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시민이 자유를 누리던 시대는 오현제가 통치했던 서기 96년부터 180년까지다. 그중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서기 177년 자신의 아들 콤모두스를 공동 통치자로 지목하고 4년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죽었다고 한다.
네르바를 비롯해 4명의 황제는 로마를 이끌 유능한 인재를 발굴해서 양자로 삼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해 로마의 평화를 이어갈 수 있었는데 로마보다 아들을 더 사랑했던 아우렐리우스는 19살 된 아들 콤모두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지만 그는 천성이 나약(懦弱)하고 소심해서 로마제국을 통치하기에 자질(資質)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콤모두스는 180년부터 191년까지 11년간 제위에 있으면서 로마를 혼란(混亂)의 수렁으로 끌어들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오현제 시대까지 구가해오던 200년의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서서히 붕괴되는 조짐(兆朕)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콤모두스는 성격이 단순하고 소심한 편으로 비인간적인 행동에 익숙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 사악한 자들이 그에게 밀고(密告)하고 부추겨, 사람을 형틀에 매달고 죽일 때 그들이 절규(絶叫)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격이 변해갔다. 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정도였으나 그게 체질화(體質化)하여 그의 영혼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콤모두스가 집권 후 3년 동안은 선제가 천거했던 자문관들의 고견을 들어 유훈(遺訓)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183년 검투 경기를 끝내고 지하 회랑을 걸어가던 중 자객에게 공격을 당한 후 돌변(突變)했다. 자객은 “너에게 보내는 원로원의 칼이다.”라며 공격했으나 곧바로 근위병에게 제압됐고 배후가 자신의 누이 루킬라였음을 알고 그녀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끝난 듯 보였으나 그는 자객이 남긴 말 한마디로 원로원 전체에 대한 공포심(恐怖心)과 증오심(憎惡心)을 갖게 되면서 고관들을 정적(政敵)으로 간주(看做)해 유혈 숙청(流血 肅淸)하기 시작했다.
콤모두스는 근위대장 페렌니스와 크레안데르를 각각 국사 총신(國事寵臣)으로 삼고 대리통치를 시켰는데 이들은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등 공직을 매관매직(賣官賣職)하는 것은 물론 유산자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재산을 몰수하는 방법으로 큰 부를 쌓았는데 페렌니스의 행정 처리에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군단에서 1,500명의 병사를 보내 불만사항을 전달하자 황제는 186년 기습적(奇襲的)으로 그를 제거했다. 황제가 은밀히 그를 제거한 이유는 그의 아들이 일리리쿰의 사령관으로 있는 데다 그가 대망(大望)을 꿈꾼다는 첩보를 듣고 놀라서 한 것이다.
콤모두스는 페렌니스 후임으로 클레안 데르를 지명하고 국사 총신을 맡겼는데 그 또한 시민의 고혈을 짜내고 매관매직으로 큰돈을 모아서 일부는 콤모두스에게 상납하고, 또 일부는 목욕탕, 주랑, 운동장 등을 지어 황제의 이름으로 바쳤지만 로마의 시민들의 불만은 점점 차올랐고, 189년 흑사병과 기근까지 덮쳐 하루에 2,000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자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오락을 즐기던 로마시민들이 근위대장 클리안 데르의 목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근위대장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고 시위자 중 일부가 죽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사태가 심각해져 갈 때 근위대 중 보병이 평소 기병에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이 평민 편에 서면서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불안감을 느낀 콤모두스는 클리안 데르의 목을 시위 군중에게 던져주고 말았다.
콤모두스는 어려서 교육과 담을 쌓고 살았다. 합리적인 사고력과 교양 쌓기엔 관심이 없고 대중적 오락인 검투, 들짐승 사냥, 원형 경기에 몰두했다. 그는 헤르쿨레스를 자처하며 사자의 탈과 몽둥이를 들고 다녔고 검투사로 735회 출전해서 싸우는 등 대중들로부터 검투 경기의 승자로서 환호받는 것을 즐겼다. 또 정치는 국사 총신에게 맡겨두고 향락에 빠져 살았는데 속주(屬州)에서 뽑아 올린 300명의 미녀들과 육욕을 즐기며 방종(放縱)과 음탕(淫蕩)한 생활에 젖어 살았다.
