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티베리우스 황제
카프리 섬
- 나폴리만 : 파도 잔잔
기후 온화
포추올리(무역항)
미세노 - 3HR(거리)
3단 갤리선에 돗을 이용 5놋트 속력< 1놋트 - 1해리(1,852m)/hr>
아우구스 투스 : 카프리 섬의 아름다움에 취해 나폴리의 이스카 섬과 바꿈. 나폴리 만의 진주라는
별명갖음. 황제 전용 휴양지.
서기27년 ~ 서기37년까지 카프리섬에서 로마 제국을 통치함 : 티베리우스
황제즉위
- 9월17일(서기 14년 9월)
- 8/19일 아우구스 투스 사망 / 황제의 유언장(공적인 일) 공표
- 혈족을 통한 후계를 염두에 두었으나 어린나이에 사망, 죽기까지 후계를 정하지 않음
- 혈통중시의 굴욕감으로 시작된 황제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 : 클라디우스 씨족
28명의 집정관(콘술)
5명의 독재관(딕타토르)
7명의 재무관(캔소르)
6명의 개선장군, 20명의 차석 개선장군 배출 명문가
피의 계승에서 제외되었던 승계자(호칭도 민감하게, 자신의 입상 공공장소에 세우는 것 금지)
군단봉기(軍團蜂起)
선동자(煽動者) : 페르킨 니우스(졸병)
황제 교체로 혼란틈타 처우개선 요구(군생활→제대→식민)
분견대(分遣隊) - 橋梁 건설 투입병, 숙영지 소동에 도시약탈
드루누스 - 현장에 투입
시간벌기(판노니아 주둔병 1만 8천이 아니라 15만 병사에 문제 - 정치적 사안)
☞ 아우구스 투스 때 연봉 인상(황제 교체 시 마다 요구) / 140 데나리우스 → 225데나리우스
티베리우스 치세 기본 방침 / 세금인상 없이 국가 재정 건전화.
주모자 막사 내에서 살해(드루누스) / 페르킨 니우스 와 동료
과격분자 소탕작전 : 근위대 병사, 판노니아 군단 백인대장 중심
판노니아 북서쪽 라인강 방위선 병사 반란 : 판노니아 3개군단(1만8천명), 라인강 연안 8개군단(4만8천명)
게르마니 쿠스(서기13년 이후 담당)
- 아우구스투스 근친자가 맏은 것은 그의 정략을 실천하는 부대(정예병사 파견)
- 새 황제로 게르마니 쿠스 추대
- 신병들 주축된 처우개선 / 1) 가혹행위<채찍, 중노동>
2) 노병 - 복무기간 긴 것
3) 신병 - 죽은 황제의 유증금(遺贈金) 지급시기
게르마니 쿠스 --- 아그리피나
↑
가이우스(별명 ; 칼리굴라)
게르마니쿠스 : 옥타비아 누스 누이 옥타비아와 안토니 우스 사이에서 낳은 아들.
※ 옥타비아누스 ↔ 안토니우스(악티늄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 승)
사령관 카이키나에 비밀편지 - 주모자 처벌
공중안전
公明正大(유스티티아)가 곧 安全保障(세쿠리 타스)이다. - 티베리우스 생각
☞ 중요한 재판에 참석 검사처럼 형 집행을 지휘 감독했다.
긴축재정(緊縮財政)
- 세금 인상을 하지않음
- 꼭 필요한 것 아니면 공공사업 않음
- 로마인의 의무 : 지도층 / 빵과 써커스 제공
↑
부의 환원(공공시설 기증, 오락, 빈민계층에 빵 제공)
게르마니아 철수(撤收)
티베리우스의 3대 목표 1. 국가재정 건전화
2. 황제 지위 확립
3. 북쪽 방위선 확정(라인강→엘베강)
라인강 방위 체계 / 엘베강 → 라인강
동방(오리엔트)문제
티베리우스 의 냉철함 1) 아르탁 시아스(그리스 이름 제노네스)로 바꿔라.
