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는 말에 대하여 나는 어릴 때 이미 보고 알게 됐다. 세치 혀의 무서움이다. 우리 윗집에 살던 나보다 한 살 많은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이 못마땅한 짓을 할 때마다 “저놈의 자식 두 다리가 똑 잘라져라 !”라는 말을 자주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이 현실이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을에서 오리 길을 걸어 기차를 타고 시내에 있는 학교로 통학을 했다. 기차가 플랫폼에 서기 전, 뛰어내리는 위험한 행동을 즐기던 우리는 사고가 나던 날에도 기차가 역에 도착할 무렵, 하나, 둘씩 가방을 들고 뛰어내렸는데 이 친구는 불행하게도 열차 안으로 빨려들어가 두 다리가 잘리고 말았다.
살면서 본능에 충실하려는 사람과 이성으로 자신의 본능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가에 대하여 의견은 분분하지만 정확한 답은 없는 것 같다. 이성이 감성을 통제하는 것도 후유증이 있다. 치매(癡呆)다. 속을 끓인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약자가 겪게 되는 억눌린 감정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한(恨)이 되고 한으로 찌들고, 병든 뇌가 점점 고사(枯死)하게 되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아가 지배하는 데 흔히 이런 상태를 치매라고 한다. 뇌의 단백질화라고 하던가?
치매의 증상을 의학적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드러나는 행동을 보면 자동차의 축에서 빠진 핸들처럼 조절이 안 된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물건이나 음식에 집착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람을 기피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옛날 살던 집을 자신의 집이라 여겨 가출을 하려 한다. 이들은 현재의 기억보다 과거로 점점 회기하게 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기억하는 시간 속에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는 말이다.
내 몸의 주인이 혼백(魂魄)이라면, 혼백이 유한한 것인가 아니면 무한한 것일까? 또 육신은 영혼에 통제되는 것인가? 아니면 영(靈)과 육(肉)이 각각 발현하는 것인가? 퇴계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이(理)와 기(氣)가 각각 발현한다고 했다. 이(理)가 기(氣)를 태우면 칠정이 나타나고, 이(理)가 기(氣)를 타면 사단(四端)이 발현된다는 말이다.
꼭두각시(傀儡)는 매사(每事) 자기 뜻에 의해 결정하기보다 누군가 뒤에서 조종하는 자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보편적이다. 따라서 결정이 타율적(他律的)이고 자기의 생각과 충돌할 수 있다. 만약 조종자가 신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삶을 억압하기 때문에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에게는 짊어질 수 없는 멍에다.
내 안에 영육(靈肉)의 영역이 따로 존재해서 매번 결정할 때마다 욕망과 공리를 두고 대립하고 갈등하며 사는 것이라면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리(理)를 추구하는 에고(ego)인가? 아니면 기(氣)를 쫓는 욕망덩어리인가? 욕망을 갈고 다듬으면 순결한 자아가 형성되고 만들어져 긍국엔 천국(天國)이나, 극락(極樂)을 갈 수 있는 것인가?
극락과 천당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옮겨 놓은 가상공간(假想空間)과 같은 곳이다. 편안함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고, 희락이 있고, 황금이 가득한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없던 욕망덩어리를 누리고 향유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극락과 천당인 것이다. 그래서 이승이 아니라 저승이다. 곧 이곳이 아니라 멀리, 저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연의 본질은 스스로 순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명의 싸이클이 있는데 인간의 경우 “생, 노, 병, 사”가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유아기엔 부모에게 의탁해서 살고, 자라서 성인이 되면 짝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되고, 손자를 둔 부모는 늙게 되고 병을 얻어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스스로 곳곳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녀에게 부양(扶養)을 받으며 질병과 씨름하다 죽음을 맞게 된다.
과거 농업 중심의 대가족 제도 하에서는 이러한 궤가 보편적이었던 반면 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장치가 삶속으로 파고든 후, 공업화 시대가 되자 가족은 분화해서 핵가족화 됐고 생활 방식이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지게 됐다. 초기에는 꼬리 달린 개구리처럼 양쪽을 사이에 두고 오가는 것이 일반화 됐다. 농촌에는 노부모가 살고 도시엔 출가한 자녀들이 생활하며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부모 중 한분이 쓰러지면 맏아들이 부모 곁으로 내려가는 것이 자식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 알았다.
