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후기

스페인 유람기

해암 송구호 2016. 4. 27. 09:14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것이 투우다. 붉은 천을 흔드는 투우사를 향해 황소가 콧바람을 뿜어대며 돌진하는 모습은 스페인 투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투우사의 복장과 투우에 사용되는 기구들도 투우에 열광하는 관중들도 하나 같이 스페인을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인종, 종교, 건축물 및 문화의 다양성이 내재된 나라다. 공교롭게도 여행을 시작하는 기간이 부활절을 앞둔 세마나 산타(Semana Santa)축제 기간으로 상점은 철시해 텅 비어 있고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관광을 하는 사람들이 성당 주변에 운집해 있었다. 전체인구의 95%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스페인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한 가톨릭국가다. 성탄절과 함께 가장 큰 축제기간으로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을 Holy Week(聖週間)라 해서 일주일 동안 대대적인 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꽃은 역시 성체 거동행사다. 성모마리아와 예수 상을 운반하기 위해 마을 청년들은 체력단련을 해야 한다. 일주일 동안 성체를 어깨에 매고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도시를 돌아야하니 의욕만 앞세워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성체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코프라 디아스라는 고깔을 쓰고 있다. 속죄와 회개를 상징한다고 한다.DSC05299.JPG

 DSC05265.JPG

   성주간 축제 기간 중 일어난 사건으로 스페인 국민들이 잊지 못하는 참상이 있다. 스페인 내전 중이던 1937년 4월 26일 피레네 산맥지대의 바스키야주 게르니카의 폭격이다. 1930년대 유럽에 파시즘이 대두되면서 유럽 국가는 파시즘과 반 파시즘파로 나뉘었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반 파시즘파인 사회당이 주도하고 있었다. 권부에서 밀려난 파시즘 세력의 지도자 프랑코가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군사봉기를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사회당 쪽은 구소련이 지원을 했고 팔랑헤당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지원했다. 프랑코는 독일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히틀러는 콘돌군단의 최신형 전폭기 24대로 게르니카에 폭탄 24톤을 쏟아부었다. 독일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스페인 내전에 자신들의 신형무기를 시험했고, 5개월 후(1939년9월1일)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게르니카 [349.3 x 776.6 Cm]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장군이 이끄는 파시즘 세력이 1939년 4월1일 마드리드를 점령하면서 끝났다. 당시 게르니카 폭격 소식을 전해들은 안달루시아 말라기 출신의 화가  피카소는 폭격의 참상을 담은 벽화 "게르니카"를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 형식으로 빌려주었다가 피카소 사후 그의 유지에 따라 유작은 프랑코 정권 이후에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의 소피아 왕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여행의 첫째날은 숙소에서 보냈고 관광의 시작은 까딸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다.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가족 성당)은 가우디가 1882년 3월19일(성요셉축일) 공사를 시작한 이후 1926년6월 그가 죽을 때까지 일부만 완성했으며 가우디 사후 100년이 되는 해(2026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에 있다. 성가족 성당은 예수의 탄생, 수난, 영광을 나타내는 3개의 파사드와 12개의 첨탑으로 이뤄져 있다. 12개의 첨탑은 가우디가 몬세라트(톱니모양의 산이란 의미)의 기암괴석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건축물이 모여 있는 도시다. 성가족 성당, 구엘공원, 카사바트요와 카사밀라가 멀지 않은 곳에 모여 있다. 구엘공원은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 들도록 꾸며 놓았다. 독일 동화 헨델과 그레텔의 비스켓집 모양의 관리사무소, 동굴 모양을 한 벽 그리고 공원 벤치의 안락함과 빗물 재활용시설까지 가우디의 아이디어가 반짝반짝 빛난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파도가 출렁거리는 듯한 빛의 향연을 느낄 수 있는 카사바트요와 시멘트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는 카사밀라는 표면으로부터 부피를 만드는 기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건축물에는 철을 이용한 작품이  많은 데  솥 대장장이 가문 출신이라서 철을 잘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몬세라트에는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하늘 위에 수도원 "산타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이 있다. 산악열차를 이용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수도원이 세워진 1025년에는 외부인의 출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곳이었다. 이곳 수도원은 나폴레옹이 파괴한 것을 1858년에 재건했다고 한다. 크지않은 성당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화려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는 천정이 인상에 깊게  남는다. 이 곳 성당에서는 매일 오후 1시가 되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에스콜라니아 소년 합창단이 공연을 한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공연시간이 지난 후 도착해서 합창단의 노래는 듣지 못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가우디는 산타 마리아 몬세라토 수도원을 자주 찾았는데 자연은 곧 신의 예술품이라 믿어 성가족 성당 첨탑을 지을 때 몬세라토산의 바위를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스페인은 로마와 게르만족(서고트족)의 지배를 받아오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의 침략으로