2) 게르마니 쿠스가 왕관 씌워주는 것
아르메니아 : 령토가 아니라 전략적 필요에 의한 선택(패권하)
파르티아 왕 - 아르타 바누스
우호조약 경신 요청
카파도키아(현 터키동부) 콤마게네 : 왕위 비어있어 로마 직할속주로 결정
카파도키아(왕- 강제퇴위) / 초대 집정관 벨라니우스(恒久的 속주)
콤마게네(왕- 자연사) - 집정관 경험없는 법무관(프라이 토르)세베루스 부임, 20년 후 콤마게네는 왕국 복귀
도나우강 방위 체제
- 게르만족 영웅 "아르미니우스" 고립 - 소규모 전투에서 사망
- 로마의 안전은 군사가 아니라 정치로 보장받게 되었다. - 티베리우스
- 도나우강 유역의 마르코 반니족(강력)
족장 - 마로보두스(로마에서 성장, 로마 국력 잘 이해)로마와 싸우는자는 아르미니우스 권유를 거부하다
휘하 병사들의 반란으로 로마에 은신요청. 마로보두스를 내쫒고 족장이된 카투아르 다스 조차도 쿠테에 쫒겨나 로마에 보호요청 - 받아들임. 마르코 만니족의 통솔자 바니우스를 로마제국의 친구로 인정. 도나우강 북쪽에 있는 독립국과 동맹관계 맺음.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서기 19년 - 시리아에 돌아온 게르마니쿠스는 피소와의 사이가 더욱 좋지않아 자주 싸움
피소 : 소아시아(터키)로 감
게르마니쿠스 : 팔미라(사막의 열)病
☞ 팔미라 → 유프라 테스강 → 파르티아와 우호조약 경신 → 안티오키아(고열로 쓰러짐)
피소가 독약을 먹였다고 생각한 게르마니 쿠스는 복수(復讐)를 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서기19년 10월10일/33세)
애도(哀悼) : 거리에서 애도인파 소중한 물건태워 연기 자욱.
☆ 장례식에 가족 불참 : 티베리우스
리비아(할머니)
안토니아(친모) / 極哀(臥病)
☞ 슬픔이 커서라고 변명
아우구스 투스는 게르마니 쿠스의 친 아버지가 낙마로 사망하자 500km(로마)
떨어진 파도바까지 마중나가 유해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인 이해 못함 : 철시(撤市), 애도
☞ 집단 히스테리를 정리하는 티베리우스 : 로마를 위해 이전에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아버지인 나와 가족에 대단한 명예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외동 딸 죽음에 슬을
감췄고 아우구스 투스는 손자들이 차례로 죽었을 때도 의연히 책무를 수행했다. 지도자 개개인은 언
젠가는 죽어야할 운명이다. 不滅의 存在는 국가 뿐이다.
피소의 재판 / 원로원의 유력자
오만(傲慢)과 競爭心 ?
고발자 : 벨라니우스, 비텔리우스,카이키나(게르마니아 전쟁 때 군단장)
첫째 : 군단병력의 방종을 허락
둘째 : 동맹국 왕에 횡포
셋째 : 마법과 독약사용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
티베리우스 - 顔色 변화 없어(憤怒, 同情心)
군중은 피소를 처 죽일듯한 노여움
판결 : 1) 피소의 이름을 공식 기록에서 말살한다.
2) 피소 재산 1/2 몰수, 재산1/2은 맏아들 그나이우스에게 남기되 피소란 성은 바꿀 것
3) 시이아 부임에 동행한 2째아들 마르쿠스는 원로원 자격박탈 아버지의 재산에서 500만
세스테르 티우스만 받고 수도 로마에서 10년동안 추방
4) 아내 폴링키아는 국모 리비아의 탄원도 있기에 불문에 부친다.
판결 전날 / 피고는 목이 잘린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에 대한 티베리우스는 자기권한 즉 대법원 판결을
내렸다.
