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강의

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28강 ~29강

해암 송구호 2021. 12. 11. 10:38

THESE  : 러셀의 기술 이론 1

 

THEORY OF DESCRIPTION : 20세기 서양철학을 개관(槪觀)하는 데 새로운 These로서 크게 문제 되지 않고 받아들여진 학설이다. 그런 중요한 학설인데 나한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이 강의를 하게 된 계기(契機)는 철학에 입문하게 된 소연(昭然)이 있었다. 1965년 고려대 생물과를 들어갔다가 1967년에 한국 신학대학을 입학했다. 입학 첫 학기 때 철학개론을 소흥렬 교수(전포 항공대 교수)가 강의했다. 그분이 당시에 대구 계명대학교 시간강사였다. 그 당시 박사과정을 하지 못했는데 이분은 미국에서 학사를 했던 분이다. 한국에 베이스가 없었다. 한국에서 학부를 안 나오면 평생 고생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해 언어도 그렇고 완전히 서양화된 사람이다. 그 당시엔 분석철학을 한 사람이 없었다. 인생을 되돌아볼 때 내게 이런 행운이 없었던 것같다. 당시에 그분은 "THEORY OF DESCRIPTION"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철학잡지에 논문을 쓰셨는데 그것이 기술 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나는 철학과를 들 들어간 것도 아니고 신학대학에서 철학개론을 교양과목으로 들었을 뿐 기술 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때가 아니다. 강의 중 러셀의 기술 이론은 탁월하니 그걸 알려면 러셀의 서양철학사 두꺼운 책의 맨 끝에 한 폐지로 요약돼 있다며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라고 고언(苦言)했다. 그때 최민홍 교수(당시 중앙대 철학과 교수)가 번역한 "러셀의 서양철학사 상, 하권"이 나와있었고 나는 영어를 조금 하니까 고려대 교내서점에서 원서를 사서 읽어봐야겠다 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난해(難解)했다. 그래서 최민홍 교수의 번역본을 놓고 비교하며 읽었는데 이게 뭔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후에 틈날 때마다 이 책을 들여다봤는데 애매모호한 게 머리에 팍 와닿질 않다가 엊그저께 그걸 다시 읽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한 페이지를 두고 장장 50년을 씨름했는데 이제야 제대로 파악이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와중(渦中)에 오늘 손주가 왔으니까, 인생에 오묘한 날이다. 50년 동안 고민했던 문제가 머릿속에서 풀리면서 무에서 태어나다시피 한 손자를 안아본 날이다. 나의 득도가 우리 손자에게 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게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강의는 전문적인 논리학의 문제가 게재되어있기 때문에 설명이 조금 난감한데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프레게(Frege)는 근세 유명한 수학자며 논리학자인데 비트겐슈타인도 공학자였고, 러셀도 역시 수학자고 화이트헤드도 수학자다. 이 당시엔 사이언티스트(scientist)들이 분석철학의 주류를 이뤘다. 

 

