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유대인에게 피값을 물린 독일(獨逸)
1348년6월경 페스트는 티롤지방 알프스를 넘어 바이에른에서 위세(威勢)를 떨쳤고 그해말 모젤 계곡(溪谷)을 지나 북독일로 진행(進行)했다.
페스트가 유독 독일의 성직자(聖職者)에게 폭력(暴力)을 행사한 것으로 보일정도로 많이 죽었다. 35%의 고위(高位) 성직자가 이 기간에 죽었다고 말한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 기간 중에 성직자 부족으로 겸직자가 늘고 성당을폐쇄( 閉鎖)하는 경우도 늘었고 지도력도 약해졌으나 공포(恐怖)의 시간에 들어온 많은 기부금(寄附金) 덕택으로 재정적(財政的)으로 번성(繁盛)했다.
독일 흑사병의 충격적(衝擊的)인 부산물(副産物), 채찍 고행단(苦行團)
육체(肉體)의 굴욕(屈辱)을 위해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는 행위(行爲)는 11세기 초 이탈리아의 수도사 사회(修道士 社會)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일종(一種)의 집단 자학 행위(集團自虐 行爲)였던 이 행위는 그후 200년간 外部로 알려지지 않았다. 채찍은 일종의 막대기였으며 커다란 매듭이 있는 세개의 줄이 달려있다. 매듭에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쇠징이 박혀있는데 그 길이가 밀의 낟알정도였다. 그들은 이러한 채찍으로 벌거벗은 몸을 때렸고 그결과 몸이 부어오르고 시퍼래졌으며 세게 채찍질을 하는 바람에 징이 살에 박혀서 렌치로 빼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집단 히스테리에 사로잡혀 자신의 몸을 이러한 시련에 던졌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33일동안 하루에 두세 번씩 이 일을 반복했다고는 인정하기 어렵다. 형제단은 규칙상 목욕, 씻기, 옷 갈아입기가 禁止되었다. 이렇게 순례단에서 순례를 마친다는 것은 물리적(物理的)으로 불가능(不可能)했다.
사람들이 증오(憎惡)할 만한 적당한 목표물(目標物)을 찾아라
독일 채찍 고행단은 앞장서서 가톨릭 교회의 위계(位階)를 부인(否認)했으며 성찬(聖餐)의 성례(聖禮)를 비웃고 존중(尊重)하지 않았다. 고행단(苦行團)이 종교의식(宗敎儀式)을 방해하거나 교회(敎會)에서 사제(司祭)를 몰아내고 교회 재산(交會 財産)을 약탈(掠奪)한다는 소식(消息)이 전해졌다. 클레멘스 6세는 처음 채찍순례단(巡禮團)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교리(敎理)에 반하는 행동(行動)을 일삼자 그들의 순례를 막을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독일과 프랑스, 에스파냐 거의 모든 도시에서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에 종사(從事)했는데 이는 원했다기 보다는 군사(軍事)에 관계(關聯)된 일을 전혀 할 수 없었고 땅을 소지하거나 장인(匠人)으로 작업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만 그들이 할 수있는 유일(唯一)한 경제활동( 經濟活動)이었다.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禁止)되었다. 13세기 번성(繁盛)하던 고리대금업(高利貸金業)은 14세기 경제 침체기(經濟 沈滯期) 당시 세력이 약화(弱化)되었고 기독교계의 재정가(財政家), 특히 이탈리아 은행(銀行)가들이 시장의 알짜배기를 점차 잠식(蠶食)하기 시작(始作)했다. 유럽 대부분 지역(地域)에서 유대인들은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 업자(典當鋪 業者)로 전락(轉落)한다. 유대인들이 군소 채무자(群小 債務者)들과 많이 거래(去來)하게 되자 이들을 쫓아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매일 늘어났다.
돈을 빌려주던 유대인들이 불안전성(不安定性)과 박해(迫害)에 대한 조처(措處)로 무자비(無慈悲)하게 행동(行動)했던 것은 당연했다. 채무자가 제대로 빛을 갚으려는 의사가 없을 경우 자기 돈을 돌려받을 만한 제제가 전혀 없었다. 영주(領主)가 보호(保護)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의 안전(安全)을 스스로 보장(保障)받기 위해 당국에 더 많은 뇌물(賂物)을 제공해야 했고 뇌물비를 충당하기 위해 더 높은 이자(利子)를 부과(附課)하고 고객들을 심하게 다루어야만 했다. 증오감(憎惡感)은 더욱 커졌고 14세기 중엽 샤일록이 탄생했다. 유대인들은 유럽사회에 증오(憎惡)의 대상으로 부각(浮刻)되면서 어느 시점(視點)에선가 폭발(爆發)할 수 있는 뇌관(雷管)이 되었다.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다
유대인 박해(迫害)가 경제적 이유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작은 이유가 되긴 했어도 주요한 이유는 아니다.중세에 팽배(澎湃)하던 적그리스도라는 이미지는 제 1차 십자군 당시 효력을 발휘했다. 일부 무책임한 사제(司祭)들은 유대인이 기독교 어린이들을 납치(拉致)하여 신성모독(神聖冒瀆)을 했다는 악소문을 퍼뜨렸다. 유대인은 사탄(詐誕)에 복종하는 악마(惡魔)로 여겨졌고 성극(聖劇)이나 회화(繪畵)에서 염소수염과 뿔을 달고 돼지, 개구리, 벌레, 뱀, 전갈과 그외 뿔 달린 짐승과 같이 지낸다고 그려졌다. 일반 공직자(公職者)들 역시 유대인의 사악성을 퍼트리는데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1267년 비엔나 의회(議會)에서는 중독 가능성(中毒 可能性)의 이유로 유대인에게 육류(肉類)를 구입하는 행위(行爲)가 금지(禁止)되었다.
