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E : 아우구스티누스 / 자유 의지론
영어는 라틴어가 모어다 :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대하여 철학사에서 그렇게 깊게 다루질 않았었다는 게 굉장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무슨 얘기냐 하면 내가 중국사를 강의하는 것보다 서양철학사를 강의하는 게 인기가 좋다. 왜냐하면 더 비근(卑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인들한테 중국사를 강의해봐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말이 자기꺼라서 구태여 철학으로 배울 건더기가 없는 것같이 느껴지는 반면 서양철학은 뭔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어휘가 많아서 이를테면, 자유의지, 신, 역사, 이성, 감정 등 모든 언어가 서양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이 원형이 희랍어라고 착각했는데, 현대어는 희랍어와 관계가 없다. 현대어는 주로 영어고, 영어의 근본은 라틴어다. 라틴어를 보면 우리가 쓰고있는 영어를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어원이 같기 때문이다. 희랍어는 희랍어 나름대로에 어떠한 문명 체계를 갖고 있는데 반해서 오늘날 영어문화권에서 쓰고 있는 소위 서양문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라틴어휘로 성립된 것이다.
라틴어라는 것은 로마문명에서 사용된 것이나 이미 로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문명이라는 것은 기독교화 된 문명을 말한다. 라틴어로 된 서양언어 어휘의 모든 기초를 닦은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해야 서양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저술한 책이 100종이고, 설교집만 500권이 넘고, 서간문이 200개가 남아있다. 나는 옛날에 중세철학이라고 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초창기 사람이라서 저술된 책의 분량이 적은 사람으로 알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방대한 저술을 남긴 걸로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 비하면 문자 그대로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그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어떻게 코덱스나 양피지에 그렇게 많은 문장이 잘 보존되어 있는지 참 기적(奇跡)적인 일이다. 이사람은 논리학을 공부한 게 아니다. 수사학(Rhetoric)을 공부했다. 그리고 로마와 밀라노에서 수사학(修辭學)을 가르쳤다. 수사학은 문장을 가르키는 건데 이는 논리적으로 이론을 구성한다기보다는 사람의 마음과 성격을 어떻게 형성하느냐를 가르치는 전통적 교육학이다. 사람이 어떻게 사고하고, 어떤 문장을 쓰고, 성격을 어떻게 형성할지를 가르치는 수사학 전문가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방대한 문헌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수사학자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것들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저술을 보면 지금 읽어도 현대문학으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라틴어의 유려한 문장으로 그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술했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몇 년도 배 안에서 어떤 생각을 하다 어떤 통의를 거쳐 누구와 생각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론서인 동시에 역사기록이고, 문학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체계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죄다 다르다.
최근 그의 저술을 많이 읽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국론, 고백론(confession), 삼위일체론, 분도출판사의 자유 의지론 등인데 읽고나서 머리에 남는 게 하나도 없다. 공부하면 더 없어져서 강의할 게 없다. 아우 수스 티누스의 고민에 정말 동참해야 머리에 남는 게 있는데, 나는 이 사람의 고민에 동참하기가 어렵다. 이 사람의 모든 논의는 인간의 구원인데 나는 인간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동양사람들은 인간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구원이라는 게 생겨났나하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생겨난 것이다. 희랍철학에도 없고, 로마 사상에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AD 313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구원이란 게 당연히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계시니까, 인간은 절대자에게 귀의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구원의 방식이라는 게 뭐냐? 거기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고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라는 생각이 있고, 구원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아주 심오한 나란 존재가 죄악 덩어리라고 하는 하나의 죄(sin) 의식이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죄라고 하는 개념이 인간 깊숙한 곳에 있어야만 구원의 의미가 있게 된다. 만약 내가 감옥에 갇혀있는 죄인이라면 벗어나려고 노력은 할 게 아닌가? 변호사를 동원해서 재판을 하고 무죄를 주장할 것이다.
