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E : 헬레니즘과 알렉산더 대왕
공시(共時)와 통시(通時)를 통한 역사의 시좌(視座) : 김밥을 말을 때 김에 밥을 깔고 그 위에 시금치, 단무지, 우엉, 계란부침 등을 넣고 이것을 말아서 썰지 않은 상태를 diachronic(통시[通時]적인)이라 하고 그 단면을 잘라 놓은 상태를 synchronic(공시[共時]적인)이라고 한다. 역사도 이와 매 한 가지다. 공시(共時)라는 것은 잘라진 단면에서 전체 구조가 드러난다. 나무를 잘라서 단면을 보면 나이테가 드러난다. 나무의 측면도 잘라서 들여다보면 성장 벽은 보이지만 그것도 단면이지 전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공시(共時)라는 것은 한 시대의 단면이지만 전체를 볼 수 있는 면이 있다. 언어를 보더라도 한 시점에다 고정시키고 볼 때 전체를 보는 거고, 이것을 다시 말하면 공시(共時)를 보기 위해서는 통시(通時)적 관점을 갖어야만 공시가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통시(通時)라는 것도 공시(共時)와 공시(共時)의 차이점을 아는 사람만이 통시(通時)가 보인다. 공시(共時)와 통시(通時)라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분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강의하는 것은 현대 중국에 시진핑을 통한 공시적 구조지만 이 공시를 보려면 공시를 가능케 하는 기나긴 통시적 시각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역사의 줄기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기자들은 공시(共時)를 보더라도 이런 통시(通時)적 시각이 없기 때문에 공시가 보일 수 없다. 공시와 통시 전체를 조망하는 시좌(視座)가 필요한데 중국인들 조차 그런 걸 갖지 못했다. 그것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니까 깊이 공감한다.
역사의 관점을 이해하면 시야가 넓어진다. 우리가 시진핑을 바라보는 것도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없이는 바로 볼 수가 없다. 현대사를 바라볼 적에도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라든가, 수당 대라든가, 진한시대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겐 안 보인다. 이와 동시에 우리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구성해 가느냐? 우리 민족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문제다. 시진핑에 관하여 서술한 기사를 보면 "황제의 자리를 두고 세기적 권력투쟁"이라고 썼는데, 본인은 황제 권력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타이틀 제목을 그런 식으로 썼다. 그 기사의 제목만 봐도 시진핑에 관한 시각이 "황제의 권력을 두고 암투를 벌이는 권력투쟁의 사나이"에 가려져 아무것도 안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유명한 책도 "신중하지만 교활한 카리스마"라고 썼는데 이런 식으로 해놓으면 말이 안 되는 게 시진핑이란 사람은 교활(狡猾)하려야 교활할 수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표현해버리면 전체가 망가지게 된다.
신문기자의 단어 선택 하나가 얼마나 국민들의 의식을 좌우시키느냐,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문제를 삼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북경 특파원은 너무 수준이 낮다고 봐야 한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가서 떠돌아다니는 정보를 가지고 기사를 쓰니 우리한테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차이나는 도올에서 과연 차이나는 시각이 무엇인가? 이것을 국민들이 접하게 되면서 이런 것까지는 모르지만 충격을 바고 있다. 그렇게 차이가 나니까, 색다르니까, 재미가 있는 거고, 우리가 구경을 하더라도, 약장수가 뭔가 색다른 걸 들고 나와야 볼거리가 있고 흥미가 있다. 그래야 가던 길 멈춰 서서 머리를 쑤셔 밀고 들어가 보지, 매일 똑같은 걸 가지고 떠들면 그냥 지나치게 된다. 문제는 우리 민족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의식이 깨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강의를 한다.
지난 시간에 견유학파에 관해 강의를 했다. 견유학파(cynics)하면 디오게네스(Diogenes)가 제일 먼저 생각나고 우리가 시니컬하다고 말하면 세상을 우습게 보고, 비꼬고, 타협하지 않으며 자기는 방외인(方外人)으로서 쳐다본다는 의미가 있다. 시니컬은 냉소적이다. 조소적이다는 의미를 갖는데 시니컬의 본질적 의미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다.
