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의 등극(13세)
현종의 묘갈문 작성
김석주에 묘지문 작성 명
이단하에 행장작성(서인 송시열 제자) / 송시열 "所引禮'에서 所를 誤자로 고치도록 명
남인(삼사 포진)은 송시열의 죄를 청함 / 송시열은 덕원부로 유배(숙종원년, 1675년 1월)
☞ 5년간 유배생활 중 주희의 명분론을 탐독 남인을 이단으로 해석 환국 후 윤휴 허적 등
죽은 대신을 賊臣이라 칭함.
숙종의 외척
- 숙종의 병약함과 복평군의 형제(남인과 교분) 정치적 행보에 주목
- 왕자의 탄생을 원했으나 늦어짐(後嗣의 不安) ← 정변 공포
공작 정치
- 왕실 + 외척의 작품
- 임술고변(壬戌告變) / 역모 조작을 통한 위험세력의 제거
일시 : 숙종 8년(1682년10월21일)
고변 : 전 병사 김환
출신(문,무과,잡과에 급제한 후 출사 못한 자) 이회
패관(稗官 : 요즘 민정 수석) 한 수만
고변 내용 : 용산에 살고있던 許璽와 許瑛에 접근 장기판에서 역모의 상황을 암시하고
그들의 기색을 살핀결과 고변을 함(김석주의 사전 시나리오 대로 행동)
추국 과정에서 자백을 받아 냈으나 복평군의 개입 사실은 끝내 부인.
김석주는 청나라 사신으로 떠나면서 金益勳에 위임한 상황에서 "역모조작"에
당황.
연속해 역모고변 : 대질신문 과정에서 무죄
김 중하(金重夏) - 민암(閔黯)
전익대(全翊戴) - 유명견(柳命堅)의 역모 고변
☞ 배후 실체 김석주의 처벌이 어려움을 알고 김익훈의 비리(허견의 첩을 가로챔, 공금
횡령으로 땅을 사들임)
무고자 국문(鞠問)
전익대 -▷ 김환 위협 고변 가담 사실 밝혀짐.
집권당(서인) 측에서는 김환의 국문을 막고 유배( 김석주의 공작혐의 드러날까 두려워)
공작 정치의 은폐 : 숙종
김석주(척신)
서인
서인[ 석곡 봉사] - 송상민의 疏
효종은 장자가 아니니 장자의 예로 服을 입는 것은 옳지 않다는 疏.
숙종이 때려(杖殺) 죽임
송시열의 죄를 더하길 청하는 남인 : 숙종은 두 조정의 스승이므로 거제도로 옮기도록 함.
(숙종 5년/ 1679년)
예송논쟁이 남긴 상처
1. 공존의 틀을 깬 채 상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기조.
2. 정적 관계로 돌변(죽느냐 사느냐의 싸움)
주희의 모든 것들을 신봉한 송시열 / 尹鑴를 斯門亂賊으로 파문
중용 주(中庸 註) 윤휴 : 주자의 책 달리 해석(윤휴는 어릴적 친구)
홍수의 변(紅袖의 變) / 숙종6년 ((1680년)
- 개요 : 남인과 척신과의 정권 투쟁
인평대군의 아들 福昌君과 福平君이 궁녀 常業과 貴禮와 간통을 했다는 사건
- 처리 : 4명 귀양(복창군 ; 영암, 복평군 ; 무안, 상업 ; 삼수, 귀례 ; 갑산 )
의금부 조사 : 무고로 밝혀짐
김우명(金佑明 ; 명성왕후 김씨의 父)무고죄 조사 ← 정청에서 대비 哭
- 대비의 곡에 대신들 반응
윤 휴 : 정청에 대비 출입 부당(照官 不能)
김수항 : 자식,부모 "照官'은 패륜 역리(悖倫逆理)라는 상소를 올림(귀양)
조사기(趙嗣基 ; 승지) : 공회석상에서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구나
홍우원(선비) : 어머니를 잘 관리하라 / 상소
박헌(朴憲 ; 유학자) 송시열 당인들이 여러가지로 자성(명성왕후)의 마음을 의혹시켜 그렇다.
