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마르쿠스 아우렐 리우스 황제(서기161년 ~ 180년)
제 11권 종말의 시작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 외가 / 부자(도미티아 루킬라)
소년시절
- 귀족 : 6세 기사계급(최초)
약혼 : 케이오 니우스 콤모두스(후계)
제왕교육
- 선생 : 알렉 산드로스(그리스인) / 호메로스 연구
트로 시우스 아페르 (슬로 베니아 인) / 라틴어 교육 담당
코르넬리우스 (북아프리카) / 토론기술
- 로마인의 철학
판테온(Pantheon) : 만신전
로마시대 똑같은 형태 기둥과 들보 없이 너비와 높이가 43m이다.
로마제국의 안전보장 역사
-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갈리아 전역 정복 라인강 방위선 결정, 갈리아인 수렵에서 농경 민족으로
전환(西)
- 아우구스 투스 : 갈리아인처럼 수 많은 부족으로 나뉜경우 말고 우두머리가 있을경우 타협이 가능
하다는 것 보여준 황제.
- 파르티아와의 경계선 - 유프라 테스강(東)
- 티베리우스 : 라인강과 더불어 제국의 북쪽 경계선을 이루는 도나우강을 방위선으로 확립, 헝거리
부다페스트는 티베리우스가 강 너머 야만족의 동태 감시 위해서 설치.
외치 비교되지 않게 내치를 다진 황제(北)
- 클라우 디우스 : 브리티니아가 로마 지배 불평 불만자들의 도피처가 되는 것 율리우스 카이사르 생각을
1C 후에 실현한 인물. 갈리아 주둔 군사력을 크게줄여 리옹에 1개 대대(1천명)배치
제국의 금화 은화 제조창.
- 도미티아 누스 : 알프스 산맥에서 발원하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방위선의 취약점(티베리우스가 간파)
게르마니아 방벽 설치
슈바르츠 발트(검은 숲) : 로마 영토에 편입, 북쪽 방위선은 북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지고 유기적인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북 방위선 : 야만족의 제어가 곤란하다.
- 트라 야누스 : 디키아족(루마니아) 데케발루스왕 속주로 삼아, 전쟁기록 ;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기록(지고
의 황제로 높이 추앙받음)
- 하드리아 누스 : 개선식 하지않음
방위선의 철벽화, 닫힌 국경이 아니라 열린국경(産物交易), 물산교류는 약탈욕구를 억제
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古代에는 십분의 일(1/10)이 일반적인 세율.
차기황제 마르쿠스
- 서기 138년 7월10일 : 하드리아 누스 사망
- 안토니 누스 피우스 치세 시작, 마르쿠스에 제안(17세) 자기 딸 파우스티나(8세)와 약혼.
- 아일 리우스 카이사르의 딸, 아들 둘다 파혼.
안토니 누스 -------- 부인 ----← 친 남매간 → ---- 마르쿠스(아버지)
↑ ------------← 근친혼 →-----------↑
파우스티나(8세) 마루쿠스(17세)
☞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혼과 재혼에 대한 비판에서 통치계급의 타락한 윤리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얄궂게도 그것이 근친혼을 방지한 셈이라 했다.
포도주 : 고대 로마에서 시작 마르쿠스가 VINUM이라 말하는 손님에게 권했다.포도주를 VINO라 한다.
