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The Black Death(흑사병)1

해암 송구호 2020. 9. 5. 10:23

 

 
책명 : 흑사병(黑死病)
저자 : 지글러(Phillip Ziegler) 옮긴이 : 한 은경
알레고리(allegory)화 :  어떤 주제 A를 말하기 위하여 다른 주제 B를 사용하여 그 류이성(類似性)을 적절히 암시하면서 주제를 나타내는 수사법, 은유법(隱喩法)과 유사한 표현법이다. 
 예) 제단화(祭壇畵) 중 하나로 하나님이 페스트의 화살로 사람들을 죽이고 있으며, 성모 마리아는 인류를 전염병에서 구하기 위해 중재(仲裁)한다.
흑사병(黑死病/ 페스트 Pestis / The Black Deaths)
1. 중국에서 시작된 재앙(災殃)의 조짐(兆朕) 
 14세기 중국은 유럽 사회에서 멀고 먼 나라였다. 아마 그곳에 하늘이 무너졌다고 해도 그저 남의 일로 생각 될 만큼 유럽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때의 일이다. 1346년경 멀리 동양에서 기이하고 비극적(悲劇的)인 사건(事件)이 발생했다. 가뭄과 홍수(洪水)가 1333년 창쟝(長江) 화이허(淮河)를 水原으로 삼던 평야들이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그후 홍수로 4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 홍수로 친저우(欽州)산이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다. 1334년 후광(湖廣)과 후난(湖南) 지방에는 가뭄이 심했고 메뚜기떼와 기근(飢饉), 페스트가 그 뒤를 이었다. 치먼찬(祈門站) 山의 지진(地震)으로 그 둘레가 백 리그(1리그는 약 3마일 정도)가 넘는 호수(湖水)가 생겨났다. 저(浙) 지방에서는 500만 명이 넘게 죽었다고 한다. 지진과 홍수는 1337년부터 45년까지 계속되었다. 메뚜기 떼는 그 어느 때보다 파괴적(破壞的)이었고 광둥(廣東) 지방에는 지하 천둥이 쳤다.
 동양의 대인도 근처 어떤 지방에서 공포(恐怖)와 전대미문의 폭풍(暴風)이 사흘 동안 전 지역을 휩쓸었다. 첫날에는 개구리와 뱀, 전갈과 그외 여러 독을 띤 짐승들이 억수처럼 몰려들었다. 둘째날에는 천둥이 울리고 번개와 불이 땅을 내리쳤으며 굉장한 크기의 우박(雨雹)도 내렸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沒殺)당했다. 셋째날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 그 지독한 연기(煙氣)로 남아 있는 사람과 짐승 모두가 몰살되었으며 이 지방의 마을과 도시가 전소(全燒)되었다. 이러한 폭풍으로 전 지역에는 전염병이 창궐(猖獗)했다. 남쪽에서 온 나쁜 바람으로 해안 지대와 인근 땅이 모두 전염(傳染)되었으며 점점 그 독성(毒性)이 늘어났다고 한다.
 페스트를 제어하려 했던 중세 의사들은 바로 이 부패(腐敗)한 대기가 안개나 연기(煙氣) 형태(形態)로 지구를 떠다니면서 접촉(接觸)해 발병한다는 가설(假說)을 세웠다. 1346년 유럽의 큰 항구(港口)에 소문(所聞)이 돌았다. 인도의 인구가 격감했고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아르메니아에는 시신이 가득하다. 쿠르드족은 산으로 피신(避身)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카라마니아아 카이사레아에서는 사람들이 몰살당했다. 그러나 이 소문과 유럽을 연관(聯關)짓는 사람은 없었다.
 가브리엘 데 무시스는 이 질병(疾病)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널리 퍼뜨리게 되었는지 상황적으로 잘 설명한다. 1346년 페스트가 소아시아의 타타르 지방에 정착했다고 말한다. 페스트로 크림반도에서만 8만 5,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페스트는 바그다드(이라크)를 거처 티그리스 강을 따라 아르메니아를 지나 크림지방의 이탈리아 상인들의 화물항을 통한 길이 동양에서 유럽으로 향료와 실크가 교역(交易)되던 주요 무역로(貿易路)였다. 페스트는 대상을 거쳐 크림지방의 타타르인들에게 퍼졌으며, 비잔틴 제국의 황제인 요한 칸타쿠제노스(John Cantacuzenos)에 따르면 북국의 스키타이인들이 이 전염병에 최초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중세인에게 이런 엄청난 규모의 전염병에 대한 방비(사회적, 의학적, 심리학적)가 없었다.
