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동시대 문명의 만남 드라마
1. 만남의 연쇄
군사적 만남 → 긴장(緊張) → 膨膨한 대립(攻防)
아케 메네스 제국 ↔ 유럽
↑
만남
☞ 아케메네스는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에 멸망.
카르타고는 기원전 3세기 로마에 멸망.
2. 응전의 다양성(多樣性)
문명의 만남 : 공격자(작동자 agent) ↔ 방어자(반응자 reagent)
작용과 반작용의 예
이란 이슬람 교도 침략(군국주의) : 힌두교, 정교, 그리스도교(자기들도 군국주의화)
시크교도, 마라다파 → 무굴인에 그런 방식의 보복
그리스, 세르비아 민족 주의자 → 오스만리에 그런 방식의 보복
아케메네스 시대 시리아 사회가 세계국가 지배자가 된 이란국가 문화적으로 전향.
바빌로니아 세계를 포위한 사실이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 이스라엘, 유대왕국의 군사세력 재기 못하도록 추방(실향민)
압제 -- 망국민족(유대민족외) -- 민족적 주체성 유지 관심 -- 고립주의
자연적 요새 -- 도산여 지역, 산악지대 -- 고립정책
폭력의 도전 --→ 비폭력 응전(고등종교 창립)
헬라스 사회 --→ 충격 -- { 키벨레 숭배, 이시스 숭배, 미드라교, 그리스도교, 대승불교} ←-- 오리엔트 사회의 응전
바빌로니아 사회 --→ 군사적 충격 --→ {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제 4장 동시대 문명의 만남의 결과
1. 성공치 못한 공격의 여파(餘波)
군사적 승리 --→ 승자) 군국주의자 --→ 불행초래
동시대 문명의 만남 --→ 교란(攪亂)
예) 아케 메네스제국( 페르시아) 攻擊 --- 헬라스 사회 影響
↑
刺戟(응전→ 활동분야 발달) / 정치적 결과(災殃)
헬라스 사회 --→ 경제혁명 성취 --→ 인구팽창 --→ 자급적 경제단위(폐지) --→ 특수화, 상호 의존 원칙의 새경제 체제 수립.
2. 성공한 공격의 여파
1) 사회체에 미치는 영향
침략성공 ← 문화유입(지배국) / 외래부분 수용, 배척문화 정책은 반드시 실패
☞ 프롤레타리아는 본질적으로 다루기 힘든 사회적 계급{ 배척<내부◁외부>불능}
예) 로마(아우구스트) : 국경(Limes)을 유프라 테스강 너머로 확장시키려는 것 허락치 않음.
오스트리아 합스브르크 제국 : 1차대전 때 독일이 전반기 승기를 잡아 국경을 동남쪽으로 넓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민족적 요소가 뒤섞여 있는데다 슬라브족의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문명파괴 ←---
↓ ↑
침략(성공문명) ----→ 침략받은 사회(내적 프롤레타리아)
↑ ↓
------------------←--virous와 같이 이동
☞ 한 문화요인이 본래문명의 틀에서 분리되어 이질적 사회환경으로 도입될 때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다.
예) 서구 산업주의 -- 도덕적 타락(동남 아시아 두드러져)
인도의 간디 -- 자국민에게 힘들어도 무명을 손으로 길쌈(주장)할 것을 계몽한 것은 다른문명의 침입을 막고자하는 속셈이 있어서다. 비록 경제적 희생을 치루더라도 국가와 민족을 지키려는 것.(기술> 종교 = 서구문명)
쇄국정책(鎖國政策) --- zealotism(광신자) / 排斥, 抵抗
유대인이 로마군을 상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극렬한 저항.
융화정책(融和政策) ---- 헤롯주의(Herodism)
受容, 同化政策路線을 일컷는다.
2) 혼의 응전
非人間化
동시대 문명들 간 만남을 사회에서 심리적 결과로 돌려보면 작용하는자(攻擊者)와 작용에 반응하는자(彼攻擊者)의 영향
침략문명의 성공자들 -- 바리사이파(選民) / 驕慢(후 네메시스)
창조주의 시각(鳥瞰) -- 平等
☞ 피조물의 일시적 승리 : 열등한 패배자로 취급(under-dog), 우승 승리자(top-dog)은 자기와 똑같은 피조물에서 그 인간성을 뺏으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자기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勝利者(top-dog) -- 神의 平等思想 喪失 -- 敗北者(under-dog)
( 驕慢 ) ↓ ↑ (奴隸化)
--→ 人間性 喪失 -----
劣等한 敗北者의 烙印 --→ 不認(주장) --→ 宗敎가 엉터리라고 주장 -- 그리스도교 세계가 지배자 --→ 敗北者에게 異敎徒로 烙印
☞ 근대 후기 서구사회를 해외로 팽창시킨 영어 사용의 프로테스탄트(서구 개척자)가 토착민을 원주민으로 부르며 열등종족의 낙인을 찍은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
악질적 낙인의 3요소 ① 열등낙인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 ② 인종적 양분은 넘을 수 없는 심연을 만듬, ③ 인종적 낙인은 피부색, 코모양 따위의 인간 본질에서 가장 피상적이고 시시한 것을 그 구별의 기준으로 삼고있다.
