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E : 에피 크로스 학파 / 아타락시아
지식(知識)이 형식화되고, 추상화되기 시작하면서 젊은이들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대학에서 선생들이 파워포인트로 강의하는 걸 가지고 지식이라고 말할 순 없다. 단지 정보를 테크니컬(technical)하게 전달하는 정도라고 보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앎이란 무엇이냐? 하는 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걸 지식으로 착각하고 자기들이 지식인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강의, 차이나는 도올에서 고전적 지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지식이라는 게 삶에 어떻게 관계되며, 지식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지식이 깊어지면 정치사상이나 주변의 하찮은 일들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등 여러 가지 본질적인 문제의식, 사고의 전환 등 인식의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공적인 출연을 통해 세가지의 변곡점(epoch)이 있는데 첫 번째는 1982년 귀국해서 민흠사의 "세계의 문학"에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작은 논문을 기고했다. 당시 동양학이라는 학문이 국문학, 역사, 철학 등 한문을 자료로 삼는 것에 대한 위선을 폭로했다. 당시 한문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한문이라는 게 치열하게 번역돼서 정확한 의미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서로 교환해가면서 지식이 성장해가는 건데, 한문이 특수한 사람들이 알면 문리가 통해서 두루두루 통섭하는 것처럼 착각했다. 그래서 주석학( 註釋學)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전수되어 왔다. 뜻을 모르는데 문자만 외워가지고 모른 채 전달이 됐는데 모르는 것을 자기의 지식인 것처럼 여겨왔다.
모르는 게 단위를 이루니까, 그래서 한문의 해석 방법을 제기했고, 번역(飜譯)도 과거엔 서도전시회에서 한자를 번역한 유래가 없었다. 내가 서도 전시회를 하면서 처음 시도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해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논문을 쓴 이후로 전시나, 박물관 등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혁명적인 변화다. 이 논문의 의미는 20세기 후반 우리나라 국학적 세계관에 있어서 새로운 학문의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변곡점(epoch)은 EBS "노자와 21세기" 강의였다. 그당시 모든 TV 프로그램에서 강의가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세계적으로 없었다. 1999년 ~ 2000년으로 넘어가는 동안 56회 강의를 통해서 노자를 해석한 건데, 일반인들에게 노자를 해석한다는 주제로 코미디언 쇼나 개그쇼 보다 훨씬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이것은 한 개인의 위대함을 넘어 우리나라 민중이 얼마나 지적인 민중인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때 시골에 다니면 장판에서 인절미, 보리개떡 팔던 할머니들이 일어나서 팔던 떡을 내주며 먹으라고 권하는데, 그들이 내 강의를 듣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건 문명이 몇천 년 쌓여있기 때문이다. 한문으로 쌓인 지식 체계가 지식으로 제대로 대접을 못 받은 것이다. 그들의 말속엔 한학이 배어 있고, 전통 문명에 대한 소양(素養)이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영어, 수학을 모른다는 이유로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노자와 21세기"라는 강의를 통해 현대적인 학문이 접합을 이루고 사라져 가던 전통적인 지식 대중이 다시 부활했다. 이 강의는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의 방법론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후 주요 방송사에서 강의를 하면서 TV 강의 시대를 열었고, 이런 형식의 프로그램 제작이 일반화됐다.
세 번째 변곡점(epoch)은 JTBC에서 "차이나는 도올"이란 주제를 가지고 연예인을 대상으로 대화를 하면서 즉흥적인 주제를 종합해서 하나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러면서 웃음과 해학이 가미되는 독특한 상호작용(interaction)쇼를 만들었다. 아마 이프로가 아주 신선하게 우리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번 강연은 한국 미디어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러한 끊임없는 학문적 노력을 통해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역사를 개변(改變)시킬 것이냐하는 문제와 더불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건강이 유지되고 남북문제의 변화로 북한에서 강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많은 변곡점(epoch)이 내 생애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사상가로서 우리 사회를 통합시키고, 소통시키고 국가의 비전을 끊임없이 수립해가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겠다. TV 출연은 시청률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학자로서 할 짓이 못된다. 시대적 변곡점(epoch)을 제시하고 빠져나와야 한다.
