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강의

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9강

해암 송구호 2021. 11. 20. 06:28

THESE : 좋음의 이데아(Idea)

 

예수를 믿는 의미 : 폴란드에서 귀국할 때  단원들이 짐이 많다고 오버 차지를 낼 바에 3등석에서 2등석으로 자리를 업그레이드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혼자 비즈니스 크라스로 옮겨 탔는데 옆 좌석에 외국인이 않았는데 "리빙 라스베이거스"에 나오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너무 똑같아서 처음에 미국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스트 듀어스와 대화를 하는데 독일말을 정화히 구사하는 걸 보고 독일인이란 걸 알았다. 이 친구가 키가 1미터 90은 되는 것 같았는데 키가 크니까 긴 좌석에서 쪼그리고 가는데 그 와중에 성경책을 이쪽저쪽 넘겨가며 열심히 보고 있어 성서를 왜 읽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신은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라고 했다. 그는 독일 씨멘스에 중역으로 근무한다며 내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신학교수이자 성서학자라고 소개한 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의 의미를 아느냐고 다시 질문을 하자 "과거엔 육신과 더불어 살았는데, 지금은 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영적인 삶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과거엔 세상적인 것을 탐닉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TV, SEX, 술, 담배를 끊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과거에 서양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가 역으로 서양인에게 전도 되고 있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가 조용기 목사를 아냐고 물어 " 내가 잘 안다"라고 대답했는데 그는 "예수의 의미에 대해 말해줄 수 있냐고" 내게 반문했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믿을 수 있냐"라고 물은 뒤 난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날 제대로 알기 위해선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 뒤, 교회가 "예수는 이런 거"라고 규정하면 예수는 예수가 아니다. 관념화시키면 "인수봉을 믿으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 그게 말이 되냐, 흠상(欽賞)은 가능할지 모르나 예수를 믿는 것은 당신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너 개인의 구원을 원한다면 불교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십자가의 의미는 자기희생을 통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데 있다. 독일 신학자 블트만의 저서를 읽어봐라. 독일어로 돼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박제된 실체가 아니다.

 

박종현 교수의 책 소개 : [헬라스 사상의 심층/서광사, 적도(道) 또는 중용의 사상] 이 두 권은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책이다. 원전에 충실하다 보니 독자들에겐 읽기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한국인이 독자적으로 파악해서 희랍의 이데아 사상에서 중용의 근원적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앞시간에서 말했던 신들림과 이성에 대한 자각이 희랍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풀라톤은 이원적 사상인 형상과 FORM의 이데아를, 피타고라스는 수의 세계를 통한 코스모스의 배열, 조화, 균형, 질서를 말했다. 박종현 교수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아리스토 텔레스의 왜곡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말했다고 주장한다. 한정되지 않은 것에서 한정된 것으로 가는 걸 질서라 하고 사물의 핵심으로 봤다. 사람은 20도에서 40도 범주에서 생존하는데 가장 적합한 온도는 36.5도로 이상태를 좋음의 이데아라고 한다. 희랍인들은 포도주를 원액으로 마시면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포도주를 희석해서 마시는데 이때 사용되는 용기를 "크라텔"이라고 한다. 이때 가장 적당한 상태로 섞는 걸 적도(適道)라고 했다. 이것을 중용으로 봤는데 중국 사상에 함의된 중용이란 감성과 이성의 구분이 없어야 된다. 술을 섞을 때 기후, 날씨, 기분에 따라 상황이 변할 수 있다. 이성적이라기보다 다분히 감성적일 수 있다. 희랍 원전에 박종현 교수의 사상이 깔려있는 게 사실이긴 한데 좋음의 이데아를 중용 또는 적도로 본다면 그것은 동양인으로 해석한 희랍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중용 사상과 인식론의 충돌 : 우리가 이성과 감성 그리고 감각적 세계에 대한 치열한 존중이 있어야 하는데 희랍은 감각적인 모든 거, 우리가 말하는 SENSOR ORGAN(감각기관)에 의해 파악된 세계에 대한 저주가 있다는 것이다. 그건 불교도 그러하다. 바커스 축제 때 광란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 이성을 되찾으면서 느끼게 되는 후회는 인간 스스로 저열하다고 자책할 수 있다. 명백하게 그들의 인식론과 우주론과 이데아가 중용 사상과는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밝은 빛에 나갔다가 동굴로 다시 들어오질 않는가?, 기독교도 예수가 다시 코스모스로 진입한다. 빛이 어둠의 세계로 들어와 인간을 구원하다 죽는 것이다. 이 세계를 버리고 저 세계로 가는 것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승과 저승의 문제는 동양의 중용사상에선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다. 현실을 버리고 이데아 세계를 쫓는 것은 인류에 대한 자학(自虐)이다. 오히려 플라톤이 중용은 자연이 제일 잘 지킨다고 한 말은 동양사상과 유사하다. 동양의 중용은 감성과 이성의 구분이 없어야 한다. 좋음의 이데아 적도(適道)와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