러셀의 기술 이론 요약 : 프레게의 작품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이 논 중 된다. 산술(arithmetic), 순수수학(pure mathematics) 등은 논리를 수학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의 원리와 순수수학을 인간의 언어의 논리에서 구한 것이다. 현대철학의 과제 사항이 전부 산술과 순수 수학이라는 게 연역적 논리, 즉 삼단논법을 발전시키는 논법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해서 모든 인간 언어의 논리적 구조는 연역 구조(deductive logic)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칸트는 산술이나 순수 수학의 수학적 명제들을 종합 명제(synthetic logic)로 봤다. 다시 말하면 경험 명제로 봤다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봤다. 종합 명제를 경험에 기초로 한 것이라고 봤다. 종합 명제의 반대는 분석학(analytic)이다. 연역 구조는 대 전제를 연역적으로 해서 분석만 하면 되는 거니까 이것은 새로운 사실이 추가가 되는 게 아니다. 이것은 경험과 관계가 없다. 순박(淳朴)한 논리적 장난에 불과하다. 칸트는 수학이란 명제도 시간과 관련이 있다고 봤다. 시간 속에서 수학을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이란 개념은 전혀 시간하고 관련이 없다. 일 더하기 일이란 것이 시간과 무슨 관계가 있냐? 그것은 뇌에 연역 구조의 장난이다. 수학의 원리를 논리학자들이 풀려고 한 게 20세기 들어서였다. 논리학으로부터 순수 수학을 발전시킨 것은 화이트헤드와 러셀이 지은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이 방대하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역작이고 대작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수학과의 어떠한 학생도 이 책을 읽지 않는다. 결국 수학자들과는 동떨어진 철학적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은 "논리학으로부터 순수수학을 발전시킨" 이 책, 결국 수학은 논리학이다. 논리학이란 뭔가? 우리 언어를 지배하는 법칙인데, 논리적 구조라는 것은 주로 관계항들의 장난이다.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냐? 그것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났다. 그건 논리학이 아니다. 그건 경험적 사실로 확인해야 되는 것이다. 이런 건 수학이 아니다. 생물학 같은 것도 수학이 아니잖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T-cell이 있다거나 킬러 세포가 있는 걸 발견하는 것은 수학이 아니다. 수학이란 것은 우리말을 이해하게 만드는 어떤 논리적 구조, 이게 수학이다. 그런데 수학이란 분야에서 언어를 발전시켜나간다는 게 쉽지 않다. 이 책에서 유명한 수학원리(principia mathematica)의 자긍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해가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점점 명백해졌다. 철학적 문제의 대부분이 논리학에서 말하는 통사론(syntax)이란 게 말들을 엮는 구조인데 구문론을 광의적으로 써야 하지만 철학의 많은 문제가 인간 언어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명료해졌다. 20세기 서양철학의 주류가 분석철학이고 그 성과를 말하는 것인데 분석철학은 수학을 논리학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에서 생겨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철학의 많은 문제들이 문법의 오류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통사(Syntax)는 말들을 어떻게 엮느냐? 거기에 문법 규칙이 정확하면 그런 이론이 나올 수 없는데 착각해서 그런 많은 이론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이론이라는 게 알고 보면 화려한 이론 같지만 문법적 오류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목사가 휘양 찬란한 이야기를 하지만 논리학자들이 들어보면 저게 문법이 틀린 건데 이런 식이다. 단순한 문법적 오류를 가지고 우리가 대단한 철학인 것처럼 잘못 생각해 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근세 대표적인 인물 프레게, 카르납(Carnap), 아인슈타인 등은 서로 친구인데 물리학, 수학에 대가들이다. 카르납은 모든 철학적 문제가 통사적(syntaxtical)이라고 명료하게 말했다. 통사(Syntax)의 많은 오류를 피할 수만 있다면, 그걸 제거하면 철학적 오류는 완전히 풀리거나 해결 불능으로 정확하게 판명이 날 것이다. 문법적으로 말을 잘 만들면 해결되거나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이 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카르납의 이러한 주장은 조금은 과장된 면이 있다. 그러나 철학적 통사론의 유용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태껏 서양철학을 지배해왔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엄청 중요하다. Theory of description을 제시하고자 하는 테마의 분위기는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구원이 있냐, 없냐는 얘기를 가지고 철학적 논의를 할 게 아니라 단지 그것은 언어적 오류가 통사론적으로 계산해보면은 틀렸다는 이야기다

 

THESE  : 러셀의 기술 이론2

 