헬레니스틱 시대(HELLINISTIC Age)는 코스모폴리스 시대다. 이미 작은 단위의 폴리스(polis)는 깨졌고, 인간 보편이라고 하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시작된 시점이고,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가 발흥하기 이전 중간 시대다. 결국 희랍 문명의 고전시대가 있었고 거기서 로마시대로 넘어가는 로마 초기까지 200 ~300년 간이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데 결국은 기독교가 힙쓸어버렸다. HELLINISTIC Age의 철학이라는 것은 기독교를 맞이하기 전까지 바빌로니아 천문학, 인도 요가까지 모든 철학이 들어왔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르네상스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러셀은 역사를 뒤따라가는 야전병원에 비유했지만 그것은 상당히 무지한 평가일 수 있다. 이 시기야 말로 진정으로 서양철학이 한 번 점프할 수 있는 시기였는데 이시기에 철학을 너무 후대 기독교적 칼라, 희랍적인 칼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지 모른다. 양쪽 칼라가 이 칼라하고 다르니까. 그런데 이 칼라 중에 가장 독특한 게 모든 관심이 인간의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주의 문제, 자연의 문제, 형이상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삶의 문제라는 것이다. 삶이란 행복인데 궁극적 행복이니까, 돈이 많아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결국은 마음의 문제로 불교적 테마가 되는 것이다. 마음의 평정, 모든 철학의 테마가 결국은 마음의 평정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완전히 HELLINISTIC Age의 특징은 철저히 비신화적이라는 것이다. 비종교적이고 동방문화에 엄청난 세뇌를 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발상이 과학적이다.
쾌락주의자(Epicurean)들도 철저한 유물론자들이다. 데모크로토스의 원자론, 인도의 유물론자들의 영향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영혼까지 물질적 기초가 있다고 봤다. 데모 크로토스는 철저한 유물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신을 인정을 하는데, 물질로 구성된 것으로 봤다. 신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처럼 신의 영역도 하나의 물질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에게 어떤 하등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존재로 봤다. 인간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은 쾌락일 수 밖에 없다고 봤다. 헤도네(Hedone)는 에로스와 푸시켓의 딸이고 쾌락의 여신이다. 헤도네엔 종류가 여러가지 있다. 동적인 쾌락, 정적인 쾌락, 능동적 쾌락, 수동적 쾌락이 있다. 동적인 쾌락은 배고플 때 허기를 면하기 위해 먹는 것은 동적인 쾌락인데, 이와 대조적으로 배가 불러서 흐뭇한 상태는 정적인 쾌락이다. 그러나 격렬한 쾌락은 손해라는 것이다. 쾌락이라는 것은 온화해야 한다. 그리고 동적인 평형상태(平衡狀態)에 있는 게 쾌락이 부작용이 적고, 오래가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다.