젤롯트주의와 헤롯주의
헬레니즘의 유대민족에 대한 압박 강도 고조 -- 신약성서
젤로트파 : 성채(城砦)내로 피신, 침략자 칼끝 피해서 초자연적 힘 신앙으로 決死抗戰.
헤롯파 : 이두마이아(idumaea) 출신, 기회주의적인 정치가, 지지자로 구성. 피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살아갈 방법을 찾자(현실 타협주의)
헤롯주의자 등장 : 헤롯시대 이전부터 존재, 알렉산드리아시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다민족이 잡거(雜居)하던 때
시리아 사회의 유산자, 유식층 : 헤롯주의파
고등종교(유대교 제외) : 세속적 문화투쟁의 수단으로 종교적 견지에서 젤로트주의 잡역에 봉사
젤롯트주의파(종교가담) :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파,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
( 파멸의 길)
헤롯주의파 :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다 서구에 침입한 야만족, 원주민의 종교(그리스도교) + 언어, 문자(로망어)를 수용. ☜ 재미있는 사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자(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들도 서구 그리스도교 문화를 헤롯주의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트로이 전쟁 :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름다운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유혹에 빠져 남편과 딸을 버리고 트로이로 건너간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모욕을 참을 수 없었던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형이자 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미케네 왕국의 왕인 아가멤논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내를 되찾기 위한 원조를 청하였다.
동생의 청을 들은 아가멤논은 크게 분노했다.
"이것은 비단 너만의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수치다. 이번 기회에 트로이를 단단히 혼내주어야겠다."
그는 사신들을 그리스의 여러 나라에 보내어 그들 간의 옛 서약을 상기시키며 트로이 공격에 합세할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그리스의 여러 왕들이 이에 찬성하여 제각기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보에오티아 지방의 아우리스라는 항구로 집결했다. 그들의 옛 서약이란 헬레네가 처녀였을 때 그녀의 미모에 반한 모든 그리스의 젊은 영웅들이 모두 그녀와의 결혼을 원하게 되자, 그녀의 아버지 틴다레오스가 모든 구혼자들에게 '우리는 누구든지 간에 헬레네가 선택한 자를 지지한다.'는 서약을 요청하고 모든 젊은 영웅들이 이에 동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때 헬레네가 선택한 사람이 바로 가장 유복했던 메넬라오스였다.
결국 그들의 옛 서약에 따라 모든 그리스 왕들은 제각기 병력을 이끌고 집결하였다. 그들은 아가멤논을 '왕 중의 왕'으로 뽑은 다음, 14척의 배와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 원정은 실패했다. 그들은 트로이로 가는 길을 몰라서 미시아라는 엉뚱한 곳에 상륙하게 되었고, 그곳의 왕 텔레포스는 자기의 백성들과 힘을 합쳐서 그리스군을 몰아냈던 것이다.
그로부터 8년 후 아가멤논은 다시 군대를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풍이 불지 않아 항해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그 이유에 대해 예언자 칼카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언젠가 아가멤논이 사냥을 나가서 한 마리의 사슴을 잡고서는 '아르테미스라 할지라도 이렇게 멋지게 잡지는 못할 것'이라고 자랑을 한 까닭에 화가 난 여신은 그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다니! 그것도 왕 중의 왕 아가멤논의 딸을···.
그러나 아가멤논은 예언자의 말을 따라 비정하게도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 그제서야 비로소 순풍이 불기 시작했고, 함대는 순조롭게 항해하여 트로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된 지 9년이나 되어도 승부가 나질 않았다. 그것은 올림푸스의 신들이 양편으로 갈라져 제각기 어느 한쪽을 후원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파리스와 헬레네가 도망한 지 10년째로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당대 최고의 명장인 아킬레스와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여자 포로 때문이었다. 아가멤논의 여자 포로 중에 크리세이스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이 여자는 아폴로의 신관 크리세스의 딸이었다. 딸을 잃은 늙은 신관은 아가멤논을 찾아와 딸을 돌려달라며 애걸했다. 그러나 아가멤논이 돌려줄 것을 거절하자, 그 신관은 태양의 신인 아폴로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신관의 기도가 아폴로에게 통했는지, 그리스군의 진영에는 무서운 질병이 돌았다. 이에 대해 예언자 칼카스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아폴로의 신관 크리세스의 딸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 질병은 아폴로의 진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가멤논은 몹시 화가 났지만, 예언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언자의 말을 전하러 간 아킬레스에게 아가멤논은 조건을 제시했다.
"내 포로는 돌려주지. 그 대신 자네의 포로인 브리세이스란 여자를 나한테 줘야 하네."
아킬레스는 어이가 없었다.
"좋소, 당신 조건대로 하지. 그 대신 나는 이 전쟁에서 손을 떼겠소."
