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집회의 자유인가, 방종인가?

해암 송구호 2018. 6. 3. 17:03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점점 팍팍해져 가고 있다. 물가는 천정부지(天井不知)로 오르고 경제의 골은 깊어가고 있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나라 !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한, 정부의 "소득 주도 정책"에 빨간불이 켜졌다. 젊은이들의 실업율 또한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들은 호강을 누리고 있는데 반해 실업자나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세상 살기 힘들다는 말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깨는 축 처진 채 말 수는 줄어들고, 자신의 미래가 암담한 만큼 삶에 매사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현재 초등학교에 학생 수는 미래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과 무관치 않다. 누가 이 땅의 주인으로 살아갈지 암담하기만 하다. 국가 요소 중 가장 근본이 되는 인구의 소멸은 국가의 자멸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스에서 용맹한 군인들로 유명했던 스파르타도 결국 인구의 절멸로 멸망하고 말았다. 베이비 붐 세대가 노령기로 접어들게 된 우리나라는 성장보다는 소비 중심 사회로 급변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위험을 알리는 시그널이 곳곳에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노인들이 종로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선동자가 아주 과격한 발언을 쏱아내고 있었다. "문재인 빨갱이, xx를 때려 x자."는 충격적인 발언을 서슴 없이 했다. 외국인들이 가던길을 멈추고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기가 찬 표정을 지으며 어이가 없어 멍때리고 있다가 혀를 "끌끌 "차며 깊은 한숨을 몰아 쉰다. 토요일 오후 종로 낙원상가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행렬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몸도 가누기 어려운 노인들로 노구를 이끌고 시위행렬을 따르는 것도 이색적 이었다. 물론 태극기는 이들의 손에 들려져 자유를 잃고 흐느적 거리고 있었다. 아마 이들은 매주 토요일마다 의례적으로 시위에 동참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과거 정부 때 시위 참가비를 받았던 향수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속된 전직 대통령의 석방을 주장하고 있는 시위 선동자의 발언은 현직 대통령에 대한 모욕 죄를 넘어 국가 반란 죄로 다스려야 할 것 같은 말 폭탄을 쏱아 내 시위를 지켜본 국민을 분노케 하고 있다. 더욱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뒤 따르는 경찰들을 보면서 자유의 한계는 어디까지고 공권력은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 것일까? 란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시위 때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우리는 올바른 소리를 들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이런 터무니 없는 소리에 국민들이 불쾌감을 느껴야 하고 국가의 수반을 동네 똥강아지 부르듯 하찮게 입에 올리는 것이, 과연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태극기 시위를 보면서 얼마전 대법원장과 전직 대통령이 짬짜미를 해서 국정을 농단한 사건이 떠올랐다. 나라를 망쳐도 제대로 망쳐놨다. 어디 성한 구석이 있던가? 오염된 국가의 제도와 원칙들을 어떻게 되 살리고, 바로 세워야 할까를 놓고 고민해야 할 마당에 그들의 시위는 눈꼴시럽다. 이치에 맞지도 않고 또 선동자의 말은 대중을 향한 설득 보다 자기 감정 분출로 여겨진다. 이런 시위가 매주 도심 한 가운데서 벌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 대통령직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닐터,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라면 남양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머리털이 다 뽑혔을 텐데, 아니 혀가 뽑혔을 지도 모르지.  

 6월 2일 강남 한복판에서는 여성 상의 탈의 시위가 있었다. "내 몸은 음란물이 아니다"가 그들의 주장이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 모 사진 작가가 여성의 나체(裸體) 사진을 인터넷 상에 공개해서 피해 당사자로부터 고소를 당한 직후의 일이다. 가끔 광고물을 보면서 여성 모델이 쌕시한 표정과 몸짓을 보일 때 남성인 난 이런 것은 남성을 상대로한 성 폭력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스스로 제기한 적이 있다. 

  미투운동과 더불어 성은 이 시대에 가장 뜨거운 아이콘(icon)이다.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의 '단오 풍경'을 보면 여인들이 목욕을 하는 것을 몰래 엿보는 남성 둘이 있다. 요즘에 그러다 붙잡히면 감옥에 갈터지만 당시 젊은이들은 여자들의 내밀한 부분을 훔쳐보며 성적인 욕구를 채우려 했던 모습을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다. 동네 아낙들이 신혼부부가 합궁하는 방의 문풍지를 뚫고  몰래 훔쳐보는 모습도 요즘엔 상상 못 할 일이지만 과거엔 그저 동네 어른들의 호기심으로 치부됐던 일이다.