<서인 사주 제기> ← 김대비 전교 " 죽고싶다"
숙종 ; 박헌 귀양
김수항 : 김대비 편에서 남인 공격 疏(서인)
- 남인에 대한 숙종의 생각 : 왕을 陵蔑하는 지경에 이름
기름 천막 유용 사건(숙종 6년 3월/1680.3)
- 개요 : 허적 집안에 큰 잔치(부친 諡號 받는 날, 본인 机杖 받음)
비 내리는 날씨로 축하연인 "延諡宴"으로 궁중잔치를 방불케하는 사람들 모여듬.
숙종은 비가오니 기름천막을 내주라 했는데 '旣' 가져 갔다는 전갈에 왕실 물건을
함부로 유용한데 분노 측근을 보내 연시연을 엿본 결과 허견과 무사들이 따로 잔치.
- 위기의식 느낀 숙종
1) 와언(訛言 ;유언비어) 복창군 형제 중 왕위 계승
2) 숙종(19) 유약한 몸, 형제 및 후사 없음
3) 허적의 자 허견의 무사모집(정변 의혹)
4) 강화 흉서 : 종통거론(강화 축성장 이우)/ 소현세자의 子 임천군 왕위 옹립
☞ 송시열 告廟 명분으로 이용(남인)
5) 남인 영수 허적의 권력 집중화
- 戚臣의 秘密 諜報網 ; 김석주의 비밀조직 활동에 걸려든 허견
허견의 옥사( 정원로의 역모 고변)
- 허견이 왕의 후사 거론(복선군) / 허견이 의도적으로 복선군과 가까이 지냄
숙종5년(1679년) 정원로 집에서 서인이 임성군을 추대시 화를 면치 못한다는 말을 함.
- 이차옥 겁탈 사건 : 허견이 서민의 처첩을 능욕한 사건
남구만이 상소(강화유수 정유악이 무고 처리) ← 父) 허적이 죄를 덮어
주기 위해 압력 행사<훗날 허적은 이 이유로 죽게됨>
- 역모 혐의로 죽는 허견 : 복선군 ; 교살, 복창군 ; 사사, 허견 외 ; 참형(斬刑)
경신 환국(庚申換局) / 1680년
남인 정권에서 서인정권으로 권력의 축 이동 / 모멘트 ; 홍수의 변, 기름 천막 유용사건,
허견옥사(역모)
- 김수항(영의정) : 철원 유배지에서 방면
- 정지화(좌의정)
- 정재승(이조판서)
- 이상진(판의금 부사)
- 유상운(대사간)
- 여성제(예조판서)
- 남구만(도승지)
- 이익상(대사헌)
- 조사석(이조참판)
윤휴(尹鑴)의 죽음
죽은 이유 1. 예송논쟁의 남인 논객(송시열을 죽이려 함)
2. 왕에게 모욕을 안겨줌(정청의 곡소리에 照官하라는 말) / 逆鱗
3.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돈독<處身>
4. 관직불만(부 체찰사 직 타인에 돌아가자 얼굴색 변한 것)
5. 송시열 당인(서인)이 대간 장악. <송시열이 죽임을 막지않음>
경신환국의 핵심적 코드 1. 숙종과 척신들이 남인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
2. 서인의 집권의욕
공신(保社功臣)포상 / 1등공신 ; 척신(김만기, 김석주)
2등공신 ; 별군직(李立身/ 고변자)
3등공신 ; 정원로, 남두북,박문무)
壬戌 告變者 金益勳에 대한 尤庵의 처신(분당)
- 개요 : 복평군 제거 목적으로 김석주가 김익훈에게 사주한 일로 무고한 생명 죽게된 사건
우암이 정치 복귀위해 상경 중 여주까지 마중 나간 소장파 조지겸(승지)이 내용을 설명
우암은 공작정치로 무고한 생명을 죽게한 죄는 반역죄보다 더 큰죄라고 말함.