로마제국에 학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들을 경멸(輕蔑)하고 증오(憎惡)한 나머지 이유 없이 죽였다. 당시 희생된 집정 관급 원로원 의원들 명단이 기록으로 남아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안토니누스 가문과 연결돼 있으면 불안해하고 잡아들였는데, 자신의 아버지나 외조부가 안토니누스에 의해 양자로 입양돼 황제가 됐기 때문에 안토니누스 혈족에게 정통성의 콤플렉스가 있었던 셈이다.
콤모두스는 그를 보좌하던 애첩 마르키아, 시종장 에클렉투스와 근위대장 라에 투스에 의해 살해됐다. 맹수 사냥으로 피곤한 콤모두스에게 애첩 마르키 아는 독이든 포도주를 건넸고, 그 술을 마신 콤모두스가 괴로워할 때 레슬링을 하는 건장한 청년이 목졸라 죽인 후 그의 시신을 감쪽같이 궁전 밖으로 운반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물론 궁전 안에서도 황제의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살해동기는 언제 변심해 자신들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선수 쳐 살해를 공모했다고 한다.
조선 10대 왕 연산은 1494년부터 1506년까지 12년간 조선을 통치했던 왕이다. 로마 황제 콤모두스와는 1,300년 정도 시대 차이가 난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장인 한명회와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사이에서 정치적인 결정에 의해 왕이 됐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보위에 오를 때 장자방 역할을 한 사람이 한명회다. 세조는 왕위 찬탈 이후에도 그의 통찰력(洞察力)에 두려움을 느끼고 역심을 품지 못하도록 늘 곁에 두고자 정략혼(政略婚)을 선택했는데 성종은 정략혼의 당사자(當事者)였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성종은 층층시하(層層侍下)에 상전을 모시며 알게 모르게 눈치를 살펴야 했고,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정희왕후, 인수대비는 연산의 어머니 제헌왕후(폐비 윤 씨)가 한미한 집안 출신인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오다 친잠(親蠶)을 핑계로 실랑이를 하면서 그것을 문제삼아 폐비시킨 후 사가에 유폐한 후 사약을 내렸다. 그의 아들 연산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할머니와 훗날 자신을 내쫓고 보위에 오르게 될 진성대군(중종)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대놓고 타박은 안 했을지 몰라도 두 사람은 연산에게 따듯한 마음을 갖고 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연산은 아버지에게 문리 불통이라며 종종 꾸지람을 들었다. 그가 세상 이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데 원자로 태어났지만 자기 주변에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 하나 없었고, 자신의 허물을 막아줄 보호자가 없었기 때문에 늘 조심하느라 속내를 드러낼 때 주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산은 세자 시절 피부병으로 사가에 자주 피접(避接)을 나나간데다 본래 공부하길 싫어했다. 세자시강원에는 종 3품 보덕(輔德)과 정 4품 필선(弼善)이 세자의 학문을 맡아서 가르치는데 보덕 조지서는 직언을 서슴없이 한데 반해 필선 허침은 조용히 타일러 연산은 그의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연산은 벽에 조지서는 큰 소인, 허침은 대성인 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훗날 조지서는 갑자사화에 연루돼 죽었고, 허침은 연산의 총애를 받으며 우의정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는 왕이 된 후 몇 년간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림 세력들에 의해 정치에 대한 피로감(疲勞感)을 느껴야 했고 그의 의중을 파악한 훈구세력의 밀고에 의한 사화(士禍)가 발생하면서 연산은 피(血)로 다스리는 정치에 눈을 떴고 숙청(肅淸)을 통해 자신의 뜻과 반하는 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의 맛에 길들여졌다.