티베리우스(대법원)판결 : 1) 피소의 이름 공식기록에서 삭제 철회, 로마에 도전한 마루쿠스 안토니우스
조차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다는게 이유다.
2) 피소 2째아들 마르쿠스의 원로원 의원 자격박탈과 10년간 수도추방도 철회
그에게도 1/2상속 인정
3) 원로원 → 복수의 신 마르스 신전에 황금의 상(게르마니쿠스)을 세우자는
제의도 반대했다. 자기나라 안에서 일어난 불상사는 슬품과 함께 묻어야 한다
는 것이 티베리우스의 생각 이었다.
이 판결의 휴유증 : 1)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했나 ?
2) 게르마니 쿠스 아내 아그리 피나가 티베리우스에 대해 憎惡心 갖게함.
티베리우스 - 금욕적 삶, 36세 때 율리아와 이혼 후 연회도 싫어함. 오락도 싫어함
첫사랑 빕사니아와 강제 이혼
두루이드교<서기 21년 반란>
- 갈리아 반란 : 고리대금 업자 이자에 대한 불만
연 12% 상한 - 로마
무제한 - 속주
- 반란 : 갈리아 동부 율리우스에서 발생, 반면 서부에서 발생 않은 이유?
- 이유 : 아우구스 투스가 기원 20년대 갈리아 재편성할 때 장발의 하이두 부족 수도 비브라크테(오툉)를 학문도시로 변모, 종교+교육+사법을 움켜진 두루이드(사제계급)로 부터 교육을 빼앗는 것. 또한 로마인의
드루이드 종교에 귀의 금지
- 드루이드 사제 : 갈리아 지도층에 대한 영향력 상실(갈리아 지도층 로마 시민권 소유)
- 드루이드 사제의 반동 : 민족자결+고리대금 폐해
1) 군단의 정예화
2) 갈리아병사들의 반란에 가담 않음
3) 서부, 북부, 남프랑스 등이 가담않음
4) 티베리우스 책임의 분담 중시
- 결과 : 4만의 반란군, 2만5천의 병력으로 반년만에 진압, 주모자 3명 자살, 학생 대부분 전사
- 사후조치 : 1) 오툉의 고등교육기관 존치
2) 드루이드 교의 추방(영국) / 오늘날 스톤헨지(영국남부 솔즈베리 평원 거석 기념물로
기원전 2,800년 ~기원전 1,100년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정, 드루이드교 제단으로 쓰임.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
- 일신교 : 생활방식까지 규제
- 다신교 : 인간 보호기능
- 예수그리스도 : 티베리우스 치세 끝나갈 무렵 십자가형
예수가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고 말함
- 티베리우스 : (개인의)신격화에 반대
개개인 보호는 신의 몫이지만 公同體(레스 프블리카)의 保護 役活은 政治라고 判斷.
종교 : 사회의 불안요인이 되지않는 범위에서 인정
☞디오니 소스신앙(BC3세기경/공화정):그리스에서 들어온 술과 광기의 신앙
불 건전성을 이유로 탄압.
패권하 타민족의 종교(민족 고유의 신) 거부하지 않음
테베레 강 범람 때 티베리우스의 조치
1) 원로원 : 시빌라의 예언집 이용 / 신탁
2) 티베리우스 - 종교가 정치분야에 침범하는 것 용납않음."홍수대책위원회 설치 명"
유대교 추방(이집트) - 기브형식 취해서 신도에게 돈 받는 것이 상식에 어긋난다고 판단.