헬레닉(Hellenic)과 헬렌이 스틱(Hellenistic) :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살지언정 문명에 오염되지 않으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하는 것은 헬레닉(Hellenic)하면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인 클레시 컬 피리어드(classical period) 시대를 말하는 것이고, 영어로 헬렌이 스틱(Hellenistic)하면 이건 알렉산더 대왕 이후가 된다. 이것은 우리말로 번역이 되질 않는다. 헬레닉(Hellenic)은 고전시대라고 번역하고, 헬렌이 스틱(Hellenistic)은 헬레니즘 시대로 번역한다. 그런데 그게 좋은 번역은 아니다. 헬레닉(Hellenic)은 페리클레스(Pericles)의 시대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제국으로 만든 사람이다. 아테네는 불과 30만 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국가였지만 델로스 동맹을 통해 페르시아 제국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규모의 대제국을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페리클레스 이후 사람이다. 아테네의 고전철학이라는 게 고전시대 한가운데 있는 게 아니라 뒷부분에 있는데 페리클레스 시대라는 게 건설의 시대다. 문명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시대다. 그 당시 희랍철학이라고 하는 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가는 크리에티브(creative) 한 시기였다. 피타고라스가 교단을 만들어 이탈리아 남부에 가서 살았다고 해도 제약(制約)은 없었다.
헬렌이 스틱 시대(Hellenistic age)라는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무자비하게 정복을 했던 시기다. 정복이라는 게 취미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엄청난 규모의 정복 이후가 페리클레스가 꽃피운 아테네 폴리스 문화를 전파한다는 명분을 지녔다.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어린 시절에 군주가 돼서 용맹하게 싸우는데 내가 보기엔 진시왕이나 알렉산더 대제나 두 사람이 비슷한 시대에 산 인물인데 알렉산더 대왕이 개인적인 능력이라든가 좀 더 탁월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신의 아들로 착각될 정도로 모든 능력이 탁월하고 살아있는 헤라클레스에 비견(比肩)될 만큼 뛰어났다. 그래서 자기의 출생도 후에 신비화하는데, 심리(psycology)를 분석해보면 기량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신으로 착각할 만하다. 그 당시엔 장수가 뒤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맨 앞장서서 싸웠다. 요즘처럼 장수가 뒤에 서서 싸운 게 아니다. 조조만 해도 마차 타고 뒤에 앉아서 지휘만 했는데 희랍의 전사들은 달랐다. 그는 맨 앞에 서서 싸웠지만 다치지 않고 모든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신의 아들이 아닌가 생각했을 것이다. 천하무적(天下無敵)이란 게 신적인 능력을 지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알렉산더가 이스탄불을 지나 소아시아를 정복한 후 해변을 따라 건설한 도시는 아테네의 폴리스를 옮겨놓은 듯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지어질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 하다. 어마어마한 석재들을 깎고 다듬어서 만든 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뿐 아니라 이곳에 아테네 시민들을 이주시켰다. 왜냐면 아테네화 시켜야 하니까. 그 당시 소아시아는 희랍 문명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겐 토착신앙도 있었는데 그곳에 희랍식 민주주의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아고라에서 토론을 하고 극장에서 아테네 문화를 수용한다는 게 어색했을 텐데 게다가 토착문화라는 것은 대개 미신이고, 종교고, 정치도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숭배를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걸 버리고 그리스 문화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토착민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사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도 아테네 문명은 이질적인 문화고 그들도 이방인이다. 그러나 아테네 문명에 대한 흠모(欽慕) 때문에 정복지에 아테네 문명을 이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세기적 실험이다.
희랍인들에게 이방의 요소가 엄청 들어가게 된다. 도시 접합이라는 게 이상한 형태로 이뤄지게 된다. 짧은 시간 안에 이뤄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정복지마다 도시건설을 하면서 인도까지 갔다. 인도에 가서도 희랍의 신들을 그들의 신들과 함께 믿도록 했고, 인도에서는 그들을 탄압하지 않는 조건으로 희랍의 신들을 수용했다. 헬레닉(Hellenic) 시대는 자유(freedom)롭고 무질서(disorder)했다. 헬렌이 스틱 시대(Hellenistic age)라는 것은 권위에 대한 복종(subjection)을 하는데 무질서(disorder)했다. 이 시대를 계승한 게 로마시대였다. 로마시대에 접어들면서 복종(subjection)과 질서(order)의 시대가 오게 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한 러셀의 비평 : 러셀은 로마 제정(Roman Empire)의 복종과 질서가 가장 숨이 막힌다고 말했다. 이 말이 가장 그 시대를 잘 정리를 잘한 것 같다. 자유로운 데서 사상가가 나온다는 이야기는 창조적인 사고를 지녔기 때문이다. 플라톤만 해도 진리 탐구자였다. 우리가 보면 개똥 같은 진리라고 해도 이데아론, 국가론 등 자기들이 생각하는 지고의 진리를 향한 탐구고, 피타고라스도 우주를 숫적으로 탐구했다. 데모크로투스의 원자론도 진리탐구인데, 헬렌이 스틱 시대(Hellenistic age)로 오면은 견유학파는 진리탐구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불행을 면할 수 있냐? 가 최대 관건이었다. 알렉산더 이후에 혼란스러운 정국에 직면케 된다. 알렉산더가 정복할 땐 자신이 신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었다. 자식들은 어리고, 자신이 부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설도 있을 정도로 부자 간 관계가 안 좋았는데 자식들에게 제국을 맡기기엔 부족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죽음이 임박함을 느끼고 그동안 정복했던 제국을 부하 장수들에게 나눠준다.
