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흔한게 맞벌이 부부지만 25년 전에는 그리 흔치 않았던 게 맞벌이 부부였다. 아이들양육을 남의 손에 맞겨야 했기 때문에 아침 출근 시간은 부모와 자식 간 생이별의 장이되곤 했다. 희한한 것은 엄마의 품을 떨어지지 않으려던 애가 대문 밖을 나서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양육을 돌봐주는 아주머니를 따라 나섰다. 큰 아이가 5살 될 무렵 평상시와 같이 오후 퇴근해서 아이를 양육하는 아주머니와 우리집을 향해 오던 중 돌연 우리집에 안들어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낮에 돌봐주는 곳이 자기 집으로 알고 우리집은 아마도 남의 집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밤에 잠시 상면하다 잠을 자고 또 양육하는 집에 가니 아이가 생각할 때 엄마는 양육해주는 분이란 착각을 할만 했다. 우린 그런 아이 모습을 보며 잘못하다가 내자식 잃겠다는 두려움에 아이를 어린이집 종일반으로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잘 적응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요즘 제법 자라서 성인티가 물씬 풍겨나는 애들을 보자면 지난 날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어릴 때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것 같다.
어느새 훌쩍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들과 대화 할 기회가 생기면 "자기 자신의 처지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바보가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알면 최소한 남들한테 바보 소리는 듣고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방향성을 지니라고 충고한다. 청소년기 자칫 잘못하면 맹목적으로 젊음을 낭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다위에 쪽배를 띄우면 그배는 우선 파도가 그냥 놔두질 않는다. 어느 곳으로든 밀쳐내게 된다. 바다 한가운데 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해안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공이 노를 저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키를 잡고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면 목적하는 곳으로 향할 수 있다. 물론 뱃사공 마져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경우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젓는다 해도 도착 지점이 없어 결국은 바다 한 가운데 표류하고 만다. 또 하나는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는 말을 한다. 배려심은 이런 마음에서 출발하게 된다. 최소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헤아림은 이타심의 출발점이고 배려의 믿바탕이 된다.
또하나 있다면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거짓말은 그릇된 행동에서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두려움에 한 말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에는 악의적인 거짓말과 또 누군가를 위한 하얀 거짓말이 있다. 가급적 악의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식을 가르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자식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몸속에서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살면서 부모의 행동과 습관을 그대로 답습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삶이 곧 자식들의 앞으로의 삶이다.
어느날 아버지 게가 아들의 걸음걸이를 보고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 왈 "애야 ! 옆으로 가지말고 아빠처럼 앞으로 걸어야지, 네. 아빠 이렇게요? " 아버지가 옆 걸음을 걸으면서 앞 음을 이야기 하면 아들은 옆걸음이 앞걸음일 수 밖에 없다. 보고 배운 것이 그거니까.
부모의 행동 중 긍정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몸으로 흡수한다. 부정적인 면은 현실적으로 부정하면서 내면에 무의식적으로 담아둔다. 강하게 부정하고 회피하려는 것일수록 의식 저면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어 왜곡되고 돌출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부모는 자녀들의 학습장이다. 부모가 넓은 벌판에 우뚝 솟은 큰나무가 되어주고 아이들은 그늘에서 쉼을 얻을 수 있다면 적어도 그들이 비상할 날개는 스스로 펼칠 수 있게된다. 그리고 비바람이 불고 벼락이 떨어지면 또다시 나무그늘 아래로 자연히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인간은 삶의 유한성을 자식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 그러니 자식은 부모의 거울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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