그러나 21세기를 살면서 개구리의 꼬리는 떨어져서 없다. 이젠 제각각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어느 시점까지 양육을 해서 독립시켜야 할지에 대한 설정은 미숙한 편이다. 다시 말해, 자식은 부모의 부양에 대한 의무를 스스로 내려놓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양육한 후 출가시킨 뒤에도 사회활동에 바쁜 자녀를 대신해서 손자의 양육을 책임지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다.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시대의 변화를 몸소 느끼며 미래는 노부모를 자식이 부양(扶養)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도 스스로 자립하는 정신을 누누이 강조하며 가르쳤다. 또 결혼식은 “서로 남이 되는 공식 선언이다.”라고 했다. 결혼은 새로운 가정의 탄생을 의미한다. 부모가 그들 공간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 불안전한 가정은 언젠가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하나가 돼서 자신들의 꿈을 꾸고 이뤄 가는데,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감 놔라, 팥 놔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장모님이 사 년간 요양원에서 치매를 앓다 작년 5월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비교적 의식이 또렷했을 무렵 딸들을 출가시키라는 말을 강조해서 수차례 반복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뜬금없다고 생각하고 건성으로 대답을 한 채 넘겼는데, 그 무렵 둘째 딸이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서둘러 결혼하겠다고 했다. 결혼이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로 한 여자의 운명이 달린 일이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다. 까닥 배필을 잘 못만나면 인생이 꼬인다는 이야기다. 딸의 고집으로 사위 될 친구를 만났고 착한 품성을 보고,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둘은 결혼과 동시 임신(妊娠)했고 그 아이가 지금 약 7개월을 맞았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한줌의 재로 변한다. 따라서 영혼만 남게 되는데 과연 그 영혼은 죽음과 함께 소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의 일부분으로 왔다 그에게로 수렴(收斂)하는 것인지, 아니면 혼백(魂魄)이 불변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 윤회(輪迴)하는 것인지, 이도 아니면 혼백의 불변성은 동일하나 현생에서 지은 카르마(業 )에 따라 사람, 축생 또는 미물로 태어나 또 다른 순환을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종교적 관점과 논리는 현생과 이승으로 이분화되고 사후세계의 환상을 강화시켜, 현생의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도록 하는데 논리적 방점이 찍혀져 있다. 따라서 현생의 삶을 가볍게 여기며 다가올 사후세계의 안녕을 소망한다.
저승은 고통이 없는 환락의 공간도 존재하지만 유황불과 악귀가 끊임없이 괴롭히는 지옥이란 공간도 있다고 한다. 지옥문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야를 믿고 그의 중재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는 예수의 십자가요. 또 하나는 미륵불의 수레바퀴(卍)다. 수레바퀴엔 선(禪)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때 극락(極樂)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십자가는 메시야의 대속(代贖)에 의해 모든 죄와 악행이 눈처럼 깨끗하게 씻기어 환락의 세계인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현세에서 쾌락을 금기시 하면서 내세에서는 쾌락과 부(富)를 담론(談論)하는 것에서 논거(論據)의 불일치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죄를 짊어지고 갈 경우 지옥 불에 떨어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지만 인간의 혼백은 고통을 느낄 만한 그 어떤 감각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때 이 주장 또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의 주장은 인간을 종교의 틀 안에 가두고 조련(調練)해서 “믿음”으로 포장하고, 억지 논리에 반박하지 못하도록 한 후,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표면상 선함을 드러내려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사악함이 밑바닥 깊은 곳에 자리한다. 이런 행위를 흔히 위선이라고 한다.
영혼이 신에게로 수렴된다면 인간의 사후는 무의미한 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업(業)도 신의 것이므로 자연 소멸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하나의 개체(個體)로 존재한다면 혼백의 카르마는 절대자의 심판에 의해 다음 생에 지위가 결정지어지든가 아니면 축생을 비롯한 그 어떤 생명체로 다시 이 세상에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설은 이런 의미와 부합(符合)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미물로 변하지 않는다면, 전생에서 쌓았던 공덕이나 악행이 사후에 혼백이 윤회할 때 잘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가 결정되고 그 안에서 부모의 빈부가 결정되며, 살면서 길흉화복이 결정지어진다고 가정할 수 있다.
만약 전생에 살인죄를 저지른 자가 있었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죄를 갖고 태어나 손톱과 발톱이 빠질 정도로 힘든 노동을 하지만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동전 한 닢으로 목에 풀칠할 정도라고 가정하자. 또 남의 부를 강탈하거나 기만(欺瞞)을 통해서 취했는데 다음 생에서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어긋나 끝없는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는 게 인과응보(因果應報)로 확신한다면 아마 모름지기 인간은 굳이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도 선하게 살려고 끝없이 노력할 것이다.
