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 안에 나의 주(主)가 있다.

해암 송구호 2019. 5. 9. 01:35



 사랑과 영혼의 명장면은 여주인공 몰리가 물레에 앉아 도자기를 빚고 있고 그녀의 등 뒤에서 남자 주인공 샘이 그녀를 도와 도자기를 만드는 장면이다. 샘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음을 맞았지만 여자친구 곁을 떠나지 못한다. 관객들은 샘이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영화 속 여자 주인공 몰리는 샘이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다. 수호신처럼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상상하면 그것처럼 편안할 수 없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이 영화를 보다보면 나도 모르게 행복감에 푹 빠지고 만다.

  일본 영화감독인 타키타 요지로의 "비밀"을 처음 본 순간 심장이 멋을 것 같은 충격에 빠졌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모녀의 여행에서 시작된다. 엄마 나오코와 딸 모나는 홋카이도로 여행을 떠나다 교통사고로 엄마가 죽으면서 그녀의 영혼이 딸의 영혼과 뒤바뀐 후 일어나는 해프닝을 담고 있다. 나오코는 남편 헤이스케와 잠자리를 하고 싶어서 남편을 자신의 잠자리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헤이스게는 딸 모나의 이상행동에 깜짝 놀란다. 그러나 나오코는 헤이스게와 둘만 아는 추억을 들추면서 자신이 바로 나오코라고 말하며 헤이스케에게 다가간다.

 남편은 뒤늦게 아내와 딸의 영혼이 뒤바뀐 사실을 깨닫지만 눈으로 보이는 모습은 딸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자신의 아내란 사실에 커다란 갈등을 느낀다. 영화는 인간의 껍질인 육체가 

 본질인 영혼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형식이 내용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은 가시적 여부와 관계한다. 그것은 곧 사회적 통념이고 관습이다. 결국 헤이스케는 딸의 남자 친구와 아내인 나오코를 서둘러 혼인 시킨다. 아내도 자신은 나오코지만 겉모습이 딸 모나란 사실 때문에 더 이상 남편 곁에 머물지 못하고 결혼하기로 한다. 

 나의 육체 안에 내재된 나는 누구인가? 이제껏 나는 영과 혼에 대한 생각이 깊지 않았다. 단지 학습을 통해 자아가 성장하고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 신념이 돼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고 주관적 논리를 갖게 된 것이라고 믿었다. 이 과정에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엮어 놓은 책들이 학습자료로 소용됐다고 봤다. 따라서 공부를 많이 한 자가 덜한 자에 비해 통찰력이 깊기 때문에 지성인이고 나보다 우수한 두뇌를 지녔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뇌에 저장할 수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최근 나는 코마 상태에서 27년 만에 깨어난 아랍에미리트의 무늬라 압둘라의 사례와 미국 펜실버니아주에 클레어 코스 벤스 부부의 경우를 보면서 영혼에 대하여 숙고(熟考)하게 됐다. 이를테면 육체와 영혼은 각각 별개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육체를 영혼의 집이라고 한다면 영혼은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나인 것이다. 컴퓨터로 비교하면 육체는 소프트웨어가 되고 영혼은 하드웨어인 셈이다. 

 얼마 전 이어령 교수가 쓴 '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책을 읽던 중 사람의 영혼을 저울로 재보니 그 값이 약 1온스(28.35g)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선 이 분야에 전문가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한 자료라 신뢰도가 높았고, 사람이 죽는 순간의 체중 변화를 조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하는 자들을 통해 죽는 순간 미세한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몸무게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곧 내 안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어사전에 혼백(婚配)의 정의를 보면 사람의 몸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거느리고 목숨을 붙어있게 하며 죽어도 영원히 남아있다는 비물질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라고 정의돼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다.(Who am I,  I am who I am) 어찌 보면 이제까지 삶은 껍질의 나로 살아왔던 것 같다. 내 안의 나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뒤늦은 자각(自覺)인지 모른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폈던 퇴계 이황은 리와 기가 각각 발동한다고 봤다. 따라서 리가 기를 업으면 사단(四端: 인의 측은지심, 의의 수오지심, 예의 사양지심, 지의 시비지심)이 발현되고 기에 리를 태우면 칠정(七情: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이 드러난다고 했다. 이성과 감성의 발동을 언급한 것이다. 인간의 경우 조물주가 창조한 후에 스스로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했다. 자연의 이치다. 

 태엽이 달린 인형처럼 신의 손에서 놓아졌지만 태엽이 풀린 후엔 모든 기능은 멈추게 된다. 자율적이지만 유한한 자율이다. 정지되는 순간 내 안에 나도 조물주에게로 수렴(收斂)된다고 봐야 한다. 나는 나다란 말속엔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나는 유한한 존재이나 내 안에 나는 무궁(無窮)한 존재다. 예를 들어 장난감 인형의 태엽과 같은 존재로 언제든 조물주가 내 속에 나를 움직여서 나를 통제할 수 있다. 나는 나대로 행동하지만 그것이 때로 방종할 수 있는 것은 장난감 인형이 땅 위에 올려놓으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내 안에 내가 나를 간섭하지 않을 때는 방종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의 나를 자극(刺戟)하면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 즉 이성의 상태로, 퇴계의 리가 기를 업은 것과 상통(相通)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