  8백년간을 무어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스페인 왕국이 722년 코바동가 전투를 시작으로 레콘키스타(국토 회복운동) 운동을 벌여 1492년 안달루시아 그라나다의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왕 보압딜이 항복을 하고 알제리로 떠나기 전까지 살던 알함브라 궁전은 당시 미개문명국가로 깔보았던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물론 정복군주 이사벨왕도 알람브라 궁전 입구 심판의 문에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을 새겨 넣은 것을 빼놓고는 그대로 보존했다. 자신의 생애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 그녀는 궁전을 원형 그대로 보존할 것을 명했다. 이 궁전은 "붉은 성"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성벽과 성이 붉은 황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흙속에 진주처럼 투박함 속에 화려함을 담고 있는 스페인과 전 세계의 보물이다.

    알람브라 궁전은 나사리에스 궁전, 헤네랄 리페 별궁, 나스르 궁전, 알카사바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나사리에스 궁전은 왕이 머무는 코마레스궁전, 궁녀들이 머무는 하렘인 라이온 궁과 토후들을 접견하는 메수아르 궁이 있다. 메수아르 궁은 행정을 보았던 곳과 외국 대사들이 왕의 알현을 위해 대기하던 황금의 방이 있다. 이곳은 정교한 조각과 황금빛이 높은 창으로 들어와 사신들의 표정 하나 하나를 비춰 감출 수가 없었다. 왕이 머무는 거실 창문은 밖에서 볼 수 없도록 되어있으니 사신들은 더욱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을 것 같다.

  헤네랄레페 별궁은 여름궁전으로 "건축가의 정원"이란 뜻을 갖고 있다. 정원 중앙에 아세키아라고하는 분수정원이 있다. 수로와 분수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물의 정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예술품, 헤네랄 리페는 인도의 타지마할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알함브라와 알바이신 지구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아랍 유목민의 후예로 물과 빛을 이용한 건축이 돋보이는 나스르 궁전은 파티오(中庭)에 분수정원과 열두 사자의 방이 아라비아 건축의 최고 미를 자랑한다. 그중에 두 자매의 방에 벌집 모양을 한 천정으로 창문 빛이 투영되면 거실은 온통 에메랄드 자주 빛의 향연이 열린다. 나스르 궁전은 이슬람 궁전의 정점(頂點)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슬람 건축물은 우상숭배를 금하라는 교리에 따라 사람이나 동물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기하학적 문양과 아라베스크 무늬가 주류를 이룬다. 벽면과 천정은 정교하게 조각된 문양들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나르스 궁전은 화려함과 정교함이 어우러져 있어 알람브라 궁전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데 입장티켓과 별도로 사전 예약이 이뤄져야 관람할 수 있다.

  궁전 입구에 사이프레스 나무로 꾸며 놓은 인공정원도 볼거리다. 분수와 앙상블을 이루는 정원수는 궁의 민낯이 드러내지 않도록 가림막 역할도 하고 정원의 풍미를 더해주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싸이프러스 나무는 하늘을 향해 솟아 올라가고 뿌리도 땅속으로만 뻗어 주로 무덤가에 많이 심는데, 헤네랄리페의 아세키아 분수정원에 조경된 것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꾸며져 있다. 




여행 삼일 째인 알함브라 궁전 여행은 발렌시아에서 시작됐는데 이동거리만 5백키로가 넘었다. 먼길을 이동해서 성안을 둘러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라나다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시내구경까지 했으니 허리, 다리 발바닥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  특히 이번 여행에 함께했던 분들 중 칠십을 넘긴 분들이 십여 명 있었는데 그분들도 말은 하지 않지만 얼굴에 힘든 기색이 역역하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말라가주에 위치한 론다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헤밍웨이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헤밍웨이는 론다에서 살면서 투우관람과 집필활동을 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해 만들어진 소설로 영화도 만들어졌다.

 론다는 조용한 시골마을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고, 백 미터가 넘는  높은 절벽과 절벽을 연결해 놓은 누에보 다리가 있다. 1785년 근대 투우의 창시자 프란시스코 로메로가 지은 투우장은 동물 애호가들의 반대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변해 투우경기는 관람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는 유명 인사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다. 헤밍웨이는 로메로 2세와 절친으로 그와 자주 투우장을 들렸다고 한다. 피카소도 투우 경기를 즐겨 보았다고 하는데  유독 그의 작품에 황소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어서다. 특히 스페인 사람들의 분노를 나타내는 듯한 "게르니카"의 황소는 그의 작품에서 손에 꼽히는 명장면 중 하나다. 



