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서양철학사 54강
THESE : 성염의 아우구스티누스 2 / 삼위일체론[성부, 성자, 성령은 관계 개념]
지난 시간에 강의를 들은 사람은 성염 선생의 강의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소화된 말씀을 하시고 계신지 잘 알것이다. 우리가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얘기할 때, 이것이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런 이성적인 탐구에 있어서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의 감정적인 세계, 감성적인 세계, 예를 들면 사랑이라든가, 나의 마음을 개방한다든가, 보다 보편적인 진리로 접근하려는 삶의 자세가 근원적으로 깔려있다든가, 이런 등등의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아마도 그런 문제까지 간다며는 인간의 지식을 논하기 앞서서 그 사람의 성품, 진실된 어떠한 타고난 재질,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신앙이라는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까? 신앙을 단순히 하나님이라는 존재자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좁은 카테고리 안에서 신앙을 보았기 때문에 항상 이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믿음, 신앙, 계시라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자세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해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만 해도 우리나라에 50종이 나와있다. 그런데 어떠한 번역서 보다도 성염 선생의 번역은 라틴어 원전을 아주 충실하게 번역을 했음에도, 선생님은 전 책을 아주 쉽게 요약해 놓으셔서 우리가 그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서문이 나는 상당히 좋다고 본다.
도올 :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의 기질적 차이에 관하여 재미난 얘기를 하셨는데 그런 것부터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다. 헬레니즘 하면 그리스 철학과 문학 그리고 로마인들의 에 정치와 사회 법률 이런 것들을 한데 뭉그려서 말한다. 펠로폰네소스 바다 하나를 놓고 양쪽에 있는 나란데 연극을 말하더라도 그리스는 비극 작품들이 남아있고 희극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연극제를 할 때 거꾸로 세 편이 희극이고 한편이 비극을 무대에 올린다. 그리스는 비극 세 편에 희극 한 편을 올린다. 그런데 그 한 편이 남아있지 않고 로마인들은 반대로 한 편의 비극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로마인들은 비극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도 시대에 와서 신의 본질, 그리스도의 정체, 삼위일체의 신비, 이런 것을 갖고 모든 철학적 개념과 용어와 논지를 총동원했다. 그러나 로마 쪽에 오면 못 알아들었다. 왜 저걸 가지고 고민하나? 그러니까 철학도 로마에서는 인생철학인 스토아 철학만 살아남고 그리스인들이 사유를 했던 형이상학이나 논리학은 거의 사멸했다. 이들의 실상엔 맞지 않았다.
여러분들이 그쪽에 여행 가시면 아름다운 아가씨가 걸어갈 때 로마의 청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다 다시 돌아와서 앞에 와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야! 너 정말 예쁘다." 그렇게 말하고 떠난다. 이게 라틴계 젊은이들의 모습이고, 그리스의 청년들은 여성들을 슬금슬금 훔쳐보지 정면에서 쳐다보지 않는다. 우리가 유럽을 방문해 보면 지금은 인터넷에 포로노물이 판친다. 그런데 80년대만 해도 라틴계에선 포로노물이 거의 안 보인다. 왜냐하면 자기 삶에서 그걸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르만족의 구역 골목, 골목엔 포르노 가게가 있다. 그들은 점잖고, 선량하고, 근엄하게 산다. 그 이면이 결여돼 있었던 것이다. 낭만성과 근엄성이 조화돼 있는데 로마인들이 일 년에 삼분에 일이 축제였다. 삼분의 일은 법정일, 그날은 공판도 할 수 있고, 법률도 만들 수 있고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다. 삼분의 일은 불길한 날이기 때문에 해선 안 됐다. 그러니까 일 년에 삼분의 일 가지고 살아갔다. 그러면서도 제국을 끌어갔던 로마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이하 어거스틴)의 강론, 서한, 작품 속에도 그게 반영되어 있다. 하여튼 그리스 철학이 남긴 위대한 사변과 훈련은 인류에 영원한 유산이다.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 아이스 킬로, 소포클레스, 에우리 피데스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쎼익스피어 이후에 비극 작품이 하나도 없다. 그리스 비극은 1부는 전쟁(조), 2부는 살인(벌), 3부는 신(속죄)으로 구성돼 있다. 이후 비극의 모든 모델을 거기서 패러디(parody) 했다.