§ 로마인의 하루 §
오전에 일 시작 오후에는 여가를 즐김(일 : 권력 높아질 수록 많아져)
그리스인 : 로마에 통치받지만 문화면에서 한수 위라는 자부심 가져
안토니 누스 피우스 시대 특징
1) 야만족과 전쟁없이 23년 흘러
2) 로마 밖을 떠나지 않음
3) 인사도 손대지 않고 유임시킴
▷ 전 황제 티베리우스 : 카프리 섬에서 원격 조정(통치기간 23년 일치)
하드리아 누스 : 1) 지식과 체험에 관한 사고, 이론(理論) + 체험 = 산지식
2) 정보의 본질에 대한 사고 / 정보의 가공 - 전달자의 사고 개입
3) 합리와 비 합리의 사고방식 / 합리 ; 안보체계 재 구축, 비합리 ; 격려, 노고위로
▷ 제국에 묶어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
▷ 마르쿠스는 독립심보다 순종적인 타입, 황제의 뜻을 거역하지 않음
마르쿠스 아울레우스 난제
1) 예측불허의 천재지변(饑饉과 弘水)
2)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 23년간 문제의식 제기시 예측가능한 문제
3) 차기황제로 지명 후 지방에서 체험 쌓았다는 다양한 전략전술 구사 가능
4) 시대변화
파르티아 군대의 침공
- 동방의 전운 : 파르티아 볼로 가세스 3세 아르메니아 침공, 반 로마파 황제 앉혀
- 하드리아 누스 : 회상록(지은죄)
- 카이사르 : 갈리아 전쟁기(원로원 결의 거치지 않고 갈리아 처들어감)
내란기 - 루비콘 강 건너간 것 정당화
-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 : 명상록 (자신과의 대화록)
파르티아 침공 → 시리아 총독 코르넬리아 누스에 보고 →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에 명 1개군단으로 상대
→ 궤멸 → 반격 개시 → 시리아 총독 리보 병사 후임 율리우스 베루스
전쟁 2기(파르티아)
장군 - 클라디우스 프론토(라인강 방위선 정예부대)
소아시아(터키) 출신
시리아 군단 군단장
아비 디우스 카시우스(시리아 출신)
서기 164년
황제 루키우스 - 소 아시아 서안 에페소르로 향(이오니아 진주)함
결혼) 루키우스 -- 루킬라(14세) / 마르쿠스의 딸
전쟁 3기(파르티아 내부 진격)
▷ 아비 디우스 카시우스 독무대 : 오리엔트 인에게 로마를 재 인식 시켜준 전쟁(30년 평화 보장)
폐르시아 왕조의 출현
166년 10월 / 개선식
노예 - - 마차(마루쿠스 가족) --- 말
노예 --- 마차(루키우스 가족) --- 말
개선식 하는 중 노예는 "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인간임을 잊지마라."를 주문처럼 되뇌여
개선식에 참석한 장군에게 승리에 도취되여 인간의 능력의 유한성을 잊지않게 함.
§ 공직자의 자세 §
무보수, 사재 털어 공공사업 실시(노블리스 오빌리즈 / NOBLESSE - OBLIGE)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한다.
☞ 유래 :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도시 칼레가 영국군에 포위 당했다. 결국 항복하게 되었고 영국왕 에드워드 3세에 자비의 사절단 파견 6명의 책임자 머리를 가져 오라는 조건에 칼레시민 회의 자청 -- 최고부자 외
스타슈드 생피에르 상인, 법률가 등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 - 다음날 교수대에 모였다. 그러나 영국의 임신한 왕비의 간청에 6명을 살려 주었다.
로마에서는 고귀한 출신의 족들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게 불문율(사회적 의무 실천 -- 사명)
1) 병역의무 : 제 2차 포에니 전쟁(16년) / 집정관 13명 사망
2) 기브활동 : 공공시설 신축, 보수
3) 사회 통합
§ 기독교 §
페스트(166년 ~167년) / 제국의 중요한 방위선 도나우, 라인강 군단기지에서 발병. / 야만족 침입
- 역병으로 침체된 사회
- 신에게 제사(아라비아 산 향료 붙고)
- 거주지 : 12구역 ~14구역 (테베강 중심 서남부 외곽지역 위치)
- 사도바울 가르침 : 사악한 사회에 비탄할 구실을 주지않게 분쟁없이 조용히 살라.
- 로마 시민 반감 : 아테오(무신앙자)라 비난 , 공공생활 거부
마루쿠스에 영향을 준 수도장관 루스티 쿠스
- 성격 다듬고 수양하는 방법 배웠다.
위변의 말씨름
공리공론으로 글쓰거나 대중 인기목적의 변설
타인의식 검소한척 하기
과시목적의 자선행위
수사학이나 시적 표현이나 세련되고 화려한 문장에 탐닉(眈溺)하지 않는 것
외출복 입고 집안 서성이지 않는 것
원한은 모두 잊기
상대가 화해 제의하면 화해에 응할 것
로마인과 야만족
- 민족 대이동 : 로마제국 멸망의 도화선(476년)
- 북방 야만족 침입 반면 동방에서 침입않은 이유?
