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E : 중세(中世) 가톨릭 철학
중세기 페리클레스의 희랍시대를 생각하면은 사상사적으로 엄청난 퇴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철학사에서 가톨릭(catholic)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Saint Augustine으로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르는 유럽 사상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AD 400 ~ AD1,400년까지 천 년간을 보통 말한다. 이것이 Catholic philosophy, 중세기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권력의 중추는 알렉산더 시대나, 폴리스시대와는 전혀 다른 교회권력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서원이 지배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중세기 교회권력과 같은 힘을 갖은 적은 없었다. 대원군이 철폐하려 들면 언제든 철폐가 가능했다. 그러나 중세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대단히 특수한 것이다. 가톨릭은 보편주의적 권력이고 보이지 않는 어떤 유대감에 의해서 완벽하게 인간의 마음(mind)까지 장악한 권력이니까, 참 희한한 것이다. 사도신경(creed)에 근거하여 형성된 사회제도, 교회는 신경을 매계로 권력을 쟁취하고, 부를 축적했다. 교회와 대립하는 것은 로마전통과 게르만 전통이 가장 센 것인데, 로마 전통은 이탈리아 법률가들 사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고, 게르만 전통은 야만족에 정복으로 발흥한 봉건귀족 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로마 전통이나 게르만 전통은 교회에 대적할 만큼 강성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두 전통이 어떠한 철학의 힘을 빌려서 구체화되지 못한 탓이었다. 가톨릭 철학(Catholic philosophy) 시기에 지성계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성직자들이었다. 사상가 자체가 모두 성직자였기 때문에 철학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한 철학이었다. 모든 철학은 신학의 노비였다.
고대시대와 대조를 이루는 중세 세계의 특징은 이원성(duality)이다. 비극적인 것이긴 한데 우리는 이런 이중성의 시대를 거치지 않았다. 우리가 서양사상을 이원적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구체적인 이야기다. 서양에서 듀얼리티라는 것은 성직자(clergy)와 평신도(laity)로 성(聖職者), 속(世俗者)이 구분되어 성직자는 성스러운 자고, 세속인들은 보통인간으로 구분되었다. 라틴족(Latin)과 튜턴족(Teuton)의 이원성, 신의 왕국(the kingdom of god)과 세속의 왕국(the kingdom of the world), 지상의 나라와 하늘나라가 완전히 이원화된 것이다. 그리고 정신(spirit)과 육체(flesh)로 나뉘었다. 세상의 욕망은 육체(flesh)고 교회에 가 부복하고 기도하는 것은 정신(spirit)이다. 영, 육의 이원성이다. 동양사상에도 식색(食色) 지성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이란 게 있긴 한데 본연지성과 식 색지 성이 한 몸에 있는 거지 이게 메타 피시컬(metaphysical)하게 나뉘는 것은 아니다. 성욕은 다스려야 할 대상이지 죄악시할 건 아니다. 그런데 이걸 이원화시켜 보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교황(pope)과 황제(emperor)의 대결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것은 명료한 이원성이다. 철학부터 모든 세계까지 이런 이원적 구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서양의 중세를 적당히 해석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런 이원성으로 세계가 나눠진 적이 없었다. 동방인들은 이런 듀얼리티를 체험하지 못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성서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다. 사무엘(Samuel)과 사울(Saul)왕이다. 사무엘이 성직자 군에 속하고 사울은 황제 군에 속한다. 사무엘은 하늘에서 야훼로부터 모든 게시를 받는 사람이고, 사울은 항상 정욕에 끌려가지고 현실정치에서 멀어진 것이다.
정신과 육체의 이원성만 하더라도 "정신(spirit)과 육체(flesh)"를 가장 강조한 사람이 사도 바울(paul)이다. 바울이 이러한 패러다임(paradigm)을 만든 사람이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틀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이 이원성(duality)으로 돼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온 자들은 자기가 살아있는 세계의 기쁨은 맛볼 수 없었다. 저기 서 있는 나무의 아름다움도 볼 수 없었다. 오직 아름다움이란 성스러운 세계, 천국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행복을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상을 희망할 뿐이었다. 자기네 살고 있는 나라를 안 보고 오직 예루살렘 성을 향해 갔다. 그게 십자군 전쟁이다.
내세를 갈망하는 격정(激情)은 신흥 상인계급의 등장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상인계급의 성장은 이탈리아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점점 다른데서도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봉건귀족은 대체로 무지하고, 우둔하고, 야만적인 특징을 잘 드러냈다. 그래서 평민들은 지성, 도덕성, 무정부 상태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난 교회 편에 섰다. 그러나 신흥 상인계급은 성직자 계급만큼 지적능력이 뛰어났고 세속적인 문제에 박식할 뿐 아니라 귀족계급에 대처하는 능력도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도시 하층계급이 시민 자유에 투사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이렇게 민주적 경향을 나타내는 세력은 교황이 황제에게 맞서 승리하게 한 다음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경제생활의 자유를 쟁취하는 일에 착수했다.