유럽의 철학적 사변도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인데 다행히 어거스틴의 두 사상이 합류됐다. 만약에 이 합류가 없었더라면 50년 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과 함께 사멸했을 것이다.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부터 휩쓸면서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반달리즘으로 알려진, 문화 파괴는 반달족이 저지른 문명 파괴 행위다. 이들에 의해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가 사라질 뻔했다. 그리고 헤브라이즘도 이상하게 변형된 것만 남았을 텐데 이 한 사람에 의해 종합돼서 그리스도교에 고이 간직되는 바람에 근대와 현대에 유럽 문명이라는 유산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도올 : 아까 누가 질문에 일루미 나치오(illuminate/ 조명)라는 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각(覺)과 같다. 신의 본질이 소통이다. 인간도 근본적 특징이 소통이다. 그것이 안 되면 왜곡되고 진리가 훼손된다. 도올 : 어거스틴은 언어라는 지시 수단이 있어서 컵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게 아니라 컵을 직감적으로 안다는 것인가? 아니다. 지식은 언어가 없으면 이걸 생각하지 못한다. 언어가 있어야만 어려서부터 훈련받으면서 그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에 대한 선지식이 없다면, 혹은 경험으로 쌓아간 게 없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기호는 사물을 가리킨다. 오늘 저녁에 나는 아무것도 안 먹었다. 할 때 "I eat notthing"에서 notthing이 가리키는 사물이 없다. 여기서 그는 16살 먹은 아들과 사흘간 대화를 거쳐서 그 언어철학을 풀어갔다. 언어철학에서 굉장히 중시하는 책인데 어거스틴이 아들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이 주신자)와 토론을 통해 완성했다.
도올 : 언어문제에선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데 선지식이라는 게 언어 이전에 뭐가 있나?
경험에서만 온다. 언어가 없이는 이 사물을 떠올릴 수가 없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기호를 배우면서 자라는데 기호가 다는 아니다. 언어라는 기호가 없인 배울 수 없다. 그러나 정말로 가르치는 것은 조명이다. 신이 말씀을 한다. 성자와 그것을 소통시키는 게 성령이라고 하는 삼위일체론까지 가는데, 언어가 지(知)에서 전하는 진실을 말하지 않을 때는 얼마나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느냐에 대하여 신국론에서 여러 차례 말한다.
도올 : 삼위일체론을 번역했는데 이 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다.
그 사람의 사상적인 대표작은 삼위일체론이고, 이 책이 사실은 어거스틴의 대표적인 인간학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못 알아듣는다. 유일신 사상의 경우 유대인들의 구 약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칫하면 우상숭배에 빠지고 다신론에 빠지지 유일신 사상을 알아듣지 못 한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어거스틴이 어떻게 접하냐 하면은 지난 강의에서 보았듯이 조가비로 지중해 바닷물을 떠서 작은 구멍에 집어넣을 수가 없듯이 방법론을 뒤집어 놓는다. 그 앞에는 모든 신학적인, 철학적인 개념과 용어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리스 교부들이 했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걸 이 사람은 알았다. 아, 인간은 신의 모상이다. 따라서 인간을 해부해보면 신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저 사람이 정립한 삼위일체 신학을 그리스도교가 채용하고 있고 모든 용어와 논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도올 : 삼위일체론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동일한 실체라는 개념으로 정립된 것이고 그래서 거기에 대한 왈가왈부가 있었는데 어거스틴이 초기에 이론을 정립한 걸로 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교단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가장 큰 문제는 아리우스 일파가 예수는 순수한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버림받아 십자가에서도 "주여! 주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는 절규에 대하여 "신이 인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왔다"는 예수의 신격을 인정하지 않는 도케티즘(Dketismus)이나, 가연설을 로고스의 가연으로 본다면 하나님에게 돌아가니까 내가 기쁜데 쇼를 하는 것이라는 가연설적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 주장은 교단에서 수용을 못 한 것이고, 기독교에서는 유일 신관이라고 하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예수도 신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게 신이냐? 인간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의가 되는 이런 모든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어거스틴이 취한 태도는 삼위일체에서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가운데 어떻게 삼위를 각각 인정해주느냐 하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논리가 전달되지 않았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흘리듯이 말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관계로 얘기를 한다. 그걸 알아듣는데 800년이 걸렸다. 교회의 많은 토론과 연구를 거치면서 그들의 의식 속에서, 그런데 왜 800년이라고 그랬나? 콘스탄티누스에서 1차, 2차, 3차 회의를 하면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회의 이후에도 한참을 지나간다. 그들이 첫째로 이해를 못 한 이유는 어떻게 신이 사람이 되느냐였다. 사람이 되느냐? 말하는 투로 볼 때 신적인 존재 같은데, 의식 속에는 인간은 벌레 같은 존재고, 죄 많고, 흙으로 사멸할 도대체 신이 인간이 된다는 건 얼토당토않았다.