흑사병(黑死病) 이름의 시작
 일반적으로 피해자의 썩어가는 살덩이가 죽기 얼마 전부터 검어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럴듯한데 이런 현상이 당시에 통용되지 않았다. 패혈증적인 페스트의 경우 검은색이나 자주색 반점이 나타나지만 당시 유행했던 선(腺)페스트는 그런 현상이 없었다. 18세기 에 이르러 이런 용어가 사용 된 듯하다. 흑사병 이라는 이름이 전염병이 돌기 전 나타난 검은 혜성(彗星)에서 유래한다거나 死亡者가너무 많아 상복(喪服)을 입는 사람이 많아 등은 그 주장이 신빙성(信憑性)이 떨어진다. 라틴어인 페스티스 아트라(pestis atra) 또는 아트라 모르스(atra mors)를 스칸디나비아어로 곧이곧대로 직역했다는 것이다. 14세기에 아트라는 검은이라는 의미 외에도 지독한이나 무서운이라는 의미를 함축(含蓄)했다.
알 수 없는 흑사병(黑死病)의 감염경로(感染經路)
중세 의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일정 지역에서 갑자기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가는 상황(狀況)에 직면했다. 죽음의 지역은 끊임없이 새로운 영토(領土)로 확장(擴張)해 옮겨갔다. 공기 중에 사악(邪惡)한 기운이 있어서 바람에 실려 또는 스스로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다. 14세기 재난(災難)으로 많은 인명피해(人命被害)가 났고 시신(屍身)이 부패(腐敗)하면서 발생된 오염(汚染) 된 공기로부터 전염(傳染)된다고 믿었다.
 오늘날 병자(病者)를 만지는 것만으로는 전염되지 않는 것이 밝혀졌다. 대부분 병이 입김으로 전염된다고 믿었다. 몽펠리에 한 의사는 병자(病者)를 보기만 해도 죽는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재난이 계속 겹치면서 시체더미가 매장되지도 않고 그대로 쌓인 결과 흑사병(黑死病)이 시작되었다고 유능한 의사 크라이튼이 밝힌 지 이제 겨우 100년이 되었다. 그는 사제(司祭)나 수도승(修道僧)이 많이 죽은 이유가 시체(屍體)의 중독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우리는 크라이튼의 실수에 너그럽게 미소(微笑)를 짓는다.
전 세계 전염병에 대한 세 개의 기록이 남아있다.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최초의 전염병은 542년 이집트에 도착했다. 이병이 날뛰면서 로마 제국의 권력(權力)까지 약화시킨 후 유럽을 거쳐 영국으로 넘어가 캐트 월라더 시대의 페스트로 알려졌으며 664년 아일랜드를 초토화했다. 두번째 전염병이 흑사병이다. 1665년 영국의  대페스트 역시 이에 속하며 17세기가 되서야 잠잠해졌다. 마지막 전염병은 1892년 윈난(雲南)에서 시작하여 1896년 봄베이에 상륙했다. 인도에서만 600만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남아메리카에 침투(浸透)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건재(健在)하다.
 
선(腺), 폐(肺), 패혈(敗血) 페스트
 중세 전염병의 기원에 대한 연구(硏究)가 최근 러시아 고고학자 촐슨(Chwolson)에 의해 이뤄졌다. 조사에서 중앙아시아의 세미리 싱크(Semirechisk)지방의 이식쿨(Issyk -Koul)호수 근방(近傍)을 조사해보고 1338년과 39년에 비정상적(非正常的)으로 사망자 수가 많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네스토리우스교의 비석에도 죽은 이유가 페스트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여기서 병은 동쪽으로는 중국으로, 남쪽으로는 인도로, 그후 8년 후에는 서쪽인 크림 지방에 닿았다.
