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해암 송구호 2014. 5. 27. 15:04

 

31. 마르쿠스 아우렐 리우스 황제(서기161년 ~ 180년)

 

제 11권 종말의 시작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 외가 / 부자(도미티아 루킬라)

소년시절

- 귀족 : 6세 기사계급(최초)

            약혼 : 케이오 니우스 콤모두스(후계)

제왕교육

- 선생 : 알렉 산드로스(그리스인) / 호메로스 연구

            트로 시우스 아페르 (슬로 베니아 인) / 라틴어 교육 담당

            코르넬리우스 (북아프리카) / 토론기술

           

- 로마인의 철학

  판테온(Pantheon) : 만신전

                               로마시대 똑같은 형태 기둥과 들보 없이 너비와 높이가 43m이다.

 

로마제국의 안전보장 역사

 -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갈리아 전역 정복 라인강 방위선 결정, 갈리아인 수렵에서 농경 민족으로

                                 전환(西)

 - 아우구스 투스 : 갈리아인처럼 수 많은 부족으로 나뉜경우 말고 우두머리가 있을경우 타협이 가능

                           하다는 것 보여준 황제.

 - 파르티아와의 경계선 - 유프라 테스강(東)

 - 티베리우스 : 라인강과 더불어 제국의 북쪽 경계선을 이루는 도나우강을 방위선으로 확립, 헝거리

                       부다페스트는 티베리우스가 강 너머 야만족의 동태 감시 위해서 설치.

                       외치 비교되지 않게 내치를 다진 황제(北)

- 클라우 디우스 : 브리티니아가 로마 지배 불평 불만자들의 도피처가 되는 것 율리우스 카이사르 생각을

                          1C 후에 실현한 인물. 갈리아 주둔 군사력을 크게줄여 리옹에 1개 대대(1천명)배치

                          제국의 금화 은화 제조창.

- 도미티아 누스 : 알프스 산맥에서 발원하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방위선의 취약점(티베리우스가 간파)

                          게르마니아 방벽 설치 

슈바르츠 발트(검은 숲) : 로마 영토에 편입, 북쪽 방위선은 북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고 유기적인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북 방위선 : 야만족의 제어가 곤란하다.

- 트라 야누스 : 디키아족(루마니아) 데케발루스왕 속주로 삼아, 전쟁기록 ;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기록(지고

                    의 황제로 높이 추앙받음)

- 하드리아 누스 : 개선식 하지않음

                          방위선의 철벽화, 닫힌 국경이 아니라 열린국경(産物交易), 물산교류는 약탈욕구를 억제

                          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古代에는 십분의 일(1/10)이 일반적인 세율.

차기황제 마르쿠스

- 서기 138년 7월10일 : 하드리아 누스 사망

- 안토니 누스 피우스 치세 시작, 마르쿠스에 제안(17세) 자기 딸 파우스티나(8세)와 약혼.

- 아일 리우스 카이사르의 딸, 아들 둘다 파혼.

 

          안토니 누스 -------- 부인 ----← 친 남매간 → ---- 마르쿠스(아버지)

                                 ↑ ------------← 근친혼 →-----------↑ 

                      파우스티나(8세)                                  마루쿠스(17세)  

☞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혼과 재혼에 대한 비판에서 통치계급의 타락한 윤리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얄궂게도 그것이 근친혼을 방지한 셈이라 했다.

포도주 : 고대 로마에서 시작 마르쿠스가 VINUM이라 말하는 손님에게 권했다.포도주를 VINO라 한다.

 

§ 로마인의 하루 §  

 오전에 일 시작 오후에는 여가를 즐김(일 : 권력 높아질 수록 많아져)

 그리스인 : 로마에 통치받지만 문화면에서 한수 위라는 자부심 가져

 

안토니 누스 피우스 시대 특징

 1) 야만족과 전쟁없이 23년 흘러

 2) 로마 밖을 떠나지 않음

 3) 인사도 손대지 않고 유임시킴

    ▷ 전 황제 티베리우스 : 카프리 섬에서 원격 조정(통치기간 23년 일치)

                    하드리아 누스 : 1) 지식과 체험에 관한 사고, 이론(理論) + 체험 = 산지식

                                           2) 정보의 본질에 대한 사고 / 정보의 가공 - 전달자의 사고 개입

                                           3) 합리와 비 합리의 사고방식 /  합리 ; 안보체계 재 구축,                                                                                        비합리 ; 격려, 노고위로