소장파는 열호했다. 그러나 상경 후 노장파(김수항, 민정기, 김만기)와 밀담 후 의견이
바뀜. 스승의 손자란 사실 알고 말을 바꿈(김익훈은 우암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
소장파는 公義보다 私義(利)를 중히 여긴다며 크게 실망. 후에 분당<소론>
- 우암의 처신 : 1. 사리를 쫒아 김익훈 비호
2. 효종의 충실한 신하로 자청<신실 별도로 세워 효종 위패 영원 보존>
3. 이성계의 시호를 더하는 문제< 照義, 正倫>
☞ 병자호란 때 삼전도 굴욕(청 태종에 三拜九叩頭)을 목도한 우암으로선 왕의 존재가 하염없이
낮게 보였을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를 죽이고 봉림대군을 왕에 앉힌 인조의 옹졸함에 군신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효종은 북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성공을 꿈꿨다. 아마도 正而不體가 되는 길이라 생각했을 게다. 우암은 효종의 스승으로서 기축, 정유봉사를 통해 주희의 사상 전파, 사대부의 우대, 왕실의 근검 절약실천을 통한 제민(濟民)을 통해 부국을 이룬 후 도모할 것을 주장했다. 효종이 죽고 난 후 벌인 예송논쟁에서 우암은 體而不正을 주장하고 있다. 종통승계를 부정한 꼴이다. 이 문제로 훗날 죽음을 맞는다.
소론의 영수 명제(明齊) 윤증(尹拯)
호조참의(정3품) 제수 (1683년/숙종9년)에 출사 3조건 제시 / 박세채와 과천에서 회동
첫째 : 남인과 악화된 관계 개선< 庚戌換局, 壬戌告變>
둘째 : 척신세력 제거(외가 ; 김석주<청풍김씨>,처가 ; 김만기<광산김씨>, 계비가 ; 민정중<
려흥민씨> )
셋째 : 인재등용 개선(편협성 지적)
우암과 명제의 관계
- 사제지간
- 경신환국 후 보인 송시열 태도 비판(서찰) / 박세채가 만류 보내지 않음
→ 박세채 사위 중 우암 손자(송순석)이 송시열에게 건네줌.
송시열이 曰 "나를 죽일자는 반드시 윤증 이로구나"<관계악화>
서찰(書札)
- "주자를 종주로하고 사업은 대의에 두었으나 자신의 주장에 찬동하는 자는 친밀하게 대하고
바른말로 뜻을 어기는 자는 禍를 당하니 문하(尤庵)의 큰 이름은 온 세상을 덮지만 진실한 덕
은 안으로 병듭니다.
굳세다(剛)함은 자신을 이기는 것을 말함인데 문하는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이는
참된 굳셈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문하의 위력(威歷)을 두려워 해서 복종하는 것이지 德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니 이는
완연한 富貴家의 모습일뿐 儒學者의 기상이 없습니다.
문하의 문장에 이르러서는 주자를 인용하지 않으면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듯 하지만 혹 주자라는 이름만 알고 뜻을 알지 못하기도하고 혹은 자신의 의견을 먼저 세워놓고 주자를 끌어내 거기에 빙자(憑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다 시피하니 사람들이 모두 걷으로는 대항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불복하는 것 입니다.<예송논쟁시 종통부인과 일맥상통>
평생 춘추대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말로만 하는 체 하고실제로는 하는일이 없으니 안으로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수치(羞恥) 푸는 계획(북벌)이 조금도 진전된 것이 없이 다만 문하의 벼슬만 높아지고 이름만 넓리 퍼질 뿐 입니다.(虛名)"
이는 사제관계를 끊으려는 절교 편지다.
☞ 윤증은 윤선거의 아들로 강화탈출 사건을 비문에 새기면서 사이가 멀어짐.
희빈 장씨의 어머니 탄 옥교 탈취 사건(숙종14년/1688년10월27일)
- 개요 : 사헌부 지평 李翼壽, 李彦起가 숙종의 장모를 천인이라 하여 옥교에서 강제로 내리게
하고 옥교를 빼앗은 사건으로 숙종은 왕자에 대한 신료들의 모욕으로 여김.