나사렛 사람들은 하나님이 외아들을 보낼 만큼 사랑했다. 하는데 시편에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높이 치셨으면 하늘에 천사보다 조금 밑에 하늘의 별들보다, 세상의 모든 것보다 위에(시편 8편)있다. 그것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이건 버러 지고, 죄인이고, 이건 진흙 덩어리였다.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인카네이션(incarnation/ 육화)에 대한 선입견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외아들을 줄만큼 사람으로 사랑한 것이다.
지금의 교황님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자기 탈출, 하나님의 인간 체험, 이런 식으로 시적인 표현을 썼다. 왜냐하면 지금도 못 알아듣는 말이니까, 긍정적으로 인간을 본다면은 악의 문제가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문제를 줬을 때 나왔다. 이걸 주면 짐승 같은 데만 쓰지 절대 착한 짓 안 합니다.라고 했다. 인간들이 타락할 때 고백록에 나온다. 가거라, 내달려 가거라. 얼마든지 가거라. 내가 가서 안아온다. 이런 말이 나온다. 신이 자신만만한 것이다. 구원한다 이거다. 구원의 문제를 이렇게 본다면 신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란 테마로 신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걸 먼저 풀어야 삼위일체로 접근할 수 있다.
도올 : 신이 사람이 됐다고 한다면 거꾸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바로 그거다. 사람이 된 이유가 인간들을 신적인 차원으로 올려주기 위해서다. 인간의 대표 하나가 신이면 온 인류가 한 덩어리이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이 온 인류가 구원받는다. 꼭짓점, 그물 이론이 있듯이 하나가 신이면 온 인류가 신이 된다. 그 차원을 그분은 가르쳤는데, 신학자들은 못 알아들었다. 먼저 그걸 알아들어야 그만큼 사랑받는 인간이라는 거, 그렇잖은가? 어거스틴은 수용하는 건가? 그렇다. 그만큼 사랑받는 게 인간이다. 그분이 자기 정체를 이야기하는데 하나님과 자기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처럼 자꾸 말을 한다.
그러니까 유일신이 둘이 된 게 된다. 유일신은 둘이 아닌데, 그 문제가 신학자들이 고민하게 되는데 그것뿐 아니라 내가 영을 보내면, 아버지의 영을 보내면, 이러한 존재 양식을 크리스천들이 알아들었다. 이걸 알아듣기 위해서 관계가 어떤 건가 해서 자칭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낳아야 한다. 그것도 제우스처럼 여신이나 여인을 건드려서 낳는 게 아니고 지중해 연안의 신화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할 때 영원하신 아버지가 계시고, 그가 태초에 발설하신 말씀이 있은데 그 말씀이 아들이고, 그 말씀이 자기가 아들이다.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이다라고 정리했다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과 관계가 발생한다. 아들이 안 생기면 아버지 아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 있게 된다. 그리고 둘 사이에 사랑의 관계, 인식의 관계가 어떤 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또 관계라고 말할 때 실체를 얘기했는데 실체는 하나다. 실체 속엔 아버지, 아들, 영이라는 관계가 발생한다. 어거스틴의 말에 따르면 관계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따르면은 우유(偶有)에 불과하다. 친구와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하면은 따로따로 실체가 있고 실체 사이에 오가는 어떤 관계인데 하느님에게서는 실체와 우유의 구분이 없다. 유유가 없고 관계도 신에게는 실체적인 것이다. 여기, 언제, 스승과 제자의 관계, 어거스틴은 실체 하나에 9개의 우유가 사건(accident)개념으로 붙는다고 이야기한다. 여기 컵이 원래는 흙이었는데 뼈가루를 섞어서 컵을 만들었다. 그러면 흙이 컵이란 형태가 됐다. 형태만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물질, 질료라는 것은 바뀐 게 없다. 이런 식으로 변화를 설명했다.
이것이 깨져버리고 흔적도 없을 때나, 나무가 타서 재로 변하면 그때는 실체 자체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는 설명을 했다.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에게도 어떤 개념을 넣어가지고는 한 신에게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유일한 실체, 관계가 발생하는데 그 관계는 본질적인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 신과 같은 것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그래서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삼위일체 신학으로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영원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누구를 파견한다. 그게 파견받은 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신적인 지상 존재를 끝마치고 난 뒤, 신앙인의 공동체를 인류사를 흙이 모든 생명을 발생시킬 때 하나님의 영이 흙 속에 가득하다는 말이 있다. 씨앗 하나에서 큰 나무가 나올 때 그 말을 알아듣는다. 그런 뜻 같구나. 어떤 힘이 있길래 작은 씨앗이 이렇게 큰 나무로 키워내나라는 생각을 하듯이 이렇게 모든 생명의 원리로 삼위일체를 정립한 것이다.