    ▷ 제국에 묶어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

    ▷ 마르쿠스는 독립심보다 순종적인 타입, 황제의 뜻을 거역하지 않음

 

마르쿠스 아울레우스 난제

 1) 예측불허의 천재지변(饑饉과 弘水)

 2)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 23년간 문제의식 제기시 예측가능한 문제

 3) 차기황제로 지명 후 지방에서 체험 쌓았다는 다양한 전략전술 구사 가능

 4) 시대변화

 

파르티아 군대의 침공

- 동방의 전운 : 파르티아 볼로 가세스 3세 아르메니아 침공, 반 로마파 황제 앉혀

- 하드리아 누스 : 회상록(지은죄)

- 카이사르 : 갈리아 전쟁기(원로원 결의 거치지 않고 갈리아 처들어감)

                   내란기 - 루비콘 강 건너간 것 정당화

-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 명상록 (자신과의 대화록)

파르티아 침공 → 시리아 총독 코르넬리아 누스에 보고 →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에 명 1개군단으로 상대

→ 궤멸   → 반격 개시  → 시리아 총독 리보 병사 후임 율리우스 베루스 

 

전쟁 2기(파르티아)

장군 - 클라디우스 프론토(라인강 방위선 정예부대)

          소아시아(터키) 출신

          시리아 군단 군단장

아비 디우스 카시우스(시리아 출신)

서기 164년

황제 루키우스 - 소 아시아 서안 에페소르로 향(이오니아 진주)함

                        결혼) 루키우스 -- 루킬라(14세) / 마르쿠스의 딸

 

전쟁 3기(파르티아 내부 진격)

▷ 아비 디우스 카시우스 독무대 : 오리엔트 인에게 로마를 재 인식 시켜준 전쟁(30년 평화 보장)

    폐르시아 왕조의 출현

 166년 10월 / 개선식

   노예 - - 마차(마루쿠스 가족) --- 말  

   노예 --- 마차(루키우스 가족) --- 말

 개선식 하는 중 노예는 "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임을 잊지마라."를 주문처럼 되뇌여

  개선식에 참석한 장군에게 승리에 도취되여 인간의 능력의 유한성을 잊지않게 함.

 

§ 공직자의 자세 §

 무보수, 사재 털어 공공사업 실시(노블리스 오빌리즈 / NOBLESSE - OBLIGE)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한다.

 ☞ 유래 :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 포위 당했다. 결국 항복하게 되었고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 자비의 사절단 파견 6명의 책임자 머리를 가져 오라는 조건에 칼레시민 회의 자청 -- 최고부자 외

스타슈드 생피에르 상인, 법률가 등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 - 다음날 교수대에 모였다. 그러나 영국의 임신한 왕비의 간청에 6명을 살려 주었다.

 

로마에서는 고귀한 출신의 족들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게 불문율(사회적 의무 실천 -- 사명)

 1) 병역의무 : 제 2차 포에니 전쟁(16년) / 집정관 13명 사망

 2) 기브활동 : 공공시설 신축, 보수

 3) 사회 통합

 

§ 기독교 §

 페스트(166년 ~167년) / 제국의 중요한 방위선 도나우, 라인강 군단기지에서 발병. / 야만족 침입

 - 역병으로 침체된 사회

 - 신에게 제사(아라비아 산 향료 붙고)

 - 거주지 : 12구역 ~14구역 (테베강 중심 서남부 외곽지역 위치)

 - 사도바울 가르침 : 사악한 사회에 비탄할 구실을 주지않게 분쟁없이 조용히 살라.

 - 로마 시민 반감 : 아테오(무신앙자)라 비난 , 공공생활 거부

 

마루쿠스에 영향을 준 수도장관 루스티 쿠스

- 성격 다듬고 수양하는 방법 배웠다.

위변의 말씨름

공리공론으로 글쓰거나 대중 인기목적의 변설

타인의식 검소한척 하기

과시목적의 자선행위

수사학이나 시적 표현이나 세련되고 화려한 문장에 탐닉(眈溺)하지 않는 것

외출복 입고 집안 서성이지 않는 것

원한은 모두 잊기

상대가 화해 제의하면 화해에 응할 것

 

로마인과 야만족

 - 민족 대이동 : 로마제국 멸망의 도화선(476년)

 - 북방 야만족 침입 반면 동방에서 침입않은 이유?