 역사적(歷史的)으로 세균(細菌) 파스튜렐라 페스티스(Pasteurella Pestis)는 예전부터 동물의 혈관이나 벼룩의 위장에서 서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세균은 특히 케오피스 벼룩(Xenopsylla Cheopsis)을 좋아했고, 이 벼룩은 특정 설치동물의 털 속에 기생(寄生)했다. 1338년 이식쿨 호수에  만주 마모트(다람쥐와 비슷 / 毛皮 사냥꾼 標的)였을 것으로 추정(推定)되며 들쥐의 경우 병이 확산(擴散)되는 과정에서 활약했다. 홍수나 가뭄이 이동을 자극했고 거친 검은 들쥐인 애급쥐가 주동자 역할(主動者 役割)을 했다. 들쥐는 전염병(傳染病)의 초기 단계(初期 段階)를 제외(除外)하면 들쥐의 역할(役割)은 미미하다.
14세기 유럽에 들끓었던 들쥐는 십자군이 돌아오는 배를 통해 유입되었다고 추정(推定)된다. 들쥐가 공격적(攻擊的)이지 않았고 당대인들이 그활동에 대해 기록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존재(存在)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케오피스 벼룩은 숙주에서 떨어져 나와 1달을 버틴다. 곡식이나 피륙에 붙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아 남는다. 증상은 종기 즉 염증을 일으킨 임파선의 부풀어오른 수종 덩어리가 가장 고전적인 징후다. 종기의 크기는 아몬드만하거나 오렌지만하다. 보통 사타구니에 주로 생기지만 겨드랑이나 목에도 나타난다.
선(腺) 페스트에 걸리면 보통 4~ 7일 이내 죽는다. 폐 페스트는 1.8일 밖에 못 살았다. 선 페스트는 전염이 덜한편이다. 호흡(呼吸)의 영향(影響)을 받지 않으며 환자(患者)는 균이 혈관(血管)에 축적되어 벼룩의 전염물질의 근원이 되기 전에 죽거나 회복(回復)되었다. 그러나 폐 페스트는 전염이 아주 강했다. 이  페스트는 폐를 공격하여 피 기침을 야기하고 화자가 숨을 쉴 때마다 폐스트균이 공기중에 퍼져갔다. 패혈 페스트는 해충(害蟲)을 매개로 하지만 전염균이 혈관을 공격하면 한, 두 시간 내에 혈관에 균이 우글댄다는 점이 다르다. 피해자는 종기가 생기기도 전에 죽는다. 이런 병자를 숙주로 한 벼룩인 풀렉스 이리탄스는 굳이 들쥐가 아니어도 페스트는 새로운 먹이를 공격할 수 있다.
2. 재앙(災殃) 이전의 유럽
14세기 중반 유럽의 경제(經濟)와 사회적 상태(社會的 狀態)는 중요(重要)한 자료(資料)다. 흑사병(黑死病)이 돌기 7, 80년 전에는 날씨가 극도(極度)로 추워 알프스에서는 물론 북극에서도 빙하(氷河)가 내려왔고 비가 많이오면 카스피해의 수면이 올라갔다. 인구는 급격(急激)하게 증가했고 농작물(農作物)의 수확량은 자연 재해로 감소되어 식인 행위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개, 고양이, 비둘기, 심지어 자기 아기까지 먹었다고 한다. 태양열(太陽熱)의 감소로 소금 생산량(生産量)이 줄자 그나마 얼마 안되는 고기를 저장할 시설이 없어 악순환(惡循環)은 반복되었다. 흑사병 이전 유럽 전역은 불경기 였거나 최소한 침체기 였다고 볼 수 있다.
 흑사병이 유럽에 도래(到來)했을 때 저항(抵抗)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그 병을 맞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중세의 농부(農夫)는 전쟁(戰爭)으로 지치고 영양실조(營養失調)로 약해졌으며 점점 더 황폐(荒廢)해져가는 땅에서 얼마되지 않는 식량으로 살아가려고 버둥대고 있었다. 완전히 힘을 소진한 그들은 한대 맞기도 전에 이미 육체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재난을 맞이하여 쓰러질 준비(準備)가 되어 있었다.
 인류(人類) 불가항력(不可抗力)적 운명(運命)
 재앙(災殃)의 징후(徵候)가 여러 곳에서 감지(感知)되었다. 짙은 안개와 구름,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 파리 하늘에 나타난 불덩이, 불기둥이 아비뇽 교황청 위에 있었다. 성 마르코 성당의 종, 심하게 흔들리는 베네치아 땅, 지나칠 정도로 풍작이었던 헤이즐너트 농사 등은 후에 페스트의 전령으로 식별(識別)되었다.