1) 북방족 : 기후 좋지않고 수렵생활로 가난, 다산으로 방한칸 거주, 저수지에 물 가득차면 넘치듯
인구 이동
2) 동방족 : 파르티아가 버팀목(완충지대) / 아시아 야만족 파르티아 노려
북 아프리카 ; 사막있어 침입 곤란
시대의 변화
서기 171년 - 50세 생일
전문가 의견 듣고 의사 결정
야만족과의 대화 1) 로마와 동맹맺고 방위비 지원요구
2) 콰디족 로마와 우호관계 맺고싶다.
3) 중소 부족(북쪽 오랑캐에 밀려 온 케이스) 거주 땅 마련 요구
로마의 대응 1) 방위비 부담 수용
2) 라디족과의 로마 시장 출입 금지(마르코마니족과 구별 곤란- 게르만족)
3) 3항의 제의도 들어 주었다. / 다키아, 모이시아, 판노니아외 저지 및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에도 땅을 주어 이주시켰다.
결과 1) 이주자의 분탕질(라벤나 주민 불만) / 후세 역사가 평 : 로마제국의 야만족화
도나우강 전선
서기 172년 마르 코마니족과 전투에서 황제 근위대 참패, 근위대장 전사.
콰다이족의 이탈 선언
영화[ 글레디 에이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 누스, 로마 판노니아 속주 태생.
강화 : 서기 173년
포로 교환 : 무인지대
시장 출입 허가건(로마에서 장소, 시간 결정)
사르 마티아 전쟁(서기 174년)
부다페스트에서 남하 도나우강과 다키아 속주 사이의 야지스 겐지족 남하 / 사르마티아족과의 전쟁
전선기지
카스트라(CASTRA) : 군단기지 정착 시킨 것
제정시대 " 안보정책의 요체"
고대 그리스 인의 추구 : 진리, 아름다움
로마인 추구 : 쾌적, 아름다움
야만족의 도미노 현상
- 속주화 정책의 필요성 인식
- 웅대한 계획
모반
- 시리아 속주 총독 : 아비 디우스 카시우스
- 마르쿠스의 사망 착각 : 성급히 황제 선언
- 카파 도키아 총독 베루스 : 전령통해 소식 알림
- 이집트 총독 : 스탄티아 누스 : 반란 동조
신속한 결단 단호한 태도
처리 : 서방 주둔 군단 지지확보
원로원 결의
결과 : 1) 카시우스의 목을 부하 백인대장이 보내옴
2)동방 재편위해 콤모두스와 그의 아내 파우스티나 오리엔트로 출발
무장 페르티 낙스(이탈리아 출신)
막시미아 누스(판노니아 출신)
퀸틸리우스 형제(소 아시아 출신)
왜 !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켰나 ? / 사위에게 보낸 편지에 서
1) 고위관료의 이기주의 개탄
2)마르쿠스의 관리능력 부족 개탄
3) 측근(근위대장)의 부정축재
☞ 부의 편중에 따른 국가 재정의 궁핍
뒤처리 : 관대한 처분(베루스의 서류 소각/ 일조)
속주 근무자중 카시우스 동조자 다수
알렉 산드리아 ; 소년시절 보낸 곳
아버지가 이집트 장관시절 선정
제 2차 게르마니아 전쟁
- 서기 178년 8월3일
- 최고 책임자 : 문제의 본질 파악
- 서기 179년 봄
로마황제 - 2명
집정관 - 2명 총 투입
- 막시미아누스(판노니아출신) 활약 대단 : 부다페스트 기지둔 제2아듀트릭스 군단 군단장 임명
→ 마르쿠스 즉석에서 원로원 의석주고 로마 원로원에 사후 승인 요청
죽음
- 180년 3월 쓰러져
- 유언 : 1) 콤모두스와 안전제국 유지(내란 없도록)
2) 게르마니아와 계속 전쟁 실시
3) 단식(물조차 끊음)
곡기 끊은지 3일후 사망(180년 3월17일)
☞ 병약해 항시 위장병에 시달렸고 부왕이 황실에만 있도록 해 전략적인 사고를 익힐 기회가 부족했다. 명상록을 남길만큼 사색적이고 임기웅변에 약해 전쟁에서 전술을 구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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