  1) 북방족 : 기후 좋지않고 수렵생활로 가난, 다산으로 방한칸 거주, 저수지에 물 가득차면 넘치듯

                   인구 이동

  2) 동방족 : 파르티아가 버팀목(완충지대) / 아시아 야만족 파르티아 노려

                  북 아프리카 ; 사막있어 침입 곤란

 

시대의 변화

서기 171년 - 50세 생일

전문가 의견 듣고 의사 결정

야만족과의 대화 1) 로마와 동맹맺고 방위비 지원요구

                         2) 콰디족 로마와 우호관계 맺고싶다.

                         3) 중소 부족(북쪽 오랑캐에 밀려 온 케이스) 거주 땅 마련 요구

 

로마의 대응 1) 방위비 부담 수용

                  2) 라디족과의 로마 시장 출입 금지(마르코마니족과 구별 곤란- 게르만족)

                  3) 3항의 제의도 들어 주었다. / 다키아, 모이시아, 판노니아외 저지 및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에도 땅을 주어 이주시켰다.

결과            1) 이주자의 분탕질(라벤나 주민 불만) / 후세 역사가 평 : 로마제국의 야만족화

                 

 

도나우강 전선

서기 172년 마르 코마니족과 전투에서 황제 근위대 참패, 근위대장 전사.

콰다이족의 이탈 선언

영화[ 글레디 에이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 누스, 로마 판노니아 속주 태생.

강화 : 서기 173년

포로 교환 : 무인지대

                 시장 출입 허가건(로마에서 장소, 시간 결정)

 

사르 마티아 전쟁(서기 174년)

부다페스트에서 남하 도나우강과 다키아 속주 사이의 야지스 겐지족 남하 / 사르마티아족과의 전쟁

전선기지

 카스트라(CASTRA) : 군단기지 정착 시킨 것

                               제정시대 " 안보정책의 요체"

고대 그리스 인의 추구 : 진리, 아름다움

               로마인 추구 : 쾌적, 아름다움

 

야만족의 도미노 현상

 - 속주화 정책의 필요성 인식

 - 웅대한 계획

 

모반

- 시리아 속주 총독 : 아비 디우스 카시우스

- 마르쿠스의 사망 착각 : 성급히 황제 선언

- 카파 도키아 총독 베루스 : 전령통해 소식 알림

- 이집트 총독 : 스탄티아 누스 : 반란 동조

신속한 결단 단호한 태도

 처리 : 서방 주둔 군단 지지확보

           원로원 결의

결과 : 1) 카시우스의 목을 부하 백인대장이 보내옴

         2)동방 재편위해 콤모두스와 그의 아내 파우스티나 오리엔트로 출발

         무장 페르티 낙스(이탈리아 출신)

                막시미아 누스(판노니아 출신)

                퀸틸리우스 형제(소 아시아 출신)

왜 !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나 ? /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 서

 1) 고위관료의 이기주의 개탄

 2)마르쿠스의 관리능력 부족 개탄

 3) 측근(근위대장)의 부정축재

부의 편중에 따른 국가 재정의 궁핍

 

뒤처리 : 관대한 처분(베루스의 서류 소각/ 일조)

              속주 근무자중  카시우스 동조자 다수

              알렉 산드리아 ; 소년시절 보낸 곳

              아버지가 이집트 장관시절 선정

 

제 2차 게르마니아 전쟁

- 서기 178년 8월3일

- 최고 책임자 : 문제의 본질 파악

- 서기 179년 봄

  로마황제 - 2명

     집정관 - 2명 총 투입

- 막시미아누스(판노니아출신) 활약 대단 : 부다페스트 기지둔 제2아듀트릭스 군단 군단장 임명

  → 마르쿠스 즉석에서 원로원 의석주고 로마 원로원에 사후 승인 요청

 

죽음

- 180년 3월 쓰러져

- 유언 : 1) 콤모두스와 안전제국 유지(내란 없도록)

            2) 게르마니아와 계속 전쟁 실시

            3) 단식(물조차 끊음)

 곡기 끊은지 3일후 사망(180년 3월17일)

병약해 항시 위장병에 시달렸고 부왕이 황실에만 있도록 해 전략적인 사고를 익힐 기회가 부족했다. 명상록을 남길만큼 사색적이고 임기웅변에 약해 전쟁에서 전술을 구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