아킬레스는 이렇게 말을 내던지고는 자신의 진지로 돌아가 버렸다. 이후로 전세는 완전히 트로이 쪽으로 기울어졌다. 아킬레스가 없는 그리스군은 연전연패였다. 그리스군이 거의 전멸에 이를 정도까지 몰렸어도 아킬레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이때 아킬레스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그리스군의 영웅 중의 한 사람인 파트로클로스는 그리스군의 참패를 보다 못해 아킬레스에게 전투에 참가하도록 간청을 했다. 그래도 아킬레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마침내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에게 한 가지 청을 한다.
"좋아! 그렇다면 자네의 갑옷과 군사들만이라도 빌려주게."
아킬레스는 마지못해 응낙했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스의 갑옷을 입고 트로이군과 접전에 들어갔다. 이것을 본 그리스군은 아킬레스가 다시 출전한 줄로 알고 용기가 솟았으며, 반면에 트로이군은 사기가 꺾여 대열이 흩어지고 결국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분전하던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 최고의 용장 헥토르와의 결전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아키레스와 아이아스
이 소식을 들은 아킬레스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내어 통곡했다.
"파트로클로스는 나 때문에 죽었다. 내 기필코 이 원수를 갚아 죽은 친구의 원한을 풀리라."
이렇게 결심한 아킬레스는 다시 전투에 나섰다. 그가 전투에 나서자 그리스군은 연전연승하였으며, 트로이군은 막다른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러자 헥토르는 죽기를 각오하고 아킬레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아킬레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킬레스의 창에 찔려 숨을 거두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킬레스여, 내 시체만은 부디 우리 부모한테 보내주시오."
하지만 복수심에 불타는 아킬레스에게 이러한 부탁이 통할 리 없었다.
아킬레스는 헥토르를 자신의 전차 뒤에 매달고는 미친 듯이 트로이의 성벽 둘레를 달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부왕 프리아모스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보다 못한 이 늙은 왕은 성벽에서 몸을 던져 죽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이 지난 뒤, 한밤중에 아킬레스의 진지로 노인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바로 헥토르의 아버지이자 트로이의 왕인 프리아모스였다.
헥토르의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달리는 아킬레스
늙은 왕은 아킬레스의 발 밑에 꿇어앉고는 간곡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아킬레스여, 그대의 부친을 생각해 보게. 그대 부친은 아들인 자네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내 아들은 그대의 손에 죽었네. 부디 이 늙은이를 불쌍히 생각해서, 내 아들의 시체를 돌려주게."
아킬레스는 그의 말에 감동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왕이여, 잘 알겠습니다. 제게도 늙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당신의 소원대로 시체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아킬레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늙은 왕에게 돌려주었다. 시체가 트로이의 성 안으로 돌아오자 트로이 사람들은 모두 슬픔에 잠겨서 10일 동안 헥토르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로도 전쟁은 계속되어 양군의 많은 영웅들이 죽었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스도 전쟁의 발단이었던 파리스가 쏜 독화살에 그의 유일한 약점인 발목 힘줄(아킬레스 힘줄)을 맞아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러나 마침내 트로이의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 찾아 왔다.
오랜 전쟁에 지친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계략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리스군은 퇴각을 가장하여, 해변에 거대한 목마를 남겨둔 채로 트로이인들이 보는 앞에서 배를 타고 해안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은 트로이 앞에 있는 테네도스 섬의 그늘에 닻을 내렸다. 퇴각할 때 그들은 시논이란 자를 혼자 내버려두고 갔는데, 이 사나이는 자진하여 트로이군의 포로가 되어 오디세우스 때문에 이렇게 버림을 받았다고 호소했다. 목마는 그리스인이 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 이렇게 크게 만든 것은 트로이인이 이것을 성 안으로 끌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 까닭은 이 목마가 성 안으로 들어가면 트로이의 함락은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일러 주었다. 트로이인의 대부분은 시논의 말을 믿고 매우 기뻐하며 성벽을 크게 부수고 목마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고는 잔치를 베풀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러자 시논은 횃불을 밝혀 들고 정해놓은 신호를 보냈다. 이 신호에 따라 그리스군이 트로이로 돌아와 사방에서 공격하자 목마 속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나와 성을 점거하였다.
트로이군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자 트로이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군이 나와 트로이성을 함락시켰다.
트로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불바다가 되었으며 그 찬란했던 문명도 꺼지고 말았다.
이상은 기원전 8세기의 시인으로 추정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에 나오는 내용인데 기원전 13세기에 있었던 미케네인의 트로이 공격을 극화(劇化)한 것으로 당시 미케네 문명의 사회모습 및 그 해외진출의 양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군 이야기(시오노 나나미) (0) | 2015.12.08 |
---|---|
역사연구2 (Arnold J Toynbee) (0) | 2015.11.10 |
역사연구2 (Arnold J Toynbee) (0) | 2015.11.09 |
역사연구2 (Arnold J Toynbee) (0) | 2015.11.09 |
역사연구2(Arnold J Toynbee) (0) | 2015.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