이 죄(sin)는 법적으로 싸워야 할 것도 아니다. 처음에 선교사들이 동양에 와서 전도를 할 때 "그대는 죄인이다."라고 하니까 "내가 형벌을 받은 적도 없는데 왜 죄인이라고 하냐?"하고 거세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죄라는 개념이 안 들어오니까,
아우구스투스 사상을 탐구한 성념 교수 : 구원은 성악설을 기본 전제로 한 것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아담의 선악과를 전제로 해야 되는 문제다. 책을 읽을 때 마찮가지로 근원적인 문제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채 책을 읽다가 보면 무엇을 읽었는지 방금 읽은 책의 내용이 사라라 져 버린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을 읽다가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부친다 해서 전문가의 강의를 청해 듣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 성념 선생은 서강대학교에서 중세철학을 15년 동안 가르치셨고, 바티칸 대사로 가서 한 5년 계셨고 평생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을 번역하고 계시는데, 지난 시간에 그분을 만나 뵙겠다고 했는데 만나 뵈었다. 사실 우리나라 가톨릭 사상가들이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대부분 신부님들이고 가톨릭 커뮤니티 안에서는 존경받는 사람들로 꽤 있겠지만 일반적인 사상가로서 가톨릭 사상가는 별로 없다. 물론 정의사제단이라든가 그런 모임은 사회적 활동가로 알려져 있는 것이고, 많은 분들이 수도회 활동에서 알려졌어도 가톨릭 사상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는 안병무 선생 외 일반 사상가가 많다. 내가 만나본 성염선생은 유니크(Unique)한 가톨릭 사상가 같다. 나보다 6살 더 많은데도 말씀이 명료하고, 내가 던지는 질문에도 흐트러짐이 없고, 정확하게 로지컬 한 대화가 가능하고, 아우구스투스에 대하여 심오한 통찰을 갖고 있다. 이 강의를 내가 할 게 아니라 평생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에 몰두한 성념 선생을 모셔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났겠다고 생각한다.
신교측 사상가들은 발랄한 측면은 있지만 알고 보면 정통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나는 본질적으로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처럼 탄압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신앙으로 해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성념 선생의 신앙고백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철학으로서 얘기하는 것이고 어거스틴의 철학을 이해해야만 비로서 전 철학사가 열린다. 성념 선생의 말에 따르면 서양철학사를 만든 사람은 세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계승자에 불과하다. 에포컬(epochal) 한 세 사람은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임마누엘 칸트라고 한다. 그들은 고대를 열고, 중세를 열고 근세를 열었던 사상가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셋 다 이데아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각 분야의 대가들이 쓴 옥스포드에서 발간 한 책이 있다. 안토니 캔이란 사람이 편집한 책에서 아마도 전철 학사에 위대한 사상가는 많아도 실제 서양철학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 한 사람을 들라면 아우구스티누스를 들 수밖에 없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게 우리가 헤겔이 더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서구 문명의 모든 기초를 이 사람이 만든 것이다. 기독교에 실제적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넘어설 사람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플라톤도 서양문명에선 어거스틴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지 누가 플라톤을 언급이나 했나? 전부 어거스틴이 코테션한 것 가지고 플라톤을 운운할 뿐이지 실제로 모른다. BC 6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엔 희랍의 텍스트(text)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15세기에서 16세기경 베티우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랍어 번역본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라틴어로 쓰여서 라틴어로 통일된 건데 라틴어를 집약해놓은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라틴어 고문헌이 제일 까다롭다고 한다. 축악이 심하고 제대로 다 기술하질 않아서 이해히기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정본을 만드는 게 희랍어 텍스트보다 더 어렵단다. 나는 그 반대로 알았는데 옥스퍼드 학자들 얘기가 라틴어 정본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아마 신부들끼리만 아는 부분에 대한 축약을 하기 때문에 골탕 먹는다고 한다. 그것을 전부 비교해서 텍스트로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 이 교부 문헌 총서만 해도 라틴어가 있고 우리말이 있다. 이런 시리즈가 전 세계에서 거의 없다고 한다. 독일, 불란서와 우리나라 정도라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학술활동이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마어마한 나라다. 