손녀딸이 태어나기 전, 딸과 사위에게 계획된 임신을 말한적이 있다. 우선 경제적 여력을 갖춘 후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후 계획된 출산을 바랐기 때문이다. 새도 새끼를 키울 환경이 안 되면 알을 낳지 않는다고 한다. 하물며 사람은 미물에 비할까? 옛날 어른들 말씀이 “낳을 때 각자 제 밥그릇은 차고 나온다.”라는 말씀을 하곤 했지만 요즘 세상처럼 적자생존을 다투는 야박함 속에서 경쟁력이 없는 아이는 도태의 길을 걷게 된다. 부모의 능력이 곧 자식의 능력이 된 사회, 게다가 「남보다 뛰어난 비장의 무기」 없이는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가 아닌가?
손녀가 7개월에 접어들고 있는데 태어나서 그 아이가 일성(一聲)을 내고 얼마뒤 간호사의 말을 듣고 자지러지게 우는 모습을 보면서 “어 ! 이게 무슨 조화지?”라며 놀랐었다. 간호사는 손녀딸에게 "물과 분유를 먹인 후 신생아실에 있을 거예요"라는 말에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면서 얘가 말귀를 알아듣나?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와 동시에 장모님의 지난해 돌아가시기 전 모습이 연상됐다. 딸을 빨리 결혼시키라고 하던 말씀과 이 아이의 출생에 연관성(聯關性)을 따지게 된 것이다. “혹시 장모님이 우리의 가족으로 환생한 것인가?” 나의 상상은 어처구니가 없는 줄 안다. 그러나 상상은 할 수 있으니까, 하게 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기는 말은 못해도 귀는 열려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소리와 말들에 대하여 늘 경청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 또 갓난아기지만 처세술이 어른을 뺨친다. 딸이 우리 집에 다니러 와서 하루 밤을 자려면 손녀딸은 큰 소리로 울어댄다. 모르긴 해도 낯선 곳에서 잠을 잔다는 게 불안한 모양이다. 또 딸네 집에서 손녀를 봐줄 때는 어미가 없는 걸 알고 그렇게 착하게 굴 수 없다. 천사 같다. 단 딸이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 만이다. 딸이 돌아온 후엔 180도 달라져 안면을 바꾼다. 어린아이의 생존전략일 테지만 너무나 치밀하고 디테일하다. 자기를 양육하고 있는 어미를 쫓고, 어미가 직장에 갈 때는 자기를 돌봐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잘따르는 것이다.
자연은 순환의 고리를 통해 스스로 생존하고, 소멸한다. 인간처럼 내재된 사고의 영역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또 인간은 세대를 통해 켜켜이 쌓아온 것들을 학습하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면서 고등동물로 변화되고 있다. 인공지능이란 아바타를 만들어 기계의 조상이 된 현 인류는 기계에 의해 미래의 삶이 위협받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국에서는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언론에서 과거 살았던 장소와 가족을 기억했고 실제 자신의 딸과 만나서 과거 자신의 행적을 이야기 하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기억하는 것과 당시의 상황이 일치했다. 그렇다면 전생은 존재한다는 것인가?
만약 존재한다면 현세를 살면서 쌓은 업(業)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아마 다음 생에 업을 지고 가지는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누구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대부분 사람들이 고뇌하고, 번뇌하며, 육체적인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 얼마나 많이 고통스러워하는가?
이웃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비교적 세상을 떠날 때 고통을 덜 겪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려서 다니던 교회 권사님은 아침에 방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영면에 들었다. 우리 어머니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틀을 앓고 돌아가셨다. 그 때 어머니는 앞산에 당신을 데리러 온 사자(使者)가 있는지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던 모습이 생생하다.
로마시대 소 카토는 카이사르와 정쟁을 하던 중 카이사르의 힘에 밀려 정치적 입지가 줄어들자 자살을 결심하는데,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플라톤이 쓴 ‘파이란’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하고 아들이 의사를 미리 불러 대기하고 있다가 아버지의 비명소리를 듣고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내장을 끄집어내 절명했다. 파이란에서 플라톤은 다음 생을 이야기 했는데 아마도 다음 생을 믿고, 현생을 서둘러 떠난 듯하다. 우리의 생은 수레바퀴처럼, 자연 속에서 지고 또 피는 꽃처럼, 운명의 궤를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회(輪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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