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아베가 부르는 제국주의의 망령(亡靈)

해암 송구호 2019. 7. 8. 07:00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가 중 상반된 길을 걷고 있는 두 나라가 있다. 일본과 독일이다. 독일의 히틀러는 나치당을 창당할 때 공공의 적으로 유태인을 지목하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할 종족이라며 유대인 인종 청소를 주창했다. 당시 독일은 높은 실업률에 물가 폭등으로 공황(恐慌) 상태에 빠져들었고 궁핍함을 견디지 못하는 악 받친 대중을 하나로 모으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공의 적을 만들어 대중을 결집하는 것인데 바로 그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600만 명이 나치당에 의해 희생(犧牲)이 됐다. 동유럽 여행 중 들린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태인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한눈에 똑똑히 볼 수 있도록 기록물, 삶의 공간, 화장터 등이 전시돼 있었다. 이곳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것 중 하나가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 여성의 변해가는 모습이다. 처음 사진은 지금이라도 눈앞에 있다면 설렐 것 같은 아름다움이 물씬 풍겨나는 모습이 수용소에 끌려와 머리가 깎이면서 성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상태가 되자 이성적 매력은 떨어졌지만 눈과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에 눈길이 갔다. 요즘 커리우먼의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그 후 그녀가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굶주리고 비인간적 대우를 받는 과정에서 일그러진 모습의 사진 앞에 서자 방금 전 보았던 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감정의 변화가 생겼다. 퀭한 눈과 뼈가 드러나는 몸매는 말기 암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고 그녀의 고통이 전해져 와 마음이 아팠다. 이성의 끌림은 일순간 사라졌고 연민(憐憫)이 가슴을 후벼 팠다. 성적 매력을 지녔던 여인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끼게 하는 여인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면서 "아름다움이란 것은 허상(虛像)에 불과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독일 여행을 하면서 베를린 한복판에 있는 「유대인 추모공원」에 갔었다. 가이드는 땅값을 들먹이며 독일 정부가 과거 히틀러의 만행에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때마침 공원에 갔을 때 선생님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유치원 아이들에게 현장학습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공원은 크기가 다른 직사각형의 화강암 돌이 즐비(櫛比)하게 놓여 있는데 관(棺)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나치당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의미 뿐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후손들에게 알리는 교육장소로 소용(所用) 됐다.

 일본엔 1급 전범의 위패(位牌)가 모셔진 신사가 있다. 과거엔 정치인이 이곳에 가는 것이 금기시됐지만 극우세력이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정치인들이 한, 두 명씩 개별적으로 찾기 시작하다 아베 총리가 집권하면서 공식적으로 각료들이 신사를 찾아 참배를 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제 2차 세계 대전 패망으로 잃었던 것 중 하나가 대외적 군사 행위 금지였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벌이면서 미국은 일본을 우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본 군의 무장 허용과 동북 아시아의 경찰 임무를 부여했다. 

한편 일본은 자국의 헌법을 바꾸는 작업과 함께 항공모함을 비롯한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 초계기가 우리 함정에 도발한 것도 은연중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힘은 곧 정의다.라는 말이 국제사회에서는 불문율처럼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일본을 파트너로 선택한 것과, 과거 이승만 정권을 남한에 수립할 때 미 군정이 친일 세력들을 다시 기용한 것은 서로 다른 상황이긴 하나 미국이 취하는 태도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대상국에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문제에 접근하려는 경향이다. 

 일본은 주변국과 영토분쟁을 끝없이 제기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 한국을 상대로 하는데 이들 나라는 일본의 침략으로 한때 일본 군에 의해 강점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독도, 조어도, 쿠릴열도 등으로 활화산처럼 현재 진행형일 뿐 아니라 미래에까지 파급효과를 끼칠 것은 자명하다. 국정 교과서에 분쟁 지역이 자국 영토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은 후세(後世)에 침략의 유전자를 심어주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5.16 군사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 재건과 헐벗고 굶주림에 시름하는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것이 쿠데타의 성공을 판가름할 열쇠였다. 세계 각국에 차관을 빌려보려고 했으나 선뜻 빌려주겠다는 나라가 없었다. 그때 국제 정세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의 우방이던 소련이 적대국으로 돌아서면서 중국도 공산화가 되자 미국으로서는 이념의 대척점에 놓인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고 식민지 배상의 의무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태도를 주문해서 1965년「 한일 기본 협약서」를 체결하게 됐다. 

 당시 일본은 우리 정부에 "조선에 남겨 놓고 간 사유재산에 대한 역 청구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배상에 대한 협상이 진척되지 않았고 양측의 입장만 확인할 뿐이었다. 또 강제징용 배상과 위안부 배상을 일본 정부는 개별 배상을 주장했다. 한국 내에서는 그들을 부역 매국노라며 손가락질 하던 때라 설령 일본이 개별 보상을 하겠다고 하더라도 신분 노출을 꺼리던 사람들이 배상 청구를 할 지 미지수 였다. 

