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5 일째 : 시베니크, 스플리트, 메주고리예, 모스타르, 네움.
여행 중 숙소는 도시로부터 고립된 섬처럼 외딴곳에 위치할 때가 많다. 이곳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곳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보존가치가 있는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모든 건물은 폐허(廢墟)가 된 채 방지인지 존치인지 모르지만 보기 않 좋은 상태로 섬뜩함을 자아내게 했다. 여행사를 통해 묵었던 호텔은 도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우선 저렴하고 여행객을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언어벽에 막혀 주변에 시내가 있다고 해도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인솔자 말로는 인근에 아드리아 해변이 아름답고 또 택시로 10분 거리에 해변 도시 스플리트가 있다고 하지만, 언어 장벽에 꼼짝못하고 숙소로 돌아간다. 호텔은 외관은 화려하지 않다. 내부에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눈길을 끈다. 특히 계단은 원목으로 만들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오늘은 감옥과 같이 오도 가도 할 수 없는 숙소에서 어쩔 수 없이 잠이나 청해야 할 것 같다.
유럽은 끝 없는 지평선이 펼쳐지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발칸은 눈이 닫는 곳 어딘가에는 산맥이 펼쳐져 있다. 산맥은 알프스로 이어지기도 한다. 과거 아프리카 판과 유럽판이 부딫히면서 융기한 것이 발칸산맥이라고 한다. 이나라 말로 발칸은 산맥이라는 뜻을 지녔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의 눈섭 끝부분에 해당하는 도시로 아드리아 해변이 펼쳐진 아름다운 휴양 도시다. 과거 이곳 출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되었고 동로마 서로마로 분할 통치를 하다가 부제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자신의 고향, 스플리트에 궁전을 짓고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생전에 기독교를 박해했는데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사후에 무덤마져 파헤쳐져 어느곳으로 옮겨졌는지 모를 만큼 기독교도에 의해 철저히 외면 당했다. 공교롭게 그의 뒤를 이은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다 .
로마의 5현제가 끝나면서 로마의 융성도 끝이 났다. 혼돈기 세베루스 왕조의 때에 흉노족이 남하하면서 도미노 현상처럼 게르만족의 이동을 가져 왔고 국경선 밖에서 싸우던 로마는 자국 영토에서 적들과 싸워야 했다. 국토는 황폐하게 되었고 유민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직업군인들은 자기세력화를 꿰하게 되면서 경쟁하듯 반란이 일어났고 자신들이 모시던 장군을 황제로 추천해 나라는 극도로 혼란했고 국력은 점점 약화돼 갔다. 이 과정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이 끊이질 않았는데 대부분 황제직에 오른 후 1 ~2년 이내 죽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보호막이 될 부제를 선임해서 권력투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고 재임기간 중 황제의 자리를 물려 줘 죽음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기독교를 박해(迫害) 한 죄(罪)로 사후(死後)는 보장 받지 못했다.
가톨릭은 종교의 교리에서 벗어나 우상과 이적을 믿는다. 로마시대 다신교를 믿었던 뿌리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성인을 세우는 것도 로마시대의 종교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 메주 고리예도 성모 발현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성 야곱 성당과 치유의 청동 예수상이 있다. 메주고리예는 슬라브어로 산과 산 사이의 지역이란 뜻이다. 1981년 6월, 6명의 아이가 마을 외곽의 크로니카라는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해서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고 한다. 종교가 다르거나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에게는 황당할 수 있다. 우선 마리아의 모습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가 그인가? 또 왜 그곳인가? 가끔 불교에서 불상에 피는 우담바라로 절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서 신도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것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는 것은 아닐까?
치유의 청동 예수상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 중 하나다. 청동 예수상의 종아리에서 이따금씩 땀이 흐른다고 한다. 소원을 빌면서 땀을 닦아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다. 블레드 호수 중앙에 위치한 성당은 소원을 비는 종이 있었는데 종교가 지역 상인의 농간에 희생(犧牲)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이 그렇게 가벼울 수 있다면 신은 이미 죽었다.
보스니아의 모스타르는 보스니아인들에게는 아픈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비극의 장소다. 보스니아 내전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인종과 종교가 뒤엉켜 패권다툼을 한 것이 주요 골자지만 현재까지도 한 마을 내에서 남보다 못한 사이로, 서로 반목하며 살고 있다. 모스타르는 내전 발발시 대포를 맞고 붕괴된 다리를 복원해 놓았는데, 강에 떨어져 있던 파편들을 잠수부를 동원해 모아서 그 조각들을 맞춰 원래의 모습을 되 찾았다는데 찢겨진 마을 인심은 싸늘하게 식어 있다는 것이다. 다리는 이후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 파리도 낙상할 만큼 바닥이 미끄럽다.
이곳은 그리스 정교회와 이슬람교가 강을 사이에 두고 사는데 과거 내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서로 뒤엉켜 살면서 친구로 지냈던 사람들이 내전 후엔 각자 종교를 믿는 곳으로 이사해 반목하며 지내고 있다. 보스니아는 보스니아계 48%가 이슬람교, 세르비아계는 37%가 그리스 정교회, 크로아티아계 14%가 가톨릭을 믿고 있고 유고 분리독립이 일어나던 1990년대 초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분리 독립을 추진하다 보스니아계의 반발로 내전에 발발(勃發)했고 인종청소란 미명하에 무고한 보스니아계 남자들의 학살과 가임여성에 대한 성적인 폭행으로 혼혈아를 임신케 하는 등 잔인한 방법으로 세계를 경악시켰고 유엔이 개입하면서 내전은 종식되었으나 감정의 앙금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다.
지금은 유엔의 중재로 1국가 2체제로 운영 되고 있다. 복잡한 전쟁 이야기는 길개 하면 머리만 아프다. 메주고리에서 모스타르를 향해 가던 중 북한 김정은이 손을 흔드는 대형 광고판을 보고 일행들이 기겁을 한다. 남과 북을 상대하는 나라라서 그렇겠지만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모스타르에 가까워 지자 마을 건물은 벌집처럼 움푹 움푹 패어 있다. 내전의 흔적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건물은 벽에 패였던 자국도 메우고 새롭게 도색까지 마쳤지만 아직 일부는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유고연방은 구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던 독자적인 공산주의 국가로 유럽사회도 인정할 만큼 경제적 발전도 이룬 나라였다. 그러나 티토가 1980년 8월 급작스럽계 사망하면서 유고를 이끌 후계자가 세워지지 않아 내분이 일어났는데 민족주의가 유고 연방 해체의 가속화를 가져왔고 보스니아 내전의 경우 종교와 인종이 뒤섞여 갈등의 폭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종교는 인류에게 가장 혹독한 재앙을 남겼다. 그들이 주장하는 사랑은 미움으로 가득찼고 피를 부르는 전쟁을 끊임 없이 하고 있다.
중동의 IS도 세계를 향해 끊임 없이 테러를 저지르고 있다. 종교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 토인비는 역사의 생성과 소멸 과정에 번데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라고 말한다. 역사의 쇠퇴기에 종교가 등장해서 가장 번성기를 누리는 것도 어찌보면 인간의 허약해진 심리 상태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종교가 가장 커다란 피를 부르고 그 피 값으로 큰다는 것은 괴물과 다를게 없다. 인간은 그 불놀이 판에서 제몸이 타고 재가 되는 것 조차 신의 영광이라며 내세를 꿈꾸는 것은 비극이다. 종교라는 괴물에 더이상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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