   조선시대는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 해서 남녀가 함께하는 것을 금했다. 그렇다보니 서로 대면만 해도 이미 심장이 벌렁거리고 각자 성이 발동해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맥박 질에 땅바닥에 주져앉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남녀가 손이라도 잡는 날엔 몸 버렸다는 말을 하고 둘의 결혼을 당연시 했다. 

  현대는 우선 의복에서 노출이 자연스러워졌다. 과거에 여성이 외출을 할 때는 걷치마 처럼 생긴 장옷과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신윤복의 '월하정인'에서 그 당시 여인의 모습을 볼수 있다. 노출이 심한 현대에 와서는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더욱 내밀한 곳까지 드러내거나 남성의 성을 자극할 몸짓을 통해 몸을 상품화 해왔었다. 광고물과 음난물이 대표적 사례다. 백주 대낮에 여성들이 자신들의 몸은 음난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웃통을 깐 모습에서 대중은 그들이 전달하려고 한 뜻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을까?

  내가 어릴 때 동네 우물터에는 아주머니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와 물을 길어 날랐다. 당시엔 치마 저고리를 입었는데 요즘 브레지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가슴띠(흰 광목 띠)를 둘르고 나오지만 물동이를 붙잡고 가다보면 젖가슴이 밖으로 드러나곤 했다. 동네 아낙 모두가 그런 모습으로 다니다 보니 으레 그런 것으로 여겼고 성적 호기심은 전혀 발동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밀림지역엔 아직도 남녀가 자연의 옷을 걸치고 살고 있다. 그들에겐 벌거숭이 몸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줍거나 부끄럼을 타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논하면서 가려진 가슴을 드러내는 그들의 용기는 이를 지켜보는 남성들에겐 추락한 성을 보여준 것과 같다. 성은 감추고 가려져 있을 때 신비스럽고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 노출 된 가슴은 한낱 비게 덩어리에 불과하다. 도심 한 가운데서 벌인 헤프닝은 폐미니즘과 성 평등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볼품 없는 나를 세상 밖으로 내 던진 것에 불과하다. 성은 감출 때 아름답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과거와 비교할 때 성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해졌다. 혼전 성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유럽사회는 남녀가 교재를 하게되면 으레이 성관계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서로 마음만 맞는다면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로 동거도 한다. 법적인 부부가 될경우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책임이 크기 때문에 평생을 그렇게 사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아기를 출산하게 되면 법적인 부부가 되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혼전관계에 반대하는 부모가 많다. 외국의 경우 성인이 되면 경제적 독립은 필연적이므로 남녀관계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은 도를 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성인이 돼도 부모 슬하(膝下)를 벗어나지 못한 캥거루족들이 대부분이다. 경제적 의존관계에 놓인 상태에서 이성 간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을 부모는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다. 

  부모 입장에서 가장 큰 우려(憂慮)는 책임질 수 없는 아이가 생겨날 경우 그 아이의 육아를 본인이 떠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성적 호기심으로 관계를 한 경우, 남자는 뒷감당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크기때문이다. 그래서 성(性)은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할 준비가 됐을 때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겪고 있는 갈등요소 중 하나는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이 공공성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분별한 시위문화는 다수의 시민에게 또다른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또 무분별하게 서양의 성문화를 모방하기 앞서 서양문화의 바탕아래서 성을 바라보는 것이 젊은층에 먼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닐지 묻고 싶다. 경제적 자립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동물들도 성채가 되면 부모의 영역에서 독립한다. 어미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자식을 자기 영역에서 내쫓는 것을 이율배반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지극히 당연한 처사다. 임신 후 포육(哺育)의 시기를 끝내고 완전한 성채가 되면 먹이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다. 포육 과정이 종족 보존이라는 신의 영역이라면, 성채가 된 후 먹이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는 자연의 영역이다. 어미는 성체가 된 자식을 자연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경쟁자로 바라볼 뿐이다. 

 고등동물로 자처하는 우리는 정이란 끈에 묶여 미성숙아를 양산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식은 떠날 때를 알아야 하고, 부모는 내쫓을 때를 알아야 한다. 시기를 모르니 죽을 때까지 개고생하지. 자식 하나로 모잘라 그 자식의 새끼까지 얹어서 봐주면서 끙끙대는 것을 보면, 이게 사랑인가?  미련한 짓인가 헷깔릴 때가 종종있다. 이것을 일종의 보험으로 생각하는 고등동물(苦等動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