교황 체제가 점점 도덕적 특권을 상실해 가고 15세기로 접어들면서 교황들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통치자로서 찾이하는 위치는 사실상 이탈리아 군주의 지위밖에 되지 않았다. 이러면서 소위 말하는 르네상스가 오기 시작하는데 가톨릭 철학은 본질상 특정한 제도 즉 가톨릭 교회의 철학이다.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것이다. 인류사에서 그리스도교의 등장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아랍 권역에 있고 희랍 세계는 에게해를 중심으로 좌측에 있다. 그런데 문명의 중심이 로마로 옮겨갔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리 호수 연안에 사는 소수민족이 어떻게 큰 로마제국을 먹게 되느냐하는 스토리는 인류사상 정말 온갖 우연이 맞닿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christianity) : 최근 올래 TV에 부활(risen)이라는 최근작 영화가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봤던 벤허(Ben-Hur) 같은 작품에서 부활(risen)까지 변천 과정을 볼 때 의식 변화가 크게 바뀌 게 된 걸 알 수 있다. 부활에서는 예수가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되는데 종교인의 구미를 돋우기 위해 흥행용으로 성서 내용에 입각해 만들긴 했지만 아주 소박하게 그려지고 있다. 기독교라는 것은 결국은 어떻게 됐든지 간에 유대교(judaism)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AD70년에 헤롯이 세운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되는 사건인데, 물론 예수는 그전에 죽은 인물이고 로마 총독 빌라도가 다스렸던 시대다.
러셀말에 따르면 기독교가 탄생되는 과정에 로마제국이 있긴 하지만, 그전에 더 중요한 것은 갈릴리에 살던 민족이 바빌론 유치(留置)시대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바빌론 유치라는 게 당시 유목민이던 그들을 몽땅 메소포타미아 바빌론으로 끌고 간 사건이다. 그전에 유대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는 BC 586년에 바빌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왕국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간 사건이다. 그 후 페르시아 왕 사이러스가 바빌론을 정복함으로서 바빌론이 멸망하자 페르시아 왕은 유대인을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바빌론에서 풀려난 것이 자의적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 기간도 길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말하는 구약이라고 하는 것이 전부 바빌론 유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 그렇게 배타적(排他的) 유일신관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상태에서 생겨난 신들이 중동에 많은데 오직 내 신만을 믿어라! 모세 오경이라는 게 그 중심이 십계명인데 십계명의 제일 첫 번째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게 뭐냐 하면 바빌론 유치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타협하지 않고. 유대의 민족적 동질성(Identity)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절박성에서 생겨난 이유(apology)다. 그 당시에 필요했던 계명이다. 그러니까 모든 유대민족이 갖는 율법과 계율의 특성이 전부 바빌론 유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집트에 갔다가 돌아온 것도 그때 조작(造作)된 거고 다 만들어진 것이다. 초기엔 바알신이라든가 야훼가 공존했고, 이방인들의 신들을 숭배하는 행위가 죄가 아니었는데, 야훼 이외의 신을 섬기는 행위는 가장 극악한 죄고, 저주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 바빌론 유수로 이뤄진 특수한 경우다.
유대 땅으로 돌아와서도 희랍의 알렉산더 정복에 따른 헬레니스틱 문화와 로마 문화가 중첩해 들어오게 되면서 민족적 동질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크게 작용한다. 토라, 안식일, 음식, 금기 조항 등을 가지고 율법 논쟁이 계파 간에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예를 들면 사두 계파 같은 경우 헬라철학을 받아들이고, 쓰이지 않은 토라 같은 경우 정통 사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구두로 전해진 것들도 인정해야 된다고 해서 서로 이견을 보였다.
예수는 바리새인파의 한 사람이었다. 성서에서는 바리새인파를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깐다지만 실제로 발리세파처럼 리버럴(liberal)하고 새로운 혁신을 꿰하는 그룹이 없었다. 예수는 바리세 계열의 사람이다. 그 시대에 정통 히브리 바이블이라고 하는 것 외로 이 시대를 설명하는 외전(외경)들이 많은데 그것들에 의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쥬데이즘이 갖고 있는 불안한 시기에 예수가 대 히트를 쳤고 예수의 신화가 형성되면서 이것이 알렉산드리아를 통해서 로마 철학으로 들어가게 되는 과정이 아주 특이한 인류사에 아주 우연적인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유대교의 특수한 정황에서 생겨난 모든 배타, 저주, 초월주의와 유일 신관적인 철학이 갈릴리 평원에서 민족적 체험을 한 것이다.
구약 학자들이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inform)를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유대교와 기독교 간 역학관계(dynamics)를 잘 모른다. 단 구약에서 신약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정치사적으로,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굉장한 새로운 통찰(洞察)이다. 유대교가 사막 한가운데서 오래도록 줄기차게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 바빌론 유수 시대에 놀랍게 소수민족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성공을 했고 거기에 자긍심을 갖게 되면서 쥬데이즘의 핵(core)을 형성하게 됐고 그것에 대한 많은 비판세력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율법에 대해서 새로운 사랑(仁愛)의 율법을 들고 나온 어떠한 엑스(x)가 있었는데 그것이 빅히트를 친 것이다. 현재도 빅히트를 치는 또 다른 예수가 계속해서 나와야 한다. 우리도 우리 민족의 예수를 만들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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