- 희빈 장씨의 배경 : 중인 출신, 역관 출신가(장현의 친척) ← 福昌君과 가까이 지냄(남인 쪽)
희빈의 어머니 : 우의정 조사석의 처가 노비
- 장희빈 왕자 출산 : 숙종 14년 10월
- 원자의 名號를 반대하는 서인 : 숙종 15년 1월10일(1689년 기사년)
서인들은 왕비 민씨로 부터 왕자 생산을 기다릴 것 주장.
- 숙종은 신하들의 태도를 왕권 도전으로 여김.
송시열의 상소 : 숙종이 旣 종묘에 고한지 15일 후에 상소
송나라 신종의 예 : 28세 후궁으로 부터 철종을 얻었으나 10세 되도록 번왕으
로 있다가 신종이 병을 얻은 후 태자로 봉해졌다는 이야기.
☞ 서인 몰락의 계기로 작용.
우암의 성격 : 1)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음
2) 2차 예송논쟁에도 朞年服(1년)으로 정해진 것을 大功服(9개월)을 주장.
3) 명호를 정하고 종묘에 고한 것을 반복하라 주장.
숙종의 반응 : 우암의 철종 예에 反駁 / 명나라 황제 황자 탄생 4개월 후 봉호 예
우암 처분 : 삭탈관직(削奪官職)
☞ 종친들의 왕좌 넘보는 일을 막기위한 방책.(왕실 안위)
기사환국(숙종 15년 / 1689년)
- 배경 1) 희빈 장씨 모 옥교 탈취 사건
2) 왕자 명호 서인 집권세력의 반대
- 처리 : 서인세력을 남인 세력으로 교체
남인의 정치 시작은 정치보복에서 출발(국문 허락하는 왕)
우암의 사사(정읍에서 82세로 사망)
송시열 논죄를 놓고 남인 분열 : 청남(강경파) ; 사시 주장 <허목, 윤휴>
탁남(온건파) ; 죽여선 안된다<허적>
김수항 사사(진도)
- 보사공신록 : 저승명부로 바뀜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된 까닭 : 왕자에게 후궁 자식이란 꼬리표를 없애 주려는 부정.
父)장형(長炯)은 중인에서 양반이 됨(옥산 부원군)
김 춘택(숙종 처조카) 정보망< 서인 중 남인 원한 있는자 모집>
- 궁인의 동생 첩
- 장희재의 처와 간통 / 여성 이용 고급 첩보
- 숙안공주(자 홍치상이 기사환국 사사) / 효종의 딸
희빈 장씨를 몰아내려한다는 고변<남인들 강압> : 김석주 家人 함이완의 고변 / 한중혁, 김춘택,
유복기, 유태기 등이 희빈 장씨를 몰아 내려한다는 고변.
최숙원 독살 음모설 : 서인의 역고변(김인, 박귀근, 박의길)
장희재가 김해성을 꾀어 그의 장모를 통해 최 숙원의 생일날 독살.
가담자 : 민암, 목창명, 호판 오시복, 신천군수 윤희, 훈국별장 성호빈
숙종의 마음이 왕비 장씨에서 숙원 최씨로 넘어감.
갑술환국(갑술환국 : 1694년 )
- 내용 :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이 인경왕후<숙종의 정비>김씨와 친했다. 봉보부인을 통해
김춘택이 숙원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음모를 숙종에게 자세히 보고해 갑술환국이
이뤄졌다.
조사기 : 송시열을 공격했다 해서 사형.
- 처리 : 사형 ; 14명, 류배 ; 67명, 파직 ; 54명 <총 135명>
- 공작정치 : 金寅의 고변(진술 내용과 차이)
서인과 남인은 정치의 상대가 아니라 공작 대상으로 봄(패배 = 죽음)
장희빈 처리
- 희빈 장씨의 오빠 공격
국모 모해혐의 (폐비 민씨가 김귀인과 함께 은화를 모아 복위를 도모하고 있다는 편지)
죽음 < 남구만 - 소론 ; 세자를 봐 죽이지 말자>
- 장희빈 부(장동) 묘지 파헤쳐지고 봉분속에 흉물 묻힌 사건.[1691년4월(숙종22년)]
전말 : 분묘앞에 병조판서 신여철의 노비 응선(서인) 것 발견, 응선은 국문 중 사망.