1348년 필립 6세의 명에 따라 파리 대학교의 의학 교수진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345년3월20일 오후 1시 물병자리에서 토성과 목성, 화성이 만났다. 토성과 목성이 만나면 죽음과 재난이 일어나고 화성과 목성이 만나면공기 중에 역병이 돈다고 한다. 분명 이 세 행성의 결합은 대단한 전염병을 의미했다.

 

3. 저주받은 이탈리아
 1347년 10월 초 흑사병이 시칠리아에 도착하고 석 달 뒤에 이탈리아 본토에 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12척의 제노바 겔리선에 의해 메시나 항에 전염병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이 배는 몇개월 전 크림 지방에서 출발했음이 분명하다. 며칠 후 페스트는 도시를 완전히 휩쓸었다. 시민들은 방어할 수 없는 재난의 짐을 가져온 선원들을 항구에서 몰아냈다. 선원들은 떠다니면서 흑사병은 지중해로 퍼지게 되었다. 재난을 수습하려던 공무원들이 피해를 당했고 멀리 남부 들판이나 포도원으로 피신 안전을 도모하려다 페스트는 시골까지 퍼졌다.
성수(聖水)도 성모(聖母)의 성상(聖像)도 소용이 없는 막막한 현실(現實)
 메시나 인들은 카타니아의 대주교에게 성 애거서의 유해를 메시나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카타니아인들의 반발도 거셌다. 대 주교는 유해의 일부를 물에 적시고 그 물을 메시나로 가져가겠다고 해서 중재를 했다. 대주교는 성수(聖水)를 들고 메시나에 도착했다. 도시는 개들이 시신을 훼손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원(願)했고 여론도 그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도(煉禱)를 외우며 시를 돌았는데 메시나 인들은 무시무시한 환영(幻影)에 시달리고 공포(恐怖)에 압도(壓倒) 됐다. 중세인들은 무서울 정도로 깊은 무지와 미신(迷信)을 기저(基底)에 깔고 있는 지식이라는 얇은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셈이었다. 성 애거서의 유해에 실망한 메시나 사람들은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알려진 동정녀 성상이 있는 성전까지 6마일을 맨발로 달려가 모셔왔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용감한 대주교는 메시나에서 돌아온 후 병에 걸려 카타니아 대성당(大聖堂)에 안치(安置)되었다.
 

 

 확산(擴散)되는 페스트, 암담한 이탈리아
 시칠리아 전역에 빠르게 번진 페스트는 튀니지를 거쳐 북 아프리카로,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로 이베리아 반도의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등으로 그리고 북 이탈리아로 퍼져 나갔다. 다른 선 페스트도 마찬가지지만 병과 주요 무역로는 대단히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다. 전염원이 들쥐라는 징후(徵候) 이기도 하다. 흑사병은 주로 해안가 마을을 강타했다. 병은 크림 지방에서 모스크바까지 내륙보다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국과 한자동맹 도시를 통해 퍼져 갔다페스트는 서유럽에서 시칠리아와 제노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1348년 1월 경에 동시 도착한듯 하다. 몇 주 후에는 피사를 통해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에 본격적으로 퍼졌고 내륙지방인 로마와 토스카나로 빨리 퍼져갔다.
 이탈리아는 페스트가 돌기 몇 년 전부터 재해가 계속되었다. 중국보다 덜했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재해(災害)는 점점 늘어나 서 페스트가 도착하기 직전 최고조(最高潮)에 달했다. 지진으로 나폴리와 로마(1349년 콜로세움 남쪽벽 붕괴), 피사, 볼로냐, 파도바와 베네치아가 큰 피해를 입었다. 1345년 7월부터 여섯 달 동안 거의 끊임 없이 비가 내려 많은 지역이 파종(播種)을 못했다. 1346년과 47년에는 식량난이 심각했다. 필연적으로 물가는 폭등했다. 밀 가격이 1347년 5월에 비해 2배 뛰었고,  피렌체인 4,000명이 영양실조(營養失調)로 죽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도시국가 중 가장 위생, 기근, 교육 등에서 뛰어났던 곳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정치적 불안이 삶을 궁핍(窮乏)하게 만들었다. 2020년 우리나라를 보는 듯한 상황이다.