유대인의 잠재적(潛在的)인 두려움과 증오(憎惡)는 흑사병으로 더욱 불타 올랐다. 유대인이 멸종(滅種)하면 흑사병과 복수(復讐)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유혹(誘惑)이 생겨났다. 실제적으로 기독교 마을 우물에 유대인이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구가 밀집된 우물은 인근 하수구(下水溝)의 누출(漏出)로 오염(汚染)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기본 위생에 더 철저한 편이었기 때문에 거리가 좀 멀어도 시냇물을 길어 마시기를 좋아했다. 평상시 이런 행동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페스트가 도는 시기에는 아주 의심스러울 수 있다. 유대인은 역시 기독교인과 마찬가지 속도(速度)로 죽어갔다. 유대인들은 비위생적(非衛生的)이고 사람들이 많은 게토(ghetto/ 貧民街)에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은 이러한 현실(現實)은 모른 척했다.
심해지는 흑사병(黑死病), 끝이 없는 증오(憎惡)
1348년과 49년 유대인을 지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박해의 첫 사건은 1348년 봄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推定)되며 5월에는 프로방스에서 대학살(大虐殺)이 있었다. 특히 나르본과 카르카손은 철저하게 그 공동체(共同體)를 멸종(滅種)시켰다. 1348년 9월 노이슈타트의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이유로 시용(Chillon)에서 유대인에 대한 재판(裁判)이 거행(擧行)되었고 고문에 의해 끔찍한 자백(自白)이 발표(發表)됐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 퍼지는 기폭제 역할(起爆劑 役割)을 했다.
대체적으로 유럽의 군주들은 유대인 신민(臣民)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대부분 별 효과(效果)가 없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특히 결단력(決斷力)과 책임감(責任感)을 가지고 처신(處身)했다. 칠롱의 재판 이전과 이후 그는 대학살(大虐殺)을 비난하는 칙서(勅書)를 발표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인내(忍耐)와 절제(節制)로 처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유대인 박해(迫害)는 흑사병과 더불어 줄다가 1351년경 모두 끝났다.
6. 흑사병은 교회와 인간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변화(變化)시켰다.
사람들과 교회를 向한 하나님의 진노(震怒)
중세에 인간의 정신 건강(精神 健康)과 그가 존중(尊重)하던 윤리(倫理)는 당연히 교회(敎會)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었다. 중세인은 의심(疑心)없는 신앙(信仰)을 가졌고, 교회제도(敎會制度)에 심리적(心理的)으로 완전(完全)히 의존(依存)했다. 흑사병(黑死病) 이후 중세인(中世人)은 교회가 자신을 실망(失望)시켰다고 느꼈다. 페스트는 하나님의 행위(行爲)라고 간주(看做)되었다. 교회는 어떤일이 진행되는지 틀림없이 보았으면서도, 전능자(全能者)의 인내(忍耐)가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신호(信號)를 전혀 주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교구 목사(敎區 牧師)가 교구인(敎區人)과 마찬가지로 , 아니 그 이상으로 페스트로 죽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사람들이나 교회 모두에게 뜨거워 보였다. 신도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사제(司祭)를 보면 왜 교회가 흑사병 사건으로 신임을 잃었는지 이해가 된다. 페스트가 터지면서 자기관리를 잘 하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반면 자신을 위험에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은 죽었다. 최고(最高)의 성직자(聖職者)는 죽은 반면 최악(最惡)의 성직자(聖職者)는 살아남았다.
쇠퇘(衰頹)한 영적 권위(靈的 權威), 성장(成長)한 종교적 열정(宗敎的 熱情)
중세 교회는 신분(身分)이 미천(微賤)한 사람들이 경제 사회적(經濟, 社會的)으로 진출(進出)할 수 있는 거의 유일(唯一)한 기회(機會)였다. 교구에 기부금(寄附金)이 늘면서 사람들은 수도원(修道院)의 의미를 잊게 되었다. 많은 수도승들은 언제나 편하고 때로는 사치(奢侈)스러운 생활방식(生活方式)에 익숙해 있었다. 이제 십일조(十一租)가 걷히지 않고 장원(莊園)의 수입이 줄자 수도원(修道院)은 경제(經濟)가 적자(赤字)가 되었다. 흑사병(黑死病)은 수도원(修道院)의 쇠퇴 과정(衰頹 過程)에 가장 중요(重要)한 요인(要因)이 되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페스트 이후 몇 십 년은 교회(敎會)의 특권(特權)과 영적(靈的)인 권위(權威)가 쇠퇴(衰頹)한 동시(同時)에 종교적(宗敎的)인 열정(熱情)이 성장(成長)한 시기(時期)다. 영국 전역(全域)에 산재(散在)한 기부 예배당(寄付 禮拜堂)이 그 실례(實例)다. 유럽 전역에서도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건립(建立)되었는데 밀라노 성당이 대표적(代表的)이다.
유럽의 부자(富者)들은 흑사병 기간(黑死病 期間)과 그후 광적(狂的)인 자선행위(慈善行爲)를 통해 자신들이 외관상 사회적(外觀上 社會的)인 수양(修養)이 남아 있는 한도 내(限度 內)에서 제도(制度)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교회(敎會)는 신임(信任)을 잃었어도 여전히 귀족(貴族)과 돈이 많은 엘리트 사회(社會)에서는 무정부 상태(無政府 狀態)의 반란(叛亂)을 막아낼 방벽(防壁)이었다.
https://youtu.be/GheZ-nxuR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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