만약에 중국에서 이만한 총서를 낸다는 것은 어려운 얘기다. 그러나 또 놀라운 사실은 일본은 아우구스티누스 전집이 나와있다. 하여튼 우리에게 이러한 고전학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일본 동경대학교 교수가 간단하게 해 놓은 걸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다음 시간에 성염 선생이 오시면 무궁무진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때 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출발로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 중 하나가 근세 철학의 데카르트(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 말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그대로 베껴온 것이다. 근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지적했더니 난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은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는 I think, therefore I am. 에서 think라는 게 모든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고 의심한다는 의미다. 뭐든 의심해보는 게 결국 내가 회의(懷疑)를 하는 거고 이것을 방법론적 회의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 이 때 나는 사유의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의 코기 탄스의 주체로서의 나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이 말이 원래 유명한 게 원래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전에는 "나는 회의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내가 회의할 수 있다. 회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회의할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에 회의하는 게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회의할 수 없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 또 회의하는 나는 존재하는 게 아니냐?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회의할 수 없는 어떤 진리가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진리의 표준이 나에게 있어서는 감각이나 지각과 다른 나의 이성이다. 이성적 판단인데 이러한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영원의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학이라든가 수학, 윤리학, 미학, 아름다움, 선함 등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 영원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영원의 진리는 우리의 정신이 날조(捏造)되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의 진리가 있다는 것은 바로 신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영원불변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논의가 아우구스투스 수사학의 핵심이고,근세 철학의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주장은 어떤 의미에선 플라토닉 한 것인데, 다시 말해 플라토닉과 네오플라토니즘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고 그것과 더불어 구원론이 가미된 것이다. 구원론적 요소로 들어가면은 결국은 신플라톤주의에 유출설(流出說 / emnation theory)을 이 사람은 창조론으로 바꾼 것이다. 창조론은 지난 시간에 배웠던 "creatio ex nihilo"에서 창조란 시공 자체의 창조를 의미한다. 시공 자체의 창조기 때문에 어떤의에서 시공은 변화의 세계지만, 신은 영원한 존재고, 시공 자체가 신의 유일한 창조라고 한다면 신과 창조된 세계는 분리될 수 없다. 신비주의 계열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마니케이즘은 선악의 이원론이다. 이 선악을 일원화시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된 세계는 궁극적으로 선한 곳이다. 왜냐하면 신 자체가 완벽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완벽함이기 때문이다. 그 완벽한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면은 이건 완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엔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얘기냐 하면은 이 사람이 말하는 세계는 피라미드(hierarchy) 구조로 돼 있다. 최고 꼭대기엔 신(god)이 있고 바로 밑에 좋은 천사, 그다음 아래층엔 인간의 좋은 영혼, 그 아래엔 나쁜 영혼, 그 아래에 나쁜 천사, 맨 아래에 물질이 존재한다고 한다. 지난 시간에 sin & sex에 대하여 말했었다. 인간의 죄악이라는 것에서 왜 sex가 문제가 되냐 하면 아우구스투스의 말에 따르면 성욕이 스스로 통제가 가능하다면 죄가 될 게 없는데 문제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발동한다. 또 비록 발동했다고 해도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면 별문제가 아니나 문제는 제어가 되지 않는 말초신경의 본능적 성질이다. 결국 악은 인간이 완벽한 자제력을 갖고 있다면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자기 의지를 벗어나는 것 그게 악(evil)의 시발(始發)이라고 봤다.