데카메론으로 보는 피렌체 흑사병
피렌체는 인간의 지혜(智慧)로 흑사병을 피해보려 했다. 관리(官吏)들을 기용(起用)해서 불순물(不純物)을 시에서 없애고 아픈 사람들을 시에 들이지 않고, 건강 유지를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또한 하나님께 온갖 간언(諫言)을 구하고, 신자들의 공공 행진 반복했다. 그러나 그해 봄 병이 도시를 휩쓸고 갔다. 그런 와중에 살아 남은 자는 병자와 격리된 삶을 살았다. 절제(節制)된 삶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술을 먹고 공공장소에 자주들러 노래 부르며 아무 때나 웃고 조롱하는 것이 거대한 악의 치료법이라고 여겼다. 대부분 집은 활짝 열려 있었다. 죽음이 가까웠다는 생각 때문에 집은 활짝 열려 있었고 진짜 집주인과 이방인 간에 구분이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이의 집에 모여 같이 울고, 남자 친척들은  관을 짊어지는 것이 관례였으나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죽어가는 이의 머리맡에 여인들이 모여들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이세상을 홀로 하직했다. 애도는 웃음이나 농담, 축제 모임으로 채워졌다. 관을 운구하는 이도 하층민(下層民) 가운데 고용(雇傭)된 베키니(becchini)라는 이들이었다. 죽는 사람이 늘자 집에 시신을 두면 오염될까 두려워 집 밖으로 끌어냈고 짐꾼이 있으면 그 도움을 받아 집 앞에 내다 놓았다. 장례식에 애도자가 있지도 않았고 마치 염소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묘지가 부족해지자 커다란 구덩이가 마련되어 한꺼번에 100구의 시신(屍身)이 매장(埋葬)되어 마치 선박 안에 짐이 선적 되듯이 하나씩 차례차례 쌓았다.
4. 절망으로 얼룩진 프랑스
 1348년 1월 말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불운의 겔리선에 타고 있던 플레밍 출신의 익명의 성직자에 따르면 이탈리아 본토에 처음 발발한 지 한두 달 만에 프랑스에 퍼진 것으로 보인다. 이 겔리선은 곧 겁에 질린 당국자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페스트를 에스파냐에 퍼트리고 랑그도크 해안에까지 그 흔적을 남긴다.
백년전쟁(百年戰爭), 파괴(破壞)가 시작되다.
프랑스와 영국은 숙적(宿敵)이다. 양국이 가장 큰 적대 관계에 빠진 것은 잉글랜드 가스코뉴 통치를 둘러싼 분쟁이다. 프랑스왕 필립 6세가 스코틀렌드를 지원한 반면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군주와 사이가 나빴던 플랑드르 도시와 동맹을 맺었고, 1337년 프랑스 왕위 계승문제를 다시 주장하면서 양국이 전쟁을 시작했다.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할 때 남성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사망했다. 프랑스 대 제후들은 회합을 갖고 후계자 문제를 논의 했다. 왕위 계승 후보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필리프 4세의 딸 이자벨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해 낳은 에드워드 3세고 다른 한명은 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 백작의 아들  필리프 6세였다. 프랑스의 선택은 이방인 에드워드 3세보다 프랑스적인 본성을 갖고 있는 필리프 6세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왕위 계승 뿐 아니라 플랑드르의 경제권과 기옌지역은 정치적인 문제가 얽혀있었다.
 1340년 슬뤼이스 (sluys)해전에서 프랑스 십자군은 영국함대에 패했다.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영국군의 투석기에  프랑스 기사단은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칼레, 노르망디 해안가, 브르타슈, 기옌으로 이어지는 북부와 서부는 잉글랜드에 장악되었다. 잉글랜드가 마음만 먹으면 프랑스 왕국에 상륙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필리프 6세는 경제적(經濟的) 파탄(破綻) 상태에서 군대를 조직할 수 없게 되었다.