아들의 죽음
드루수스(35세) 돌연사 - 잔병없이 건강한 편
자(아들) : 네로 카이사르(16세)
부인 : 아그리 피나 / 티베리우스가 황제자리 가로챘다고 오해하고 分派的 행동
안전보장(세쿠리 타스)
- 가도 : 網(도시기능 UP), 법(법치국가) / 유지보수 중요성
- 라인강 - 8개군단의 역할 / <상류고지 게르마니아 군단
하류저지 게르마니아 군단 > 방위선 방어
- 자긍심 강한 사람 : 자기자신에 엄격
不確實한 것은 運命이 지배하는 領域, 확실한 것은 무릇 인간의 才柱가 관할하는 영역
( "Fact regunt orbem! certa stant omnia lege") / 라틴어 격언
가족관계
간통죄 고소(도미티아스 아프로)
클라우디아 풀크루스 - 플루니우스
클라우디아가 아그리피나의 사촌이자 측근인 것이 문제
유죄판결
아그리피나 - 티베리우스에게 재혼시켜달라 간청
칼리쿨라의 누이동생
클라우 디우스의 아내
네로의 어머니다
원로원과의 관계
- 카이사르 / 원로원 세력의 대변자 폼페이우스와 싸움에서 이겨(무력승자)
- 아우구스 투스 - 안토니우스, 브루트스 일파 제거, 시간을 활용
- 티베리우스 - 로마에서 계속 주류를 지켜오던 클라우 디우스 씨족 출신
카이사르 - 명문이라도 방계출신
아우구스 투스 - 기사계급 출신
카프리 은둔(隱遁)
은퇴가 아니라 가출
36세 때 로도스 섬에 들어간 전례(기원전 6년 / 7년간)
아우구스 투스가 사망한 곳(놀라)에 세워진 신전 봉헌식 참석 - 10년
정보의 speed → 절대 속도가 아니라 상대 속도다.<정보→판단→지령>
예) 피데네 검투장 구조물 전복사고<로마 살레네 가도 10km)대처
사고 : 5천명 사상자 발생
지시 : 로마 수도 및 주변도시 의사 총동원 부상자 치료
인근 지역에 부상자 수용
사망자 장례비 공금 지급
원로원에 법안 제출
1) 검투시합 주관 : 40만 세스테르 티우스 이상 자산 가진자로 제한
2) 관람석 : 목조라도 토지조성 완벽한 장소
세야누스 /기사계급 출신, 부친 근위대장 출신으로 이집트 장관 역임
- 아그리 피나의 파 소탕작전 : 세야누스 이용 함정수사(하인 엿 듣도록)
피소를 통한 게르마니 쿠스 교사범의심<티베리우스>
아그리 피나 주변인물 : 국가 반역죄, 간통죄로 제거
- 소탕 / 편지 1) 아그리 피나가 티베리우스에게 지나친 적개심
2) 네로(23세) 방탕생활 남색 취미 개탄
3) 민중시위 강력 대처
- 처리 : 서기 29년 말 -- 아그리 피나 모자 유죄 확정
유배형 / 모 : 판다 타리아 섬(벤토테네)
자 : 폰티 아이섬(폰차) /네로 카이사르 사망
- 세야누스의 몰락 / 아그리 피나 일파 몰락 - 세야누스에 덮어씌우기 작전
[ 수족으로 부리려한 인재가 머리가 되려하면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세야누스 ---- 리비아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의 아내, 게르마니쿠스의 누이동생)
↑
세야누스의 처 아피카타의 증언
< 드루수스 살아 있을 때부터 애인 사이, 8년전 드루수스 급사도 두사람 공모 독살>
☞ 세야누스 반역죄로 참형(테베레 강에 시체버려져)
복수(復讐) / 세야누스의 3명의 자식 살해, 리비아 : 자살강요
※ 비텔리우스 오리엔트 파견(동방 전역 최고 통수권자)
예수 십자가 형 :서기 33년
유대장관 :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서기36년 본국 송환
직무능력 미흡 / 예수 십자가에 못박은 죄(x)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것은 용납 못함.
로마 제국을 기획한 것은 카이사르, 구축은 아우구스 투스, 반석에 올려놓은 것은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 77세로 사망(서기37년 3월16일)
- 책임감으로 삶을 살았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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