특히 그의 혀처럼 구는 아첨꾼 임사홍에 의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후 연루자들을 도륙(屠戮) 내면서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게 된다. 정사는 폐하고 채홍사(採紅使)들이 전국을 누비며 물색해온 미인들을 궐 안에 들이니 그들이 머물던 곳이 흥청(興淸)으로 300명의 여인이 이곳에서 왕의 유희(遊戲)를 위해 머물렀는데 상급, 중급, 하급으로 분류돼 그중 얼굴 되고, 성격 좋고, 노래 잘하면 상급자가 돼 몸종까지 받는 호사를 누렸다고 한다.
연산은 사냥을 좋아해 강무(講武)를 핑계로 군사훈련을 한다며 군대를 동원해 사냥을 나갔는데 사냥터가 좁다며 민가를 허물고 금 표를 세워 백성들의 접근을 막았다. 연산의 최측근 박원종은 월산대군의 처이자 연산의 백모인 자신의 누이를 희롱(戲弄) 한 것에 모반을 계획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문무에 뛰어난 이장곤이 반정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선수를 쳤다는 말도 있다. 어찌 됐든 연산은 보위에 오른 지 12년 만에 퇴위된 후 강화로 유배됐다.
1,30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둔 두 사람, 콤모두스와 연산은 최고의 자리에 오른 후 주변인의 아첨(阿諂)으로 덕치를 베푸는 것을 실패해 한순간 나락(奈落)으로 떨어졌다. 콤모두스는 천성이 나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순하고 소심해서 누군가의 말에 쉽게 따르는 편이었다. 그는 공부보다 오락을 즐겼다. 사리에 밝지 못한데다 귀가 얇아 남의 말에 잘 따르는 성향을 지녔다. 연산도 가족들로부터 따듯한 사랑과 칭찬을 받기보다 부왕으로부터 문리 불통이라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연산은 어머니가 어릴 때 사약을 받고 죽은 후 미운 오리 새끼로 자라야 했고 콤모두스는 어머니의 복잡한 사생활로 어릴 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두 사람은 따지고 보면 애정 결핍 자다. 또 학문보다 오락과 사냥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성적으로 광기를 보이는 경우 유년기 때 애정 결핍(愛情缺乏)을 겪었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피 맛을 느끼기 전엔 두 사람 다 살인마(殺人魔)는 아니었다. 연산은 신하들에게 무시를 당한다는 생각에 분노를 나타내곤 했다. 특히 사림의 간언(諫言)이 그의 숨통을 옥죄며 피로도가 증가했다. 콤모두스는 누이 루킬라가 보낸 자객의 말 중 “원로원의 칼”이란 말에 원로원과 고관들에 대한 공포와 증오심을 갖게 됐다.
연산은 사냥을 즐겼고 콤모두스는 검투 경기와 맹수 사냥을 즐겼다. 심 저엔 나약하고 연약한 자신을 감추고 외형적으론 강한 모습을 나타내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또 자신들보다 뛰어난 인재의 말을 자기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거나 무시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증오했고 또 그들이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심 저에 내재된 열등감을 만회하려고 했다.
두 사람 다 자신들이 가장 총애(寵愛)하고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최후의 일격을 당하고 죽거나 보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역심을 품은 최측근의 공통점은 군주의 변심(變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들은 유년기 애정결핍과 심 저에 내면화된 열등감이 전자는 음란(淫亂)한 성애(性愛)를 후자는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에 대한 증오심(憎惡心)으로 살육을 놀이처럼했는데 그들의 미약한 마음을 충동질하는 아첨꾼이 등 뒤에 있었다. 간신(奸臣)들은 제왕의 혀 노릇을 하면서 자신들의 사익을 챙겼고 부정한 재물은 민중의 피와 눈물의 결정체(結晶體)였다. 또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은 간신과 어리석은 군주에 의해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