 의식이다. 그 중심에 종부가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종부에겐 머리를 조아렸다. 항렬이란 것이 나이를 뛰어넘는 가족 결집과 힘을 모으는 역할을 한 것이다.
가문의 몰락 여부를 판단할 단초는 위계질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가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집안에서도 가난으로 아버지가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책임지지 못하면서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고 큰형마저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게 되니 서열 중심의 위계는 붕괴되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가난이 준 가족 분화다. 따라서 서로 돕고 뭉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똥바가지를 뒤집어 쓰지 않을까 회피하기 급급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제사는 설, 추석 언저리에 닿아있다. 누이들은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발을 끊은지 오래됐고 둘째 형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자녀들이 역시 발길을 끊고 살아왔다. 제사는 따지고 보면 고인의 삶을 기억하고 남아있는 자 간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선 기독교 의식은 제사의 본질인 예의와 격식(格式)을 갖추지 않아 경건함이 없고, 고인이 남겨놓은 무형의 유산을 끄집어 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큰형이 목사가 된 이래로 하나님 말씀으로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소중한 시간을 낸 것에 비해 부모님을 추억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나눌 수 없던 것은 memorial day라고 해서 기일에 가도 커다란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혈족이 만나는 것은 서로가 남이 아님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자리다. 종부가 가난하니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종부는 벽돌과 벽돌을 고정하는 시멘트가 돼야 혈육이 서로 뭉치고 큰 힘을 발휘하는데 소명의식도 없고 능력도 안 되니 제사 때 찾는 사람이 줄고 설령 참석해도 어정쩡하게 있다 돌아가곤 한 것이다.
가난이 죄는 아니다. 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은 많다. 가족간 유대감이 얇아지고 결혼도 늦어진다. 둘째 형은 시골교회 목사였던 앞집 큰아들의 중매로 늦은 나이에 지금의 형수를 만났다. 결혼식을 치룬 형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아마 박색의 신부가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마음에 품고 있던 정인이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그 후, 형님의 얼굴엔 웃음기가 사라졌다. 평생을 화 난 표정을 짓다 돌아간 것 같다.
둘째 형수는 근검절약의 달인이었다. 당신의 말에 따르면 소금 반찬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할만큼 절약이 몸에 배인 분이다. 유년 시절 형님 댁에 가면 시골에서 구경할 수 없는 반찬들로 상을차려내니 늘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는 줄 알았다. 시골에서는 제사 때가 아니면 이밥에 고깃국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서울은 내가 살아야 할 곳으로 동경하게 된 것도, 도시문명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막연함이 자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형님댁에서 더부살이를 할 때, 형님은 거의 나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을 때 레이저를 쏘듯 날 째려볼 때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나를 곧추세울 수 있었을 텐데, 째려보기만 하니 두렵기만 했다. 무슨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었겠지만 난 알 수 없었다. 다만 가끔씩 형수가 과거 가족 모임 때 나의 사촌이 동전통을 가져갔다는 말을 여러차레 하곤 했는데 아마 내게 집안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경고였던 것 같다. 아니면 집안에 물건을 가져다 팔아 술이라도 사먹는 줄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따로 용돈을 받아 쓴 적도 없지만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속으로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독서실에서 청소를 해주고 하루에 약간의 용돈을 받아서 썼다.
신은 인간에게 삶의 과정을 통해 시련을 주고, 시련을 극복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며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분명한 것은 나를 시험하기도 하지만 나를 시험의 대상으로 삼아 누군가를 시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정언명령(定言命令)은 신의 마음을 담은 인간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형님과 우애를 나누지 못했지만 내가 대학에 합격한 사실을 말씀드리자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신이 등록금을 마련해 주겠다고 선뜻 말씀하셨지만 이미 등록을 마쳤다고 말씀드리자 아쉬워했다. 그 무렵 형님은 암이 재발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몇 개월 후 둘째 형님의 임종을 지킨 나는 몸을 깨끗한 꺼즈로 씻겨 드린 후 새 옷을 입혀 드렸다.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왜소했다. 한 때 운동을 해서 기골이 장대했었는데 병마앞에 초라한 모습만 남아 있었다.
몇 년 전, 명절 인사차 둘째 형님댁에 들렀다 들은 말은 귀를 의심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거지 새끼들 뭐 먹을 게 있다고 또 왔어?" 그런 말을 한 조카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도 아니고, 지능이 특별히 낮은 아이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사십 중반의 노처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평소 이 집에서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능력을 온전히 드러낸다. 내 삶은 참 보잘 것 없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과정, 위험한 상황이나 불가능한 일들이 닥칠 때마다 극선(極善)을 이루게 해서 최고의 감동을 내게 주시니 늘 감사한 마음이 넘쳐난다. 복(福)도 밥을 짓듯이 자신이 선한 삶을 살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욕심으로 자신의 재물을 잃고, 어떤 이는 남의 것을 탐하여 죄를 짓는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도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큰 죄다. 신은 겉으로 드러낸 것보다 심중의 본질을 꿰뚫고 계시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둘째 형수가 형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한을 나를 통해 풀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내가 무언의 질시(疾視)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자신이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인생에 작은 위로가 됐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회사를 나와 지금 살고 있는 상가주택을 샀을 때 가까운 친척을 초청해 집들이를 한 적이 있는데 다른 일을 핑계로 조카를 보냈었다. 나를 향해 해왔던 부정적 언어들이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는지. 빈손으로 시작한 내가 지금의 나로 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신이 주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신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인간에게 당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린 나그네에 불과하다.
뭐든지 유난 떨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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