러셀의 기술 이론 요약 : 러셀은 수학이라는 것을 논리학으로부터 발전시켰다. 수학을 논리학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은 대단한 일이긴 하나 현대 수학자들은 그 분야를 공부할 여력이 없으니까 내가 보기에 그 책은 안 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은 통사(syntax)다. 의미론이라든가 발음의 문제라든가, 낱말 품사의 문제가 아니라 품사들을 엮어가는 통사 그것은 정확한 규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 규칙에 따라서 철학적 문제를 공식화(formulation)를 카르납(carnap)이라는 사람이 굉장히 강하게 그것을 주장했는데 자기가 보기에 너무 과격하기도 하지만, 그 엄청난 철학적 문제의 본질을 깨닫는데 훨씬 더 유용한, 그런 방법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유용성을 기술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간결한 설명에서 그것을 입증해 보겠다. 플라톤이나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서양철학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존재(存在)라는 문제다. 예로 책상 위에  돋보기가 있다.(There is a glass on the table) 여기 책상 위에 돋보기가 있다에서 "이다"(is)가 돋보기가 있는 것이지 [존재한다고 말]을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말은 굉장히 우수꽝스런 말이라는 것이다. 문법적(grammatical) 오류를 이야기 하는 것인데, 영어로 "있다"[is]는 책상위에 있는 건데, 존재한다로 표현하는 게 러셀은 옳지 않다는 말을 한다. 왜 그러냐 하면 존재(Exist)는 본디 라틴어에서 왔기 때문에 사실 영언엔 없는 말인데 우리에게도 존재한다는 말은 낮설은 게 서양에서 유래된 것이지 우리에겐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존재론이 문제가 되느냐? 있음(it is)과 존재( beeing)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이다. 존재(beeing)라는 것은 불변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저기에 나무가 있다고 하면 그 나무는 끝까지 불변해야 한다는 의미다. 존재는 진리(truth)의 대상이어야 한다. 서양철학은 존재라는 의미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기술(Description)이라는 게 "The present president of the U.S"를 이야기하면 오버 마가 연상되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존재나, 물건이나, 사람의 속성(屬性)을 가지고 특정한 사태를 지시(designation)할 때,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어떠한 성격에 의해서 특성(property)이 지시될 때, 이것을 기술(Description)이라고 부른다. 2000년에 오버마를 들어봤냐? 설령 들어봤다 해도 이름엔 어떤 정보가 없다. 이름이란 것은 약속이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 하면 알아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속성 자체가 어떤 부분을 지시했다고 하더라도 특정적이긴 한데 이 말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누군지 몰라도 이 말은 할 수 있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 여기서 차기 대선 후보의 이름을 거론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경선에서 최다 득표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정확한 것이다. 순수기술은 그 자체로 무엇을 지시(designation)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 강해"의 저자는 기술구인데 누군지 몰라도 로마서 강해의 저자라는 말은 누구든 할 수 있는 말이다. 누가 저술했든 저자 한 사람은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기술이 온전한 건 아니다. 그 자체로 어느 문장에 들어가 쓰이냐이지, 그것 자체로 누구를 지정하지는 않는다. 또 이건 이름하고 다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구사하는 언어의 대부분이 기술(Description)이다. 역사적 사태라든가, 예를 들면 1592년 전라도 앞바다를 굳게 지켜서 왜놈의 침입을 막은 제독. 이런 게 다 기술(Description)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를 많이 제시한다. 예를 들면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라는 문장이 상식적인가? 아닌가? 아주 상식적인 명제다.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황금산이라고 대답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존재하지 않는 게 존재하는 게 된다.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모순(矛盾)을 일으키게 된다. 황금산의 경우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존재성이 부여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둥근 사각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게 무엇이냐고 한다면 둥근 사각형이 될 것이고 결국 둥근 사각형에 존재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러셀은 "Theory of description"을 발간하게 된 이유가 이러한 종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썼다. 내가 생각하기에 서양사람들이 존재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파르메니데스 때부터 신비(Mistic) 한 일이다. 이게 종교적이다. 알고 보면 오르페우스 종교, 철학적 문제가 우주의 문제고 궁극엔 신의 문제로 귀결된다.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건 감관으로 확인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어퀘인턴스(acquaintance) 론 확인이 안 되는 건데 허구를 놓고 신은 존재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나 라운드 스퀘어(roundsquare)가 존재하는 것이나 똑같은 말이다. The so & so라는 게 불특정 다수에 대한 지시(designation)가 아니라 이번 선거에서 최다의 득표를 얻는 사람처럼 특정된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천만 표를 얻는 사람으로 할 땐 한 명이 나올 수도 있고 또 몇 명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a so & so가 돼서 특정이 안 된다. 따라서 최다의 득표자처럼 특정 지을 수 있는 말을 컴프릿 디스크립션(compleat description)이라고 한다. The so & so라고 하는 그러한 문장은 바르게 해석이 되면 The so & so라고 하는 것은 사라진다. 잘 분석하면 그 구문들은 분해돼서 사라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게 존재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이다. "Scott was the author of waverly" 여기서 스코트(Scott)는 이름으로 고유명사다. 그런데 러셀의 이론에선 이름은 완벽하게 의미가 없는 게 된다. 만약 내가 터키에 가서 김용옥 하면 누가 알겠는가? 아무 의미가 없다. 고유명사는 존재한다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길을 가는데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은 "저기 저 사람" 하고 손가락으로 지시하지, 저기에 김용옥이 존재한다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있는 게 있다"라고 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것은 통사(syntax)가 아니다. 사자를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사자를 가르쳐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공원에 데려가서 "어! 저게 사자다" 그러지, 거기서 "사자는 존재한다" 그런 말은 안 한다. 고유명사 중 진정한 건 "거시기" 밖에 없다고 한다. 영어로 하면 "it, this that"같은 거다. 고유명사는 어떤 것이든 다 똑같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고유명사는 축약된 기술(Description)이다. 이순신을 말할 때 "1592년 임진왜란 때 전란에서 우리를 구해준 위대한 명장"으로 우리 머릿속엔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이순신이라는 퍼네틱 심벌(phonetic symbol)이 아니라 기술 축약된 기술 구라는 것이다. 축약된 기술 구가 아니면 고유명사를 못쓰는 것이다.

