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족 이야기

말 한 마디가 함의(含意)하는 것

해암 송구호 2019. 3. 9. 08:23

 



요통(腰痛)의 발병 원인은 다양한 증상에 기인하지만 아주 소소한 원인에 의해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방귀를 뀌다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고 대변(大便)을 볼 때 힘을 주다가 요통이 왔다고 병원을 찾는 경우, 또 떨어진 연필을 줍던 중 요통을 호소하며 입원을 해서 대 수술을 받는 어처구니없을 법한 일들이 현실 속에서 종종 벌어진다. 환자 입장에서는 수각황망(手脚慌忙)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발병한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래전부터 이미 척추는 변형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지 통증을 느끼게 된 때가 인지 시점일 뿐이다. 

 흉허물 없이 지내던 친구도 어느 순간 변심을 하고 결별을 선언하는 경우가 있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황당하리만큼 돌발적인 절교에 놀라지만 이 친구의 내면엔 묘한 감정의 돌기들이 흔들렸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상대방의 말투가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 비웃는듯한 표정 등. 어느 한순간 나타난 상대방의 숨길 수 없던 태도가 그동안 쌓아왔던 우정을 뿌리째 흔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절교를 결심하기 전, 친구가 했던 말과 표정을 연상하면서 자신이 무심코 넘겼던 일 중, 일맥상통한 인과관계를 추적하고 상대의 행동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주저 없이 절교를 결심하게 된다.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가난하게 사는 것에 익숙한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다. 우리 어머니가 세상을 등질 때가 생각난다. 뭐가 답답했던지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앞산을 바라보시는데 마치 당신을 데려갈 저승 차사가 와 있는 것처럼 한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동네 이웃들이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한 것을 알고 삼삼오오 모여들자 보는 이에게 요구르트를 건네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이웃들의 애석해하는 마음이 눈에 삼삼하다. 병석에 누운 후 이틀 만에 어머니는 잠자는 듯 숨을 거두셨다. 생전에 어머니는 만나 뵐 때마다 늘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는데 정작 난 어머니가 내게 왜 미안해하시는지 모르겠다. 가난해서?

 흉허물 없이 지내던 친구나 가족이 아주 작은 것이 단초가 되어 그간 살아오는 과정에서 상대가 품고 있었던 속마음을 읽게 됐을 때 느끼는 감정선은 미묘하다.  

  서울에 올라와서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눈칫밥을 얻어먹었지만 누이네 집에서 밥을 얻어먹던 때가 마음이 제일 편안했던 것 같다. 매형이 부담 없이 대해준 것도 한몫했다. 그 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 때다. 아버지 기일 무렵 제사에 내려갈지를 묻자, 누이가 한마디 던진 말은 "너네 남자 형제끼리 잘 살아, 우리 신경 쓰지 말고." 그 말은 출가외인(出嫁外人)이란 말이 남아 있던 때라서 마치 친정과 연을 끊고 살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내가 기식했던 시간에 대한 시간이 큰 부담이 아니었을까를 반문했다. 그 후 누님 댁에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알이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무렵 바로 위의 형은 함께 살던 중 결혼을 했다. 형의 신혼살림이 시작 된 후 학교에서 가급적 늦게 돌아갔다. 혹시 형수가 부담스러워할까 싶어서다. 대학을 마칠 무렵 형은 결혼과 분가 이야기를 꺼냈다. 벌어 놓은 돈 한 푼 없이 결혼을 하라니! 그래도 결혼은 어찌어찌해서 하게 됐다. 신낭(腎囊)과 신랑이 같은 개념인지 몰라도 난 아내 덕에 결혼이 가능 할 수 있게 됐다.

 직장에서 명퇴 바람이 불 때 능력 없는 놈으로 낙인 찍혀 45세에 퇴출 당했다. 한동안 마음고생도 심했다. 밤이면 밤마다 회사일로 쫓기는 꿈을 꾸며 살았다. 온몸은 땀으로 흥건했고 잠자리를 드는 것이 귀신 보는 것보다 무서웠다. 내가 힘들고 지쳐있을 때 아내가 가정을 건사했다. 불행 중 천만다행히 아닐 수 없다. 노총각 될 사람을 구해줘서 고맙고, 우리 집안 대소사에 군말 하나 없이 다녀줘서 고맙고, 또 집 안 일을 두고 가타부타 일언반구(一言半句) 말을 안 해 고맙고 내가 실직을 했을 때도 그간 고생했으니 좀 쉬라는 말 뿐 돈 벌어오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아 고마웠다. 