 우리 일행은 론다의 시가지를 쇼핑하면서 상점에서 몸에 좋다는 올리브유도 사고 츄러스도 먹었다.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짭조름한 추러스에 아주 진한 단맛의 초콜릿을 발라서 먹는 거였다. 먹고나서 느낀 소감은 "이게 뭐람" 에~이, 맛없다. 사놓고 버릴 수 없어 억지로 다시 한입을 베어 물지만 몸은 전율을 느낄 만큼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세비야 하면 연상되는 것이 로시니의 오페라 세비야 이발사, 비제의 카르멘, 그리고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이다. 그러나 세비야는 신대륙을 향한 전초기지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세비야 대성당은 1401년 착공해서 1526년(125년)완공했다. 바티칸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에 이어 세번 째로 큰 성당이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대서양 항해를 시작한 수로가 세비야에 있는 과달 키바르강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스페인 왕과 했던 약속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죽어서 절대로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는 그의 마지막 유언을 남긴 것이다. 그가 죽고 난후 그의 존재감을 느낀 스페인 정부는 서둘러 그의 무덤을 세비야 대성당에 쓰기로 하고 유언을 어길 수 없어 공중에 떠 있는 무덤을 만들었다. 콜럼버스의 관은 스페인을 지배했던 네 명의 왕이 어깨에 메고 있다. 앞쪽에 두 명은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뒤에 두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탐험을 위해 스페인의 네 왕국 중 레온과 카스티야는 탐험을 도와주었지만 나바라와 아라곤왕은 그의 청을 거절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비야는 아랍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무어인이 통치한 팔백년 동안은 이슬람문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후 레콘키스타(국토회복운동)운동이 전개되어 무어인들을 추방한 후에는 다시 가톨릭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거쳤다. 히랄다 탑도 그중 하나다. 예전 이슬람의 통치시절에는 예배시간을 알리는 모스크의 미너렛에서 예배를 알리는 종탑으로 바뀌었다. 종루 끝까지 계단을 놓았으나 오르내리기 불편해서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경사로로 바꾸었다.

  세비야에 스페인 광장은 꽤 유명하다. 우리나라 방송 CF 광고 촬영지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세계 박람회를 위해 지어져 규모면에서도 남다르다. 너른 광장에 해자도 있고 분수도 있다. 광장을 둘러볼 수 있는 마차도 있다. 어느곳에서 든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작품이 된다.



   우리는 저녁에 플라밍고 공연을 보았다. 스페인에 떠도는 집시들의 삶이 배어있는 플라밍고는 춤, 노래와 기타연주가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불꽃의 풀라마에서 유래한 플라밍고는 온몸을 불꽃처럼 불사르는 격정적인 춤이다. 자유로운 열정의 발산이다.  집시는 말 그대로 유랑민이다. 사회의 최 하류층으로 삶 자체가 힘들고 어렵다. 그리고 그들의 힘든 삶을 풀어 내는 것으로 춤과 노래가 한 몫을 차지하게 되는데 플라밍고는 현란한 발동작이 압권이다. 구두굽과 앞코부분에 쇠조각을 붙여 강렬한 소리를 내는 데 뒷굽을 치는 소리를 타쿤이라하고 앞코를 치는 동작을 푼타라고 한다. 무희는 타쿤이나 푼타 외에도 손동작과 팔동작을 하며 군무를 춘다. 이 때 격렬하게 춤을 추다 멈추는 동작을 데즈 프랑데라 하고 손벽을 치는 동작을 팔마스, 손의 모양을 꺾거나 비트는 동작을 마노라한다. 춤사위 중 유독 고독한 듯 몸을 뒤트는 동작을 파세오라고 한다. 노래는 구성지고 길게 늘어지게 불러 아라비아 풍의 향수에 젖게 한다. 스페인의 이슬람과 유대문화가 융합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기타와 춤이 주를 이루고 노래는 중간중간마다 삽입되어 부른다. 기타리스트 중 세계적으로 플라밍고를 알린 파코테 루치아가 유명하다. 공연의 압권은 타쿤과 푼타로 이 동작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만큼 격렬하고 박진감이 넘쳐 관람객의 심장을 뛰게 한다. 세비야의 플라밍고가 스페인에서 처음 시작된 곳이다. 플라밍고의 고장답게 관람객들이 꽉 들어차 있는데 의사소통이 가능한 한국인들이 대부분이다.