러셀의 기술 이론에 의하면  "Scott was the author of waverly"라는 명제는 다음과 같이 풀어진다. One & only one man wroth W(waverly라는 소설), and that man was Scott. 이것을 더 논리적으로 풀면 There is an entity C such that the statement X wrote W is true if X is C and false otherwise moreover C is Scott. 마찬가지로 "The golden mountain does not exist"를 다시 쓰면 there is entity C such that 'X is golden and mountainous' is true when X is C, but otherwise, 황금산이라는 것은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X라는 명제 함수가 술 부화되는 사태에 대해서 진위를 우리가 가릴 수는 있지만 이것 자체가 대상을 지칭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존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금산은 언어화돼있다고 해서 존재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의 방편(upaya)에 가설이고 방편이라는 것은 그것이 주어가 아니고 술부적 사태다. X라는 명제 함수는 규정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황금산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존재의 문제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왜냐하면 황금산이란 것은 지명(Reference)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술부적 사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exist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가 해소되는 데, 모든 기술부는 그것을 잘 분석을 하면 그 존재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Existence can only be asserted of descriptions we can say the author of W Exist "but to say "scott exist is bad grammas or rather bad syntax this clears up two millennia of muddle-headedness about existence beginning with plato's Theoetetus. 여기서 고유명사는 존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기술부에 대하여 존재란 말을 쓴다는 것은 기술구는 분석을 하면 존재한다는 말은 사라진다. 20세기 난해한 기술 이론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로 귀결된다.언어라는 게 실재(實在)를 나타내는 보증수표가 아니다. 의미는 있으나 존재의 영역은 아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존재의 오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까지 모두 다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이데거의 주장도 환상이 가득 실려있다. 서양철학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이론을 가지고 여태껏 씨름해왔다. 러셀이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제껏 문제가 됐던 서양의 존재론이 해결될 수 있다고 장담한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은 언어에서 주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 언어에는 주어가 없다. "야! 가자, 밥 먹었니?" 우리의 행위 속에 이미 주어는 술부로서 작동할 뿐이지 주어란 존재를 따로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문장에 주어를 쓴다는 게 결국 우주는 신이란 존재가 있다는 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수학자 러셀의 헤드 논문으로  mysticism & logic이란 걸 쓴 이유가 뭘까? 모든 mysticism에는 4가지 원칙이 있다. 1) 인식의 방법이 모든 걸 한 번에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돈오돈수(頓悟頓修)와 같다. 즉 일시에 깨닫음을 얻는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된다. 2) 이 세상은 하나(unity)다. 모든 idea는 하나의 일사불란한 체게로 돼있다. 3) 시간을 거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 4) 선악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열락(悅樂)의 세계만 추구할 뿐 이 세상의 고통은 바라보지 않는다. 이런 미시티시즘(mysticism)이야말로 존재론의 오류(誤謬)다. 

러셀은 그것을 까는 것이다. 결국 모든 신비주의는 논리학(logic)으로 환원돼야 한다. 언어에 날개 달린 말(天馬)은 날개와 말의 합성이니까 인간의 상상력으로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못 보는 것도 다 있다고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의 영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직접지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일 뿐이다. 어떤 미시티시즘(mysticism)이 와도 우리는 절대 현혹될 수 없다. 철저한 기술(Description) 이론을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