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해암 송구호 2017. 9. 10. 11:03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는 16세기 서양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이다. 중세 모든 사상이 신학으로 점철(點綴)돼 있을 때, 인간의 자각(自覺)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이 열렸다. 그중에 자연을 관찰하고 경험 값을 통해 과학적 사고와 시야를 확장시키는 것을 경험주의 철학이라고 한다. 사유(思惟)를 본질로 하는 정신(精神)과 연장(延長)을 본질로 하는 물질(物質)을 구분함으로서 이원론적 체계를 펼쳤다. 연장이란 공간을 차지하는 모든 물체를 연장이라 칭한다. 이러한 사유체계는 신의 손에서 인간의 손으로 이행(移行)되는 변화를 맞게 된다. 신을 부정한 인간은 사유와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과 가설을 세워 연역법으로 증명하고 논리를 정연화(井然化) 시켜가면서 진보를 거듭해, 과학의 발전을 견인(牽引)했고 오늘날 인간이 사이버 공간, 인공지능 로봇 등을 만들어 인간이 조물주 노릇을 하는 세상을 열었다.

  만약 중세시대 종교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인류 문명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며 종교의 덧에 갖혀 꼭두각시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요즘에도 일부 사이비 종교는 인간의 정수를 송두리 채 뽑아 낸 뒤,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육체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종교는 아편과 같은 중독성을 지녔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교리의 핵심은 인간이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는 순간, 죄악에 빠져 사후세계의 안녕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무신론자들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지옥행 열차를 타야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주변에 둘러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더욱 선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반면 종교를 믿는자 중 일부는 위선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한 것은 선한 삶을 지향하고 실천하는 자가 누구며 그의 삶에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모든 이에게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가정할 때 선한 행동은 천사가, 악한 행동은 악마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내적 갈등을 겪고, 각자 스스로 사고하고 발현(發顯)한 결과가 행동으로 옮겨지면 선택한 결과 마다 선 한자가 되기도 하고 악 한자가 되기도 한다.  

  만약 인간의 정신계를 지배하는 어떠한 영역(領域) 내에 인간을 관통하는 주관자가 존재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범하는 행위에 대한 평가는 일정한 값을 유지할 수 있다. 선한 것이나 악한 것들을 측량하는 주관자는 유일(唯一)하고 저울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은 누구에게나 균일한 신성(神聖)이 존재하므로 모든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최소한 나의 몸을 대하듯이 말이다. 

 기독교에서 내세운 논리는 사랑이다. 비약하면 그 사랑은 모든 인간에 내재 된 신을 향한 존경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도둑이든 거지든 그들의 내면에 임재 한 신의 질량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재라면...

  혹시 이런 경험 해 본 적이 있는지?, 누군가 나에게 아주 못되게 굴어 꼭 응징을 해주고 싶었는데 법 때문에 그런 울분을 억지로 삭인 경험. 나는 직장에 다닐 때 그런 억울함을 여러 차례 겪었는데 우연일지 모르겠지만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불행을 겪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석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던 중 비슷한 사례를 다른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신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다"였다.

  내가 잘 아는 사람 중에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위선적이고 교만하기가 이를데 없는 자가 있었다. 항상 자기가 최고여야 하고 남들은 자기 발바닥의 때만도 못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의 오만함이 하늘에 닿았던지 그녀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자식들을 통해 시련을 주고 깨닫게 하려는 절대자의 채찍이 내려졌다. 그녀의 아들이 아기를 갖지 못하다, 뒤늦게 얻었는데 성이 불 명확한 중성으로 태어나 마음고생을 했다. 그런데 딸마저 최근 암에 걸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이 내리는 형벌은 엄혹(嚴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 다닐 때 후배는 양성(兩性)의 자식을 낳았는데 초등학교 다닐무렵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고 목소리도 여성의 색깔을 드러내는 등, 점점 여성의 성징을 보이자 고심 끝에 남성의 성기를 제거한 후 여아(女兒)로 만들었다. 그후 그는 아들을 얻기위해 병원에서 임신중절 4번만에 예쁜 아들을 얻었다. 돌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너무 예쁘고 귀여워 안아주면서 그동안 아들을 얻으려했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줄 알고 축하해 줬었다. 그런데 신은 그에게 짧은 순간의 행복을 맛보게 한 후 가혹한 형벌로 징치(懲治)했다. 귀엽고 예뿐 아들이 말도 배우기 전 소아암에 걸렸다. 말못하는 아이는 통증에 짐승처럼 울부짖었고, 고통을 토해낼 때마다 부모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해야만 했다. 신이 준 선물을 뿌리친 결과는 잔혹한 고통 뿐이었다. 

 기독교가 싹트기 전, 로마 시대의 경우 사치와 타락이 극에 달했다. 특히 성적 타락은 도를 넘을 만큼 난잡(亂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후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억제할 조절 장치조차 작동하지 않았다. 종교는 인간의 방종에 경종을 울렸고, 사후 세계에서 인간 행위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교리를 설파하기 시작하면서 무절제 한 생활에 빠져 있던 인간들은 그 굴레에 갇히게 되었고 도덕과 양심이란 가치를 만들어 자신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모든 행위에 대한 이승의 심판이 있는 게 아닐까? 반문하고 되짚어 보게 된다. 특히 누군가로부터 법으로 해결할 수조차 없는 작지만 마음에 담아두면 두고두고 화가 날 때 가해자에게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 경우 하늘에서 심판이 내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모든 이에게 균일한 신성(神性)이 존재한다면 누구나 서로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할 이유가 있다. 신의 생기로부터 인간의 생명은 시작됐고, 우주 질서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교만함은  가시와 같아서 상대방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신의 간섭이 존재 할 경우 교만은 신성을 자극하게 되므로 필연적 징벌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은 신하들에게 "입은 화의 문"이라는 말을 했다. 서양 금언에도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다. 말은 때로는 칼보다 더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칼은 육체를 베지만 말은 인간의 영혼(靈魂)을 베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마음 아프게 한 일이 없는지 되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