도올 : 그런데 삼위일체론을 아무리 어거스틴이 이야기를 해도 현대인한테 설득력 있게 안 온다. 무슨 얘기냐 하면은 내 생각으로는 사실 삼위일체라고 하지만 삼위일체의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문제다. 성령이란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인 거고 복음서에도 보면은 핵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그것도 가톨릭에서 하나냐, 둘이냐 하는 것도 사실 개소리다. 하나면 어떻고, 둘이면 어떻고, 백이면 어떻고, 천이 면 어떠한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유비(類比) 관계로서 예수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는 꼬치꼬치 따지고 그러는 게 아니라 무한한 사랑을 가진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관계, 탕아가 아무리 못할 짓을 해도 탕아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이런 비유적인 얘기지 이게 무슨 실체냐, 아니냐 이원론이냐, 다신론이냐 이런 것들이 가톨릭에서 이런 것들을 문제 삼았기 때문에 이게 천하에 유치한 종교가 된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든다.
성염 : 가톨릭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부가, 가톨릭,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한다. 신의 본질을 사랑이라고 했을 때 어렴풋이 알아듣는다. 신의 본질을 소통이라고 했을 때 알아듣는다. 왜냐하면 소통은 혼자서 못한다. 영혼으로부터도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사렛 사람이 설명했을 때 빈소리로 알아듣지 않고 글자 그대로 알아듣기 위해서 앞서 말씀하신 800년 간 토론하고, 니케아 신경이라는 게 있다. 신앙고백이 있다. 지성인들이 읽어도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다.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신에게 영혼으로부터 우리라고 쓸 수 있고 소통을 정체가 사랑이라고 정의를 했다. 제자에 의해서,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 예수의 설명이 근원적인 어떤 근거가 있다.
도올 : 근본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그 메시지는 구원론적 명제로서 그 나름대로 우리가 얼마든 인정할 수 있는데 그게 동일 실체냐, 아니냐는 성서에 있지도 않고 이것은 희랍어에서 논의된 우지아라는 개념을 가지고 라틴교부들이 신을 갔다가 우리가 예수를 신으로 하게 되면은 이게 다신론이 되지 않냐라는 반박들이 많이 들어오니까 위상은 다르지만 하나의 실체다. 이런 식으로 유치한 변명을 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심각한 논변을 펼치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훨씬 심각하다. 밖에서 볼 때 유일신이든, 12 신이든, 우주에 가득하고, 부엌에도 안방에도, 화장실에도 지붕에도 하나씩 있어도 상관이 없다. 세계를 볼 때 통일적으로 본다.
가령 천체물리학자들이 그랬다. 130억 광년의 어떤 한 우주가 꽝하고 폭발했다는 빅뱅이론을 이야기했다. 지금은 우주 팽창을 보고 그게 거의 사실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 앞 시간은 허수 시간이라고 물리학적인 설명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나사렛 사람 예수가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얘기하고, 인류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지를 얘기하고, 그다음에 인간 전체가 형제이기 때문에 절대 증오와 전쟁과 착취가 아니라 사랑과 분배를 가르치는 중 은연중에 자기 정체를 한마디, 한마디씩 얘기했는데 그 말을 자구적으로 알아들었다.
왜냐하면 한 분의 신에게서 창조됐는데 왜 아들이 와서 세상을 구했다고 하는가? 이분이 누군가? 이런 의문을 갖고 접근한다.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듣기 무척 힘들어 한다. 안에 있는 사람들마져도 얘기하는데 마찮가지로 사랑하면 진리가 보인다고 한다. 그 진리라는 자체에 그리스도라는 분에 대한 사랑을 해가면은 그분의 위상에 대하여 맞다는 걸 알게 된다.
