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양 결혼 의식 속에 담겨진 이야기

해암 송구호 2017. 8. 24. 14:54

로마시대 결혼식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평민보다 귀족사회에 결혼은 정치적 연대(聯隊)의 성향이 컸다. 가문과 가문이 결합해서 사회적 권위를 높이고 보다 높고 귀한 혈통과 혼맥(婚脈)을 형성해야 가문이 빛이 나고 정치에 참여해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또 라이벌 관계에도 정략적인 혼인을 해서 상대방이 적으로 돌아서지 않도록 경계했다. 결국 딸은 아버지의 정치적 교두보(橋頭堡) 역할을 하는 도구였고 정치적 연대가 무너지면 파혼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서 정략혼 관계를 유지했다. 어떻게 딸의 생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럴 수 있나?

로마는 가정(家庭)에서 가장의 영향력이 셌다. 가부장권은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우선 자녀를 출산하면 유모는 아이를 가장인 아버지 앞으로 데려갔다. 아이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버지의 판단에 달렸다. 당시는 아이를 임신하면 신탁(神託)을 하는데 그 아이의 운세가 좋지 않게 나오면 죽이거나 밖에 내다버렸다. 가장이 가부를 결정하는데 양육 허락이 떨어진 아이는 비로소 젖을 물수 있었다.

아이가 성장해 여자의 경우 14세에서 15세가 되면 자신보다 20세에서 25세 많은 아버지뻘의 남성과 혼인을 하는데 대부분 정략혼으로 여자는 씨받이 역할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할 때 남편은 여자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딸을 내손에 넘겨주라고 청(請)하는데 요즘 결혼식에서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입장하다 신랑에게 넘겨주는 의식으로 가부장권(家父長權)의 인계를 의미한다. 가부장권은 곧 당신의 딸의 생사여탈권을 내게 주시오라는 의미로 실제 아우구스투스황제가 집권하기 전인 공화정 시대는 남편이 아내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고있었다. 아내가 외도를 하다 발각되면 그자리에서 죽였다. 이때 정부를 함께 죽이지 않으면 살인으로 간주되었다. 바람난 아내를 어떻게 구별했을까?

유럽사회는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악수보다 키스를 더 많이 한다. 쪽쪽 소리를 내기도하고 한번이 아니라 서너 번씩 해서 친밀감을 드러내는데 유래를 따지고 보면 겁이 덜컥 날 것이다. 로마사회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삶의 일부분과 같다. 주로 원액보다 물에 타서 마시는데 품격을 중요시하는 귀족 집안에서는 여자는 원칙적으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창녀(娼女)나 주점에서 일하는 여성은 예외다. 남편은 아내의 볼에 키스를 하면서 포도주를 마셨는지 확인하는데 술을 마셨을 경우, 극단적인 경우 아내를 죽였다. 죄목은 음탕(淫蕩)죄였다.

로물루스가 BC 753년 로마를 세울 때 로마의 시민은 보잘 것 없었다. 범죄자와 노예 등 사회 낙오자들이 대다수를 이뤘는데 로마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들이 결혼을 해서 2세를 낳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이웃 부족국인 사비니아족을 축제에 초청해 술을 진탕 먹인 후 그들의 딸을 약탈해 아내로 삼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사비니아 여인의 납치“사건이다. 그런 사건이 있고 3년 뒤 로마와 사비니아족이 전쟁을 벌였는데 임신한 딸들이 나와서 중재를 해서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요즘도 서양에서는 신부를 안고 침실 문턱을 넘는 풍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비니아 여인의 납치 사건“을 의미하는 풍속이 전해져 내려온 결과다. 이 사건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해 많은 그림이 전해져오고 있다.

로마는 혈족과 혈통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금 수저와 흑 수저는 출생과 동시 삶이 결정지어졌다. 부(富)는 정치를 하는데 필요한 요소로서 주로 귀족들은 대농장을 갖고 있었다. 유산자의 재산은 곧 자신의 국가경영에 영향력을 의미했다. 투표를 하더라도 부의 규모만큼 투표수를 갖게 되니 무산자의 머리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결혼은 돈과 권력을 쫒는 자들의 레이스였다. 무산자들은 나라에서 주는 밀 배급을 받아 겨우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가부장권은 아우구스투스 때 이후로 아버지에게 존치되었다. 따라서 남편이 아내에게 대한 절대적인 생사여탈권한이 사라지면서 이혼율도 높아졌다. 양자가 증인 앞에서 파혼을 선언하면 끝이었다. 당시에는 현세의 쾌락이 극선(極善)이었다. 기독교가 들어온 312년 이후는 사후세계가 현세를 지배하게 되면서 쾌락주의는 종적을 감추게 되었지만 이전에는 쾌락과 타락 그리고 사치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문란한 성관계는 극에 달했다. 집밖으로 외출을 못했던 공화정 시기에는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애인을 찾았지만 외출이 자유롭게 되고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자 여자들이 남자사냥에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검투사를 애인으로 둔 귀족부인, 추파로 남성을 꼬드기는 여인, 심지어 창녀촌을 드나드는 여인까지 성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여자들이 남편을 떠나 바람을 피우는 데는 당시 결혼에 문제가 있었다. 사랑보다 돈과 권력에 치중했고 가부장권에 의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 하는, 전혀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은 불행한 결혼이었다는 점이다. 배우자는 늙고 매력이 없었다. 부부생활도 여자가 몸을 움직이면 남자를 아는 여자라고 해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옷도 벗지 않아야하는, 말 그대로 씨받이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는가? 실제로 그들의 분노는 로마정부가 법률로 여자의 정조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에 강력히 저항했는데, 정부 규제에서 창녀는 제외되는 점을 알고 필부(匹婦)들이 창녀가 되겠다고 등록하는 초강수로 맞섰다. 그후 로마 사회도 여성의 인권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결혼은 곧 출산으로 이어지던 과거와는 다르게 변화되고 있다. 씨받이로 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자신들의 삶에 자녀가 걸림돌로 작용하면 임신을 포기한다. 가임여성 백만 세대인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다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돈 몇 푼으로 환심을 사려는 당국자들의 정책은 다시 한 번 돌아보기 바란다. 국가의 근간은 국민이고 인구증가는 국력의 상징이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인구 감소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돈 많은 사람들의 자각(自覺)과 사회에 기여를 기대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다. 사회복지는 돈 많은 사람들의 통 큰 기부와 정부가 콜라보(collaboration)를 이뤄 만들어 가야 한다. 경제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길은 나누고 공유하는데 있다. 힘 없는 서민들의 유리지갑을 건드리다 보면 궁극에 가서 국가  재정이 파탄난다. 백성이 가난해 지면 그 나라는 쇠락(衰落)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