 1347년 흑사병이 제노바 상인들에의해 전 유럽을 휩쓸면서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달만에 마르세유에서 5만 6천명이 죽었다. 항구(港口)쪽은 선, 폐 페스트가 동시(同時)에 발생(發生)해 피해(被害)가 더 컸다. 전염병은 지중해에서부터 두 개의 경로(徑路)로 전파되었다. 서쪽으로는 몽펠리에와 나르본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그리고 카르카손, 톨루즈, 몽토방을 거처 보르도에 이르렀다. 북으로는 아비뇽, 리옹, 파리, 브르고뉴에 이어 플랑드르에 도달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의사(醫師),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환자(患者)
중세 성직자들은 의사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병실의 주인공은 사제였고 의사는 미천한 자기 일을 행할 수 있다. 의사는 환자 치료전 고백성사의 여부를 분명히 알아야 했다. 일반적으로 병자가 유명인사일수록 성직자와 군신들 무리 뒤에 서 있어야 했다. 1,300년 보니파키우스(Boniface) 8세는 시체 절단을 금지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외과 의술이 타격을 받았다. 15세기 말에 식스투스(Sixtus) 4세 때 해부(解剖)를 공인화(公認化)했다. 페스트 환자(患者)를 의사(醫師)들은 피하려 했다.
식물처럼 가만히 있는 것, 페스트에 맞서는 가장 좋은 자세
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가장 좋은 주거 환경(住居 環境)에 대해서는 격리(隔離)된 삶을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 독기는 주로 서풍(西風)을 타고 전염되기 때문에 바람막이가 있는 저지대가 유리했다. 해안지방은 피해야 했다. 습지대(濕地帶) 역시 죽음의 안개가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집은 북향으로, 창은 유리나 밀납(蜜蠟) 천으로 가려야 했다. 전염병이 부패(腐敗)한 대기(大氣)로 퍼지는 경우 대적할 만한 것을 만들어야 했다. 건조하고 香이 많은 노간주나무, 월계수, 물푸레나무,, 포도나무, 로즈메리 나무, 유향수 등이다. 집에는 좋은 香氣가 나는 식물(植物)과 꽃을 채우고 마루에 식초(食醋)와 장미수를 뿌려야 했다. 외출 때는 호박(琥珀)이나 향기로운 사과를 들고 다녔다. 호박이 비싸면 대체물로 검은 후추와 적백 백단목 같은 양에 장미를 그 두 배 그리고 장뇌를 반 배 혼합하여 만들어야 했다. 식물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페스트에 맞서는 가장 이상적인 자세였다. 運動을 하면 신체(身體) 중에 공기(空氣)를 더 많이 흡수하게 된다. 공기와 함께 독성(毒性)도 더 많이 유입된다. 뜨거운 목욕은 피부 모공을 열개 한다는 이유로 회피되었다. 식초나 장미수로 손을 씻었다.
 아침 식사전에 무화과 열매 한두 개와 루타, 개암나무 열매먹는 것이 유행(流行)이다. 방혈(放血)도 유용한 예방책이다. 8파운드까지 피를 방혈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식이 요법도 중요했다. 날씨가 더우면 쉽게 상하는 재료는 무조건 피해야 했다. 오염된 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도 피했다. 고기는 삶는 것보다 굽는 요리(料理)를 선호(選好)했다. 계란은 식초와 같이 먹으면 괜찮았지만 완숙(完熟)은 절대 금지되었다.
난무(亂舞)하는 헛된 치료법(治療法)
 나쁜 것이 나쁜 것을 몰아내기 때문에, 악취를 주입하면 쓸모가 있다고 믿는 학자도 있었다. 변소 관리나 병원이나 그외 냄새가 나는 곳에서 일하는 자들은 면역력이 있다고 간주되었다. 페스트가 도는 마을에 주민 중에는 변소에 쪼그리고 앉아 몇 시간이고 악취를 맛있게 들이마시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쎅스는 분노와 마찬가지로 신체를 뜨겁게 하고 평정심을 흐리게 한다고 믿었다. 
먹고 마시자, 내일 우리는 죽을 테니까
 매일 죽은이의 시신이 교회(敎會)로 이송(移送)되었다. 10, 15구의 시신이 들어오면 교회지기 등은 밤낮으로 조종(弔鐘)을 울렸다. 모든 시민은 두려워 했다. 시의회(市議會)는 도덕적(道德的) 타락(墮落)은 神의 응징(膺懲)이 뒤 따른다는 생각에 동거(同居)하는 남, 여는 당장 결혼(結婚)하거나 관계(關係)를 끊으라는 명령(命令)을 했다. 욕설(辱說), 주사위 놀이, 안식일 노동은 금지(禁止)되었다. 장례식(葬禮式)에서 상복(喪服)도 금지(禁止)되었으며 故人의 집에서 모임도 없었다. 장례식(葬禮式)에 종도 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