  하루에 여러 일정을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가이드나 우리들 모두가 혼이 빠지기는 매한가지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갓나 모를 정도로 숨 가쁘게 하루가 흘러갔으니 숙소에서 뒤 늦은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이다.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사원은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과 함께 무어인들이 남긴 독특한 유산이다. 이 사원은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번갈아 가며 점령한 탓에 두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함을 지녔다. 메스키타사원은 한 번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도시가 팽창할 때마다 증축에 증축을 해서 확장한 것이 남북으로 180미터 동서로 130미터(약2만5천명 수용)에 이른다. 재미있는 것은 사원 중앙에 가돌릭 성당의 예배당이 자리하는 데, 카를 5세가 무어인을 내쫓고 이곳에 성당을 지었기 때문이다.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중 일부는 재활용된 것도 있다. 자세히 보면 기둥의 돌마다 재질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천장의 정교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가져온 거라고 한다. 이슬람사원안에 기독교 성당이 한 중앙에 있다는 사실이 오늘의 스페인의 얼굴이다.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왕이 결혼을 하면서 스페인은 외형적인 통일을 이루었다. 물론 안달루시아에 무어인을 몰아낸 1492년에, 그러나 스페인 내부에는 다양한 종파가 존재했다.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가 대표적이다. 당시 왕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허락을 받아 "스페인 국왕의 칙령"으로 종교 재판소를 만들었다. 하늘이 보낸 치유책이라 불릴 만큼 스페인으로서는 민족의 단합을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 종교재판은 도미니크 사제들이 주관했다. 이교도들에게 일정기간 이내 스페인을 떠나도록 공고한 후 스페인에 잔류한 자들 중 이교도를 믿는 자들이 대상이 되었다. 종교재판은 주로 이웃 주민의 신고로 시작 되었다. 사제들은 이교도 활동을 한 사실을 묻고 부정할 경우 잔혹한 형신을 가했다. 끝내 부인하면 악마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이교도로 몰리게 되면 재산몰수와 사회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교도 집안으로 낙인찍혀 스페인 내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종교재판으로 스페인은 카톨릭을 믿는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갔다. 당시 종교재판을 통해 성직자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데 일부 성직자는 왕에 버금가는 재물을 쌓았다고 하니 분명 종교재판이 가져온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웃을 믿지 못하는 풍조가 사회의 전반에 퍼져 큰 병폐가 되기도 했다.

  콘수에 그라 풍차마을은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끼호떼"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넓은 평원에 부는 바람이 풍차를 돌리는 힘이 된다. 가이드가 따듯한 옷을 챙겨 입으라는 말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채 버스에서 내렸다. 바람은 예상보다 훨씬 매서웠다. 돈끼호떼는 풍차와 창을 겨눠보기도 전 바람에 쓰러지겠다는 생각에 혼자 웃는다. 풍차마을에서 바람을 맞은 사람들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다. 매서운 바람이 안겨준 선물이다. 



 여행 말미에 간 곳은 톨레도다. 혹자는 "톨레도를 보기 전에 스페인을 논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럴만큼 가치가 있는 도시다. 역사의 도시가 아니라 전체가 역사 그 자체다. 실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는 도시다. 현대문명이 덧붙여지지 않아 더 매력적이다. 하회마을처럼 도시를 끼고 흐르는 따호강이 있어 천연요새 역할을 한다. 톨레도의 어원은 저항하여 항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라틴어 톨레라툼(Toleratum)에서 유래되었다. 로마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톨레도 사람들을 부르던 것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 아직도 종교의 최고 수장이 이곳 톨레도 대성당에 있고 국토회복운동 시에는 거점도시로서 역할을 했다. 톨레도를 스페인의 셀러드 볼(Salad bowl)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로마인, 게르만인, 유대인 그리고 무어인까지 골고루 이도시에 살면서 그들의 빛깔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종교재판을 통해 동일성을 회복하고 종교 공동체를 통해 국가의 존립을 이룬 가톨릭 국가다. 종교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하나가 되어 공동체를 이룬 나라다. 합스브르크왕가의 펠리페2세는 가톨릭으로 통일된 국가를 이루기 위해 당시 자국령이던 네덜란드와 80년간 전쟁을 하면서 국력을 소진했고 결국 스페인이 쇠락의 길을 걷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종교로 통합을 이루고 놀이로 소통하는 나라 스페인, 그래서 스페인에는 축제가 많다. 스페인 사람들은 다양한 축제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을 즐긴다. 열심히 일만 하는 우리들의 삶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노력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듯이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관광객이 해마다 6천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즐기며 살다보니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수익이 쏠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