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처가집 식구들과 함께 장모님이 계시는 요양원에 갔다. 매달 한 번씩 장모님을 뵈러 가는 것이 일과처럼 된 것도 삼 년이 되었다. 일 년 전까지는 함께 외식도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서 외출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요즘 면회를 가면 피곤하다면서 바로 돌아가시는 편인데 자녀들이 다 모여서인지 자리로 돌아가시겠다는 말 대신, 당신의 자녀들 머리 수를 헤아리느라 분주하다. 장모님은 몸에 근육이 다 빠져서 뼈만 앙상하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로 살과 근육이 다 빠진 상태다. 치매(癡呆)를 앓기 시작할 무렵부터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는데 요양원에 온 후로는 가족 면회 때 말고는 일절 움직이지 않고 누워서 생활하시니 더욱 빠르게 근육이 줄어들었다. 요양원은 재활치료 기관이 아니라서 따로 운동을 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자가 활동 능력을 상실한 장모님에겐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몽골의 유목민은 부모가 늙어서 거동을 할 수 없게 되면 천막에 남겨두고 떠난다. 에스키모인들은 늙고 이빨이 빠져 고기를 씹을 수 없게 되면 스스로 짐승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최후를 맞았다. 로마시대 때는 자신이 늙고 병들어 정상적으로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곡기를 끊고 최후를 맞았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運命)이다. 농사를 본으로 삼았던 과거 대가족 시대엔 생노병사가 한 가정 안에서 이뤄졌다. 유교 사상은 효를 강조하고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자를 높이 모시기 때문에 제사 때 상차림에서 시간까지 원칙을 정해 지켰다. 물론 살아 있는 사람에겐 더욱 극진함을 보였다. 그게 조선시대 유교 사상과 맥을 같이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장(高麗葬)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노부모를 봉양할 형편이 안되면 산에 내다 버렸다. 부모를 지게에 짊어지고 먼 산에 놓고 돌아올 때, 따라갔던 아들이 지게를 챙겨 내려오는 것을 보고 다시 부모를 집으로 모셔왔다는 이야기는 궁극적(窮極的)으로 말해 다음 고려장의 대상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불편한 현실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노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불과 20년 후면 자신의 처지가 똑같아진다는 것이다.
장모님은 자식의 숫자를 세는 것 외에 따로 묻는 말이 있다. "뭐 타고 왔어?" 우리에게도 어떻게 왔는냐고 묻긴했어도, 단 한 번도 속내를 보이신 적이 없지만 처남과 함께 갈 때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나 언제 집으로 모시고 갈꺼야!"라고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처남은 "다음주에요"라고 대답하는데, 장모님은 아들이 그런 대답을 할때 하시는 말씀이 "거짓말 하지마"라고 말씀하시는데 아들의 대답이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또 지켜지지 않는 약속을 하고, 작별을 나누며 침실로 향하는 장모님의 얼굴엔 고독(孤獨)감이 깊게 베어있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병이 든 부모를 집에서 끝까지 모실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내가 병들고 수족이 불편해지면 똑같이 자녀들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따지고 보면 고려장에 쓰였던 지게는 우리집에도 걸려 있는 것이다. 머지 않아 우리도 그 지게를 타고 고려장을 당하게 될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궤적을 따라가는 것이다.
장모님은 치매를 앓기 전엔 아들과 함께 살려는 의지가 없었다. 아들이 미덥지 못했기 때문에 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아들에게 마지막 여생을 의탁하고 싶어하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집에 모실 생각이 없다. 늙어 간다는 것은 고독해지는 것이다. 고독을 즐길 생각이 없다면 건강해야 한다. 또 이웃과 즐거운 시간을 자주 갖고 가족과도 지속적인 유대관계(紐帶關係)를 쌓아야 한다.
'우리가족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 한 마디가 함의(含意)하는 것 (0) | 2019.03.09 |
---|---|
거지 새끼들 뭐 처먹을 게 있다고 (0) | 2019.01.13 |
장모님의 체중이 솜털보다 가볍다 (0) | 2017.12.26 |
변화를 싫어하는 치매 병 (0) | 2016.10.03 |
가족의 굴레 (0) | 2016.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