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강의

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13강

해암 송구호 2021. 11. 24. 11:10

THESE : 만물은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

 

디일스 크란츠(Diels -Kranz) : 헤라클레이토스의 파편(fragment)을 모은 단편집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데 지금도 그의 프라그먼트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헤라 클레이 토스는 잠과 깸을 통해 감관 인식론을 설명했다. 매미가 7월에 우는 줄 알지만 여름엔 울지 않는다. 늦여름이 돼야 울기 시작한다. 8월 15일은 더위로부터 해방되는 날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됐다고 기념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fragment에 공통점(Common)은 감관기관의 인식을 긍정하는 것이다. 잠을 자는 동안엔 개인의 세계에 갇혀서 편견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반면 잠에서 깨어난 상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普遍的) 관념을 갖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눈으로 보는 것은 귀로 듣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눈으로 보는 것은 믿을 수 없다"라고 했다. 착각과 편견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육 근(六根) : 불교에서 육경이라고 해서 눈으로 깨닫고, 귀로 알아들으며, 코로 느끼며, 혀로 맛보고 몸으로 인지하며 의식을 통해 깨닫는다고 했다. (인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헤라클레이토스의 사고는 불교 사상과 정 반대다. 

 

 fragment 103 : 시작은 끝과 같다. 불과 물과 흙이 한 괘를 이뤄 순환한다고 믿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비슷하다. 도는 길이라고 했다. 로고스도 현상세계와 떨어져 있지 않다. 도를 존재론화하는 것은 맞지 않다. 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공통된 만물의 길이지만 만물 속에 내재할 수밖에 없다. 동네나 시간, 공간, 흙이 없이 길이 있을 수 있나? 물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헤라 클레이토스도 로고스를 동양적인 사고를 갖고 썼다. 그러나 서양철학을 하는 자들이 희랍철학을 후대 서양철학 사유에 의해 왜곡(歪曲)시켰다. 희랍철학의 위대한 fragment는 헤라클레이 토스라고 생각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 출신이다. 에페소는 갈릴레이호수 북부 쪽에 있고 이 지역은 터기, 페르시아와 맞닷는 문명 지역으로 개명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유대인은 갈릴리 호수 아래에 있는 지역으로 문명에서 빗겨 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언어에도 Paradox가 많다. " 야 이놈들아 너희는 눈을 가지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목숨을 구하려 하는 자는 반드시 잃을 것이요. 등 예수의 fragment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가 내재한다. 예수와는 5 ~ 600년의 차이가 나는데 예수는 갈릴레이 사람이다. 헤라클레이토스와 동일한 문화권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사상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시작은 끝과 같다는 말은 노자의 사고와 일맥상통한다. 노자는 도를 굳이 말한다면 큰 것이다. 큰 것은 간다는 것이다. 가는 것은 멀리 간다는 것이다. 멀리 간다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 도덕경 25장)

 fragment 64 : 벼락은 우주를 운전한다. (thunderbolt = fire) 불은 제우스의 무기다. 불은 도와 같은 의미다. 인간의 영혼은 마를수록 위대하다. 술은 영혼이 젖는 과정이다. 불이 물이 되면 죽는다. 불이 오래되면 흙이 되고 흙이 오래되면 물이된다. 물이 오래되면 다시 불이 된다고 해서 불, 흙, 물은 서로 조화롭게 순환하는 것이다. 

fragment 64 : 모든것은 환치될 수 있다. 불은 만물로 만물은 불로, 그것은 상품이 금으로 금이 상품으로 환치되는 것과 같다. 우리의 몸도 36.5도 불로 타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로 타고 있어 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변하는 모습에서 자기의 모습을 유지한다. 불은 변화의 철학이다. 불만큼 모든 것을 환치할 수 있는 변환자는 없다.

 

조화(調和) : harmoney는 product of opposite와 병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대 개념 없이 조화로움을 말할 수 없다. 피타고라스의 하모니는 숫자적인 구조의 조화로 정적이다. 피아노 건반에서 건반을 두드리면 진동이 발생하는데 배음(倍音)은 진동을 하지만 배음이 안 되는 하르모니아(Harmonia/조화의 여신)의 관계 속에서 반대되는 것은 동일한 배음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재즈처럼 전혀 다른 것들을 포함,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개념이다. 역동적 하르모니아를 불이라고 한다. 그것을 전쟁이라고 표현하는데 전쟁은 대립적 투쟁이 아니다. 하르모니아 자체가 투쟁적인 상태에 놓인 것을 말한다. 한 예로 활에 줄이 매어져 있을 때 활대에 가해지는 응력은 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우주는 활과 같다. 우주 자체가 활처럼 텐션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활에 줄이 끊어지는 순간 에너지가 사라지듯 우주가 텐션을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전쟁과 평화는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희랍철학의 왜곡 : 디일스 크란츠의 fragment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내치고 하르메니아를 정통으로 삼은 사상가다. 희랍철학의 왜곡을 가져왔고 플라톤의 인식에 의해 기독교가 왜곡됐을 수 있다. 예수의 세계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신학자 문동환 교수는 지금 기독교는 바울교라고 말한다. 예수는 바울이 말하는 그런 예수가 아니었다. 예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였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의 제자가 아니었는데 그를 그들의 제자로 삼아 서구 문명을 흉악한 문명으로 만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