호패를 봤다는 장희재의 노비 업동 신문, 말이 앞뒤 맞지 않아 국문 지나칠 겨우
희빈 장씨에 미칠 파장 고려 중단. 이긍익 야사 "연려 실기술"에는 장희재가
노비 업동을 시켜 응선을 꾀어내 호패를 훔쳐 무덤에 떨어트렸다고 한다.이 꾀는
남인의 이의징의 자 홍발이다. 서인의 병권을 뺏어 타도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인현왕후 민씨 사망<숙종27년8월(1701년/35세)>
이봉징<행부사직/남인> 희빈 장씨 복제놓고 숙종의 뜻 살피다 유배.
김춘택의 주장 : 민비 사망은 희빈 장씨의 무고(巫蠱) 때문이다.
숙빈 최씨의 밀고(密告) / 숙종 비망기(備忘記)
1. 인현왕 후 병 - 희빈장씨 2년동안 문병 없었음.
2. 취선당 서쪽 신당 / 왕후 저주(노비 2~3명)
3. 제주에 위리 안치된 장희재의 처단
4. 2일 후 장희빈 자진 명 / 홍문관 입직승지 반대 명을 거둠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7월19일
숙종과 이이명의 밀담 / 노론 거두
세제의 대리 청정 - 안질로 정무 보기 어려운 점 고려(노론 암묵적 인정)
→ 세자 교체 수순(김춘택 옥사 때 밝혀짐)
소론 - 세자 대리 청정 반대
연잉군 부탁
연잉군을 세자로 옹립하기 적합한 인물 추천 : 김춘택 종제 용택과 처남 이천기 추천(이이명)
김용택 : 이이명의 형 이사명의 사위
이천기 : 김용택의 처남
☞ 무사와 술객을 모음
숙종의 의중 변화 : 연잉군, 연령군 성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세자를 싫어하는 기색 보임.
세자가 조금만 뜻에 어긋나도 "누구의 자식인데 그렇지 않겠는가?"
이런 준엄함에 세자는 병을 얻었다.<노론 민진원의 단암록>
세자의 병은 생모의 죽음과 국왕의 꾸짖음 때문에 생긴 정신적인 고통이
원인 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숙종 사망 : 숙종47년(1720년 59세)
경종의 즉위와 왕 세제의 옹립
- 배경 : 집권세력인 노론과 경종의 모 희빈 장씨의 정치배경에 남인이 있었으나 몇차례 환국을
격으며 뿌리가 약화되고 노론(보수진영)과 소론(진보진영)으로 갈린 서인 중 소론이 경
종을 옹호했고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 했는데 그 바닥엔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는 속셈이 내재 돼 있었다.
- 세제 옹립 : 선의왕후 어씨가 종친 중 양자를 삼으려는 움직임(경종 33세)
노론은 야간에 입대 왕에게 연잉군을 세제로 삼을 것을 강요.
경종의 불임 : 이건명이 청의 사신에게 한 말(양위<陽痿>발기불능)
신축환국(1721년)
- 신축 疏 : 왕권 농단한 4흉처단(세제옹립 및 대리청정 요구)
김일경소두
- 왕 능멸(陵蔑)
- 3급수 고변(목 호룡) / 1772년(임인년)
1. 대급수 - 자객(노론 명문가 자재) / 김용택(김춘택 4촌),정인중(정발손자), 이기지(이이명 자)
이회지(이사명자), 김성행(김창집 손자)
2. 소급수 - 御膳(毒) / 궁녀 이용
3. 평지수 - 유언 조작(정유독대 - 이이명) / 폐세자 후 덕양군(德讓君)으로 삼는다는 내용.
- 노론의 4대신 처형 (노론의 생존 문제 대두)
이이명(정유독대) - 왕위찬탈
김창집(숙종) - 경종의 대리청정 반대
이건명 - 대리청정(연잉군) 철회하라 소한 대신 공격
조태채 - 임금배신, 대리청정(연잉)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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