 박정희 정권은 전 정부에서 추진해온 협상을 완전히 폐기하고 일본 정부에 일괄적인 협상을 요구했다. 강제 노역과 위안부의 보상도 큰 틀에서 협상이 진행되었던 것 같다. 당시 혁명군은 일본에서 받은 배상금으로 포항제철을 짓는 등 산업 육성과 재벌 기업에 저리로 돈을 대출해줘 경제 발전의 속도를 내려는 속셈이 있었다. 

 독일은 희생된 유대인의 유족을 찾아가 사죄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재정적인 지원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데 반해 일본은 미국의 강압에 못 이겨 "식민지 배상 대책 회의"에 응했고 일부 경제 지원금을 우리 정부에 제공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3공화국에 우호적이던 기업에 특혜를 주어  기업이 급성장을 이루게 되면서 재벌이 탄생하게 됐고 국내 경제는 뻥튀기를 한 것처럼 급성장을 했으나 하부 구조가 부실한 기형적 경제 구조를 통해 계층 간 빈부의 격차만 양산하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국가 주도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관 주도하에 밀어붙인 경제는 초기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오늘날 제4차 산업 진입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일부 재벌기업의 주도로 이뤄진 성과라서 국민 경제는 제자리에 멈춰 있거나 소외된 기형적 발전으로 국민의 행복 지수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종속된 채 채산성을 맞출 수 없게 됐고 자영업도 이윤 창출이 기대되는 부분은 재벌의 방계 가족들이 선점한 상태며, 골목 상권도 일인 인터넷 방송과 TV프로그램을 통해 맛집으로 소문난 집에만 사람들이 몰리는 쏠림 현상으로 녹녹치 않은 상황이다.

 친일 인사로 꼽히던 대표적 인물 중 김 종필과 박 태준이 있다. 일본과 식민지 배상 문제를 협의했던 인물이다. 그들이 생존 중엔 조율이 가능했던 외교 문제지만 이미 둘 다 작고하고 없다. 분명한 것은 양국 간 협약을 한 사항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배상 문제에 대한 시각 차이와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일관성을 잃어 양국 간 감정의 골만 깊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서 받은 배상금을 유용해 경제 부흥을 이루는 성과로 군사 혁명의 내부적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강제 징용자와 위안부에 대한 복지 및 피해 배상을 외면하면서 개인의 문제가 정치적 논쟁거리로 비화됐고 더 나아가 한일 간 감정으로 고착되고 말았다. 기금의 혜택을 본 포항제철과 수혜를 받았던 대기업들이 이익의 일부를 출원해 독립 유공자, 강제 징용 피해자, 위안부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대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본도 물질적 보상은 차치하더라도 과거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반성과 향후 더 이상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중요한데 틈만 나면 분쟁의 빌미를 만들고 주변국과 대척하려는 태도는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특히 아베 정권의 우경화는 과거 제국주의 망령을 되살리려는 간악(奸惡) 한 도발로 보여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국채 보상운동은 일본이 우리에게 계획적으로 채무를 지우고 경제적인 침략을 감행할 때 국가에서 진 채무를 백성들이 성금을 모아 갑아 보겠다고 해서 시작된 운동이다. 1997년 금 모으기 운동도 국민의 자발적 행동으로 국가부도 사태를 막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때 모아진 금은 기업회생 자금으로 쓰였지만 그후 위기에서 탈출한 기업이 국민을 위해 보답하려는 그 어떤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국난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사태의 심각성에 이르기까지 수수방관만 하던 위정자들이 상존해왔다는 사실이다. 매번 극한 체험을 하면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처절한 반성과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있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에 대한 어느 일인 방송자가 던진  "일본 물건을 안 쓰면 국산품을 못 만든다는 뼈있는 말"이다. 일본과 우리는 어른과 어린아이처럼 기술적, 경제적, 군사적 격차가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린 그들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과거 침략으로 당한 적개심(敵愾心)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반일 감정으로 고착됐고 나의 능력을 키우는 것엔 등한시 한 채 그들의 능력마저 폄하하고 분수 없이 굴어온게 오늘의 사태를 불러온 게 아닌지 자성(自省) 하게 된다. 

 싸우더라도 상대방의 실력을 간파하고 허점이 무엇인지 찾아낸 후 한방을 노리는 것이 쌈꾼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란 말처럼 적을 알고 나를 알 때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현 정부의 무사안일(無事安逸) 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너 자신을 알라. 우린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른다. 아마 안다면 이런 사태를 만들지도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