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찰

태종

해암 송구호 2014. 11. 15. 09:47

제4장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 

1.선전포고

1400년 1월 28일 태조의 넷째아들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을 시켜 정종에게 아뢰기를 "정안공 이방원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하니 정종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 이문화를 시켜 이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박포(朴苞)의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장차 보전하겠다."하였다.

 

2. 골육상쟁의 시가전

1400년 1월 20일(書雲觀)에서 요기(妖氣)가 서북쪽에 보여 맹장이 왕실에서 나올 것이라는 점궤를 내놓았다. 이무렵 방간이 상장군 오용권을 시켜 정종에게 보낸 글을 보면 방원이 자신을 해치려고해 자신이 그에 맞서는 것이라고 했다. 방간은 처조카 교서감 판사 이래를 은밀히 불러 "정안공이 나를 시기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앉아서 개죽음을 당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래는 정안공과는 과거 동기생으로 방간을 만류한뒤 스승 우현보를 찾아가 이방간의 거사계획을 알렸고 우현보는 아들 우흥부에게 시켜 정안공 이방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방간은 치밀한 전략가가 아니다. 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생각 이었다면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지 않았어야 했다. 반면 방원은 어릴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장터를 누비던 장수다. 사냥을 즐겨하던 그는 은밀한 가운데 움직이는 표범과 같은 인물이다. 

 정안공 이방원은 정보전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있었다. 1월28일 사냥을 준비하던 중 방간의 아들 이맹종이 아버지도 사냥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렸다. 밀정을 보내 알아보니 갑옷차림으로 무장했다. 정안공은 골육상쟁을 눈앞에 두고 고민했다. 이성계의 배다른 동생 이화와 조카 이천우가 방원의 편에서 도왔다. 정종은 싸움을 만류하는 교지를 도승지 이문화를 통해 내렸다.

이방간은 1차 왕자의 난 때 도당에서 몇몇이 작당하여 방석과 방번을 죽였었다. 방원은 최소한 혈육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강했다. 방간과의 싸움에서도 혹여 전쟁중 죽을지 몰라 병사들에게 철저히 단속을 해뒀다. 승패는 선죽교에서 났다. 방간은 성균관내 적경원터에서 투항했다. 방원은 상황이 종료후 냇가에서 군사들을 쉬게한뒤 크게 울었다. 손에 끊임없이 피를 묻혀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서러워 울고, 부하들은 이런 그의 인간적인 면에 감동해서 울었다.

 회안군 방번이 군사를 일으키는데 박포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원래 정사2등공신인 박포는 자신이 1등공신에 오르지 않은 것에 불만이 컸다. 처음에는 이무를 헐띁고 다니다 나중에는 정안공을 욕하고 다녔다. 박포는 방간을 부추겨 2차 왕자의 난을 촉발시키고 본인은 중립을 유지한다고 집에 있다 붙잡혀 처형당했다.

3. 회안군에 대한 처리

 방원은 회안군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었다. 토산(兎山)에유배를 보냈으나  여러차례 치죄가 논조되었으나 태종이 완강히 거부하였고 완산(完山), 홍주(洪州)로 유배지를 옮겼고 칙첩을 빼앗았을 뿐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생활하기 부족하지 않도록 50호의 식읍도 주었다. 그리고 정월에 한양에 들어오는 것도 허락했다. 1421년(세종3년) 홍주(현홍성)에서 병사했다. 그후 그는 전주시 덕진구 금상동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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