자식에게 물려준다면 유지가 안 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등분했는데 요즘으로 볼 때 유럽권, 아시아권, 그리고 이집트였다. 유럽권에는 안티고 누스(antigonus), 이집트와 아프리카 권은 프톨레미(Ptolemy / alexandria) 왕조, 아시아 권역은 셀레 우 쿠스(Seleucus / antiock) 왕조다. 안티옥은 시리아에 있는 도시다. 마케도니아 장수들은 무식한 놈들이었다. 희랍의 사상가들을 궁정에 모셔 대접했는데 이 사람들은 전혀 창조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대제국에서 왕들을 모시고 살려면 무탈한 게 우선이니까, 당시 그들은 인도에서 배운 철학이 대부분이었는데 동방 철학이란 게 세상이 아무리 괴로워도 앉아서 부동심(不動心)을 하고 있으면은 편하게 고통 안 받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꾸고 건설하고 참여하는 게 아니라 도피(逃避)적인 요소가 강했다.
이 당시 동양철학이라는 게 인도의 아쇼카 시대였다. 아쇼카 시대의 불교문화를 전파했던 곳이 헬레니즘 문화권이었다. 희랍 문화에 전파된 동방 사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무아 사상(無我思想), 열반(涅槃), 해탈(解脫) 등 이런 논리가 불행한 세상에서 어떻게 상처 받지 않고 잘 사느냐?로 이어졌다.
러셀의 말이 "이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공포가 희망을 대신했다. 인생의 목적이 적극적인 선의 성취가 아니라 불행의 회피(回避)였다. 불행을 회피하려는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게 헬레니즘 철학이다. 헬레니즘 철학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역사가 희망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무지막지한 군주들이 지배를 하면서 과거 폴리스에서 공동 선을 찾던 철학자들이 코스모폴리스가 되면서 시민 대신 인류라는 말을 쓰게 된 것처럼 지배의 범주가 확대됐다. 알렉산더 시대에 와서 혼혈이 되고, 문명이 융합되고, 국적도 사라지고, 독특한 문화도 사라지면서 모든 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들뜬상태에 놓였다. 개인의 안락을 영유하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면서 더 불행한 것은 헬레니즘 시대가 기독교라는 흉악한 물건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재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향락과 안락, 부동심 등이 나중에 기독교의 천국론, 도피론, 복종 등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거대한 비극이라고 하는 기독교라고 하는 미신이 어떻게 세상을 휩쓸 수 있었는가? 이게 알렉산더 대왕의 세계 정복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기독교가 인류를 지배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희랍인들이 갖고 있었던 발랄함이 상실돼버렸다.
이 시대를 상징적으로 나태내고 있는 "아고라"라는 영화가 있다. 최소한 헬레니즘 시대에 창조적인 철학자는 없었어도 과학, 수학, 천문학, 유클리트학 등은 발전했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문화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 헬레니즘 시대엔 창조적인 철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페리클레스 시대에 짧은 시간 동안 아테네 도시국가의 발흥이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말하는 희랍철학이라는 것도 잠깐 반짝했던 것이다. 그것이 플라톤 전집과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으로 남아있는 것뿐이다. 서구의 정신사라고 하는 게 알고 보면 지독하게 빈곤하다. 문헌적이나 사상의 폭 모두가 빈곤하다. 그런데 이 서양사상을 존경스럽게 바라만 봤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시대적 배경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피하는 쪽에서 국가보다 개인의 정신적 건강에 매몰됐다. 형이상학은 뒤로 물러나고 윤리학은 개인 윤리학이 전면에 등장한다. 철학은 이제 용맹한 소수의 진리 탐구자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불기둥이 아니었다. 오히려 생존투쟁의 흔적을 뒤따르며 병약자와 부상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너무도 멋있는 러셀의 평가다. 헬레니즘 시대에 철학은 역사를 뒤따라가는 야전병원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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