모든 사물의 근원이 위(胃)라고 봤다. 위장의 만족감이 최상의 열락(悅樂)이었다. 불교의 해탈이나 마찬가지로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탐식의 쾌락은 안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이 위통이다. 위가 아픈 것처럼 괴로운 게 없다. 최고의 선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려(思慮)다. 사려(prudence)라는 게 절제되는 거고 사려는 철학보다 더 값진 것이다. 철학이라는 것은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계획된 실천 체계다. 에피 크로스가 자신의 제자에게 "어떠한 문화든 피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점점 부귀와 문화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다. 진정한 쾌락을 추구하다 보니 쾌락 자체가 금욕주의적 요소를 갖지 않으면 쾌락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진정한 쾌락이란 조금을 먹어도 오래오래 소식하면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은 쾌락주의가 금욕주의나 중용론이 되는 것이다. 쾌락주의(Epicureanism) 하나만 제대로 이해하려고 해도 굉장한 동양철학적 사유가 필요하고 개명(開明)한 사상이다. 그 이전에 무리한 얘기가 없고 어떻게 위장의 쾌락을 유지하느냐? 이게 사실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다. 성적인 문제라든가 모든 문제에 있어서 헤도네(Hedone)를 추구하지만 결국은 마음의 평정(ataraxia)을 찾기위해 세속적 쾌락에서 멀어져 가게 된다. 반문명적으로 검소한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숨어서 살라(Lathe biosas!)"라고 외쳤다. 진정한 쾌락이란 적극적으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결국 쾌락주의는 금욕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쾌락주의자는 금욕주의자가 됐다. 그것이 쾌락주의(Epicureanism)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행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토이(stoics) 학파도 쾌락주의와 유사한데 그들은 Apatheia(초연함)를 모토로 삼았다. 결국 이렇게 살려면 자연에 따르는 삶을 살아라. 이 때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Logos다. 자연에 따른 삶이란 이성과 이법에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다. 이성으로 욕정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유덕(有德)한 사람이다. 나중에 이런 것들이 기독교와 연결된다. 사도바울 철학에도 스토이(stoics)철학이 들어가고 쾌락주의는 합리주의 사고인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더 열렬한 끌림(attraction)을 주게 된다. 쾌락주의는 개명한 사상인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미신적인 것을 가미하게 되니까 기독교라는 미신은 상당히 매력이 있는 것이 됐다.
결국 헬레니즘 철학이 근원적으로 붕괴되고 만다. 기독교라는 미신의 매력에 의해서 헬레니즘이 붕괴되어 간 것이다.
회의주의자(skeptic)들도 치열한 반종교주의자들이다. "하나님의 문제 ,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판단을 중지하라!" 그것에 대하여 판단을 하지 마라! 이게 회의주의(skepticism)다. 뭣 때문에 그런 걸 가지고 갑론을박하느냐? 우주의 궁극자가 뭐냐? 이런 불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왜 갑론을박하냐? 논쟁을 중지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어라! 회의주의라는 게 무엇을 비판한다는 뜻보다도 마음의 평정을 얻기위해서는 쓸데없는 것 가지고 논의하지 말고 판단 중지를 시켜버려라! 이런 주장이다. 그리고 무관심해져라. 다 비슷하다. 인간의 상식에 기초해서 편안하게 살자. 고요하게 살자. 그리고 세속적 부귀영화에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삶을 살자. 이런 게 공통돼 있다. 노자사상과 유사하지만 훗날 기독교적인 금욕주의, 플라톤의 영혼과 육체라는 이원론적 사유로 변질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노자 철학이라든가 불교사상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원융(圓融)한 세게관, 심신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닌 근원적으로 무아론(無我論)적 해탈(解脫)이라든가, 노자가 말하는 무위적인 포용력(包容力)들이 잘못 해석됐다. 헬레니즘 철학에서 항상 느끼는 게 서구인들은 헬레니즘 철학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상당히 동양적 사유가 발전할 수 있는 시기에 기독교에 의해서 오염되고 이원론적 틀로 매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시대 철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게 동양적 측면에서 이 사상들을 들여다 보고 해석할 수 있는 사상가가 없다. 러셀도 역시 그런 관점을 제대로 지니지 못했는데 문제는 불교 경전, 노자 경전 등 전해오는 책이 없고 부분적으로 파편만 남아 전해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쾌락주의(epicureanism)라는 것도 단순히 쾌락주의라고 해석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epicureanism은 동서양을 종합한 심오한 사상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피상적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헬레니즘 철학은 유일하게 동양적 사상이 개화(開化)된 시기였고 도마복음에 비춰진 예수의 모습은 동양적인 현자의 모습일 수 있다. 이 시대의 역사적 진정한 예수도 후대 기독교도들에 의해 왜곡됐을 수 있다. 원래 예수는 동방 현자의 모습이라서 그들에겐 충격적이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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