 직장에 다닐 때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밥 해줘서 고마웠고 새벽까지 술 마시고 한, 두시에 귀가를 할 때도 먼저 잠자리에 들지 않고 날 기다려주니 미안하고 고마웠었다. 그런 아내가 있었기에 나의 과거가 슬퍼도 행복한 것인지 모른다. 지금도 말벗이 돼주는 아내는 고마운 사람이다. 

 몇 년 전이다. 바로 위의 형님 회갑 때 모처럼 가족이 1박2일로 횡성에서 모였던 적이 있다. 직장을 다니던 아내가 퇴근한 후 출발하다 보니 형제들보다 한발 늦게 도착했다. 먼저온 형제들은 야외에서 고기를 구어먹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모두 반갑게 맞이하는데 유독 둘째 형수만 먼 발취에서 봐도 오만상을 찌프린 채 날 째려보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그해 벽두에 둘째 형수 댁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조카 딸에게"거지새끼들 또 뭐 쳐먹을 게 있다고 왔어"란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었던 터라, 술 먹은 김에 내 속 안에 담아뒀던 말을 나도 모르게 쏟아내고 말았다. 내 안에 박혀있던 가시가 형제의 가슴에 박힌 꼴이 되고 말았다. 그날 밤  내가 쏱아낸 취중진담(醉中眞談)에 분해서였는지 아니면 들춰 낸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돼서 창피했던지 둘째 형수는 밤새 울었다. 

 당시 형수의 구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컸다. 내가 혹여 집안 물건에 손을 댈까 봐 수시로 과거 사촌이 돈통을 들고 갔던 일을 들먹거리고, 내 앞에서 형제들 흉보는 것을 서슴없이 하고 자기 형제들도 그닥 잘난 것  별로 없었는데도 친정 자랑을 일삼았다. 특히 이웃에 살던 자매들과 우리 집 뒷담화 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으니 더 뭐하랴!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그 대학 나와서 취직이나 하겠냐며 무시하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형이 죽고 난 뒤, 유품을 정리하면서 형님의 옷과 구두를 해외에 가 있던 내 바로 위 형에게 줄 거라며 내게 줄 건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군용 야전잠바 하나로 생활하던 나를 또 한 번 기죽이는 일이었다. 그랬다. 바로 위의 형은 우리 삼촌이라고 불렀고 나는 군식구 취급을 했으니까. 그것도 차별과 멸시 중 하나였다. 

 없는 사람에겐 치졸하고 철저히 무시하고 깔보던 사람이 바로 둘째 형수였다.  둘째 형이 살아있을 때 형에게 어떤 고자질을 해댔던지 밥상을 앞에 두고 형은 말없이 나를 째려보고, 옆에서 형수는 내가 두려워 떨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고소해했다. 아마도 돈도 없이 내가 술 먹고 담배를 피우는 것을 고자질한 듯 보이긴 하지만 따로 형님이 가타부타 말이 없었으니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놀라운 일은 조카들마저 삼촌을 업신여기고 막말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나무라지 않고 되레 부채질하고 있는 형수는 참 무서운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사람을 다시 보지 않는 길이다. 딸의 말도 참 한심하기 짝이 없었는데 형수라는 자는 "삼촌 우리 집에 오지마요."라고 말한다. 나도 응수를 했다. " 형수도 우리 집안 일에 오지마시오."라고 막말을 했다. 피차 안 보고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또 버젓이 가족 모임에 나타났다. 그럼 이제 거기에 내가 안 가야지. 내가 당하는 수모는 얼마든 견디겠지만 내 가족에게 하는 무시는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 아닌가? 비록 내 가족이었더라도. 내 바로 위의 형수도 아내를 부를 때 동서란 말을 놔두고 ㅇㅇ엄마로 호칭하는 것도 참 듣기 안 좋았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실에 꿰듯 맞추어지니 내 가족이 너무 우습게 보였는가 생각되는 것이 울화(鬱火)가 치밀어 오른다. 횡성에서 그분이 얼굴을 찡그리며 날 쳐다보지만 않았어도 판도라의 상자는 영원히 열리지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