피라미드 계층(hierarchy)의 경우 항상 위에 계층이 아래 계층을 지배하게 돼 있다고 한다. 코스모스 세계는 상위 선이 반드시 하위 선을 지배한다. 그래서 질서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대로는 나쁜 영혼이 좋은 영혼을 지배하기도 한다. 지배 방향의 역 방향을 악이라고 한다. 맹자가 말하는 식 색지 성(食色之性)도 똑같다. 맹자도 성, 선에 가장 문제 되는 게 식 색지 성이라고 했다. 이것을 죄라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부귀, 권력을 탐하는 것도 이와 같다. 과거엔 모든 악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게 모든 논의였다. 왜 하나님은 선한데 악한 세상을 만들었냐? 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는데 이렇게 나쁜 짓을 하냐? 저 새끼 나쁜 놈 아니냐? 왜 이렇게 사악한 종자를 만들었냐? 그런데 이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모든 선악이라는 개념은 오로지 인간만 갖고 있다. 개에게 선악이 있나, 나무에게 선악이 있나? 선악이란 인간의 개념이고 모든 악의 책임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정방향이 아니고 역방향으로 생기는 것이 악(evil)이라는 주장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악은 인간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자유의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가 인간에게선 축복이라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자유의지로 또다시 선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성행위가 왜 나쁘냐? 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귀한 생명을 만들고 또 즐거움까지 누리는데 왜 나쁜 일이냐? 다만 음탕한 것이 죄다. 로마시대 때 반달족이 침략해서 수만 명의 여성들이 겁탈당했는데 그것에 대해 그게 무슨 죄냐? 여성의 순결성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단지 겁탈을 당하면서 음탕하게 성을 즐긴 자만 죄가 될 뿐이라고 했다. 초기 교부는 논의가 달랐다. 그것은 사회적 책임이고, 전쟁의 피해지, 자유의지라고 하는 것이 최초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자유의지를 잘못 발동시켜가지고 선악과를 먹어서 그 이후 사망의 굴레에 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아담의 잘못된 자유의지의 행사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인이 되었고, 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인간은 빠지고 말았다. 그러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지 않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게 됐다. 하나님을 만난다. 그것은 보통 인간의 힘으로 안 된다고 말한다. 과식, 과음 등으로 고통받는 것도 하나님을 믿고 계시에 따르면 가능하다고 했다. 인간의 계산으론 안 된다는 것이다.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 사상이라는 게 은총 사상으로 후대 것과 다르다. 플라톤의 상기설(想起說)은 인간은 본래 이데아적인 세계에 살았지만 그때 기억을 잃고 지내다, 어느 순간 과거를 상기(recollection)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책이 네모지다고 하는 게 원래 네모가 아니었는데 과거를 떠올리며 네모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 속에서 수학을 직관하는 것이다. 희랍인들은 이것을 독특한 능력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근세 철학에 와서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innate ideas)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수학적인 idea를 파악할 수 있는 본유관념(innate ideas)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연결해주는 사상이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다.
이것은 그릇된 세계 속에서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게 일종의 은총(恩寵/grace)이라고 봤다. 복잡하긴 한데 하여튼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결국은 신에 대한 믿음, 알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알게 된다고 했다. 우선 믿어라, 그러면 신의 계시를 받는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그도 속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신의 계시가 와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그 후로 신의 계율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사도바울의 경험, 다마셋을 가는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뒤로 눈이 멀었다. 그리고 사고가 변했다. 이 과정이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다.
최근에 눈에 백내장이 와서 고생을 했다. 눈이 구해서 안과에 가서 약을 얻어다 눈에 넣었는데 싹 가셨다. 어쨌든 인류는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고 그 구원은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렇게 해서 교회론(Ecclesiology)이 들어가고 그래서 이런 모든 논의가 중세기 모든 기독교 철학을 지배했고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까지도 포섭(包攝)하는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사상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신국론 같은 것은 신국이라는 게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란데 플라톤의 감관계와 예지계로 나눠진 세계가 아니고 이 사람의 신국 개념은 이 땅 위에 선한 사람들의 나라인 구원받기로 된 사람들의 나라를 신국이라고 부르고, 구원받을 수 없도록 되어있는 나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을 지상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게 또 정치론과 연결돼서 교황권과 세속적인 왕권의 문제로 Overlap이 되고 뒤섞이면서 복잡해진다.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과 지상의 나라가 완전하게 분리되는 현상을 "최후의 심판"이라고 불렀다. 그때 완전히 판결이 난다고 봤다. 신국에 속한 사람은 구원을 받는데 보통 때는 죽어서 영혼만 부활하고 최후 심판 때는 몸이 부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것이 후에 여호와의 증인 사상으로 스며들게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사상엔 여러 분파의 종교 이념이 다 들어가 있는 셈이다. 예정 조화설, 칼빈 이즘 등이 아우구스투스의 사상에 다 들어가 있다. 신국론에 정교의 분리라든가, 물론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한다. 심지어 평화론(pax romana)까지 포함한다. 신의 은총에 귀의함으로써 신의 세계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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