도올 : 그런데 그 위상은 예수 자신의 인식이고 예수가 인간이기 때문에 사실은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만약에 복음서가 희랍의 신화와 다르게 감동을 주는 것은 제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얘기들이 아니라 인간에 갈릴리 지평에서의 이야기를 적었기 때문에 가슴 조리고 , 열두 제자도 인간이고 그러니까 아리우스 같은 사람의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평범한 인간으로 격하시킨 것이 아니라 신의 유일 존재라고 하는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의 인성을 강조했다. 예수의 인성을 강조했을 때 이것이 두 개의 신이 아니라 하나의 신 속에서 예수의 자기 인식이 하나님에 자기 아들로서에 자기 인식이었다고 하는 그런 얘기를 논의한 건데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학에 삼위일체를 기독교가 선택함으로 유일 신관이라는 걸 유지하면서도 자기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있는 것인데 삼위일체론에 감명을 받지 못했다.
우주를 코스모스라고 부르기도 하고 카오스라고 하기도 한다. 코스모스라고 부를 때는 여기에 지적인 것이 모여있고 역사도 거기에 따라 전개된다. 그런데 카오스는 손댈 길이 없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전쟁도 있고 비극도 많지만은 코스모스 세계관은 조금 고치면 쓸만하다. 우주가, 인류가 민족들의 역사가, 그런데 카오스는 손댈 여지가 전혀 없다. 어차피 혼돈이고,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관점이 있다. 아까 악이라는 문제가 나왔다. 악이라는 문제 때 우리가 걸어가면서 꽈당 하고 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도 넘어질 수 있다. 그런데 심하게 넘어지면 일어나는 게 힘들다. 누가 붙잡아 줘야 한다. 인간이 자기 의지로 타락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일어나는 힘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 그래서 거기에서 구원이라는 개념이 들어오게 됐다. 인류사를 돌이켜보면은 구원 없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지금 지구 상에는 10만이 아사를 한다. 미국의 침략으로 아랍사람들이 100만에서 200만명이 죽었다. 그러면 200만의 과부가 생겼고 500만 내지 1,000만 명의 고아가 생겼다. 이러한 비극이 그리스도교가 앞장서서 하고 있다.
정의의 십자군, 사탄을 무찌르러, 이러한 문제를 놓고 봤을 때 지구상에 창궐하는 악,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사람 3명이 죽은 적이 있다. 그 반격으로 팔레스타인 3천 명이 죽었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 악의 문제가 스스로 개인적인, 집단적인 문제가 해결되느냐? 종교인의 입장에선 구원하는 신이 함께 손잡아주지 않으면, 인간의 의지와 신의 의지가 합작해야만 이게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이뤄지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게 하느님의 아들로 자기를 자처하시는 분에 행적에서 출발한다. 악의 문제를 나는 두 가지로, 부처님의 미소 세상일에 초탈해 계시는 생로병사에 어떤 일이 있어도 초탈해 계시는 어떠한 미소, 가톨릭 신자들이 방에도 걸고 목에도 거는 십자가에는 죽어있는 시체가 걸려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예수가 아니라 시체가 걸려있다. 죽어가는 신의 아들로 자처한 분이 죽어서 매달려 있는 그 속에서 고통의 해법을 찾는다. 이 문제를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유비다라고 할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인 게 신앙고백에도 있고 그렇다고 그게 신이 직접 한 것이다라고 위에서 말한 것이 아니고, 신국론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역사성이다. 역사성이 리얼리티를 띠려면 그 사람이 와서 내가 아버지가 보낸 아들이다. 이게 참말이어야지 유비 거나 우리에게 보여준 패러다임이라면 구원도 안 일어난 것이 된다. 그게 삼위일체를 견지하고 있고, 지금도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첫대목에서 이걸 읊조리고 있다. 그러니 이런 비판이 나왔을 때 이들에겐 그렇지 않다.
도올 : 지금 말씀하신 게 좋은 말씀인데 십자가에 걸려있는 예수, 현실적으로는 인간 세상에 엄청난 악이 일어나고 있고 그 고난을 같이하는 예수를 통해서 예수의 의지, 하나님의 의지, 우리의 의지가 다 결합돼서 인간을 구원하는 그런 말씀과 불교는 인간의 모든 죄악이 근원적으로 인간의 집착이라든가, 인간의 욕망이 권력자들의 집착에서 생기는 것을 근원적으로 해탈시키고, 해소시키는 가운데 인류가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는데 어느 문제든 그 나름대로 논리는 있는 것이다. 그런 긴박한 문제에 가서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더 유용할 수도 있다. 기독교인이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적극적으로 앙가즈망(engagement)을 하니까. 단지 그러한 예수의 고뇌와 십자가의 의미가 삼위일체와 같은 유치한 틀을 가지고 말하니까 개인적으로는 유치하다.
삼위일체 교리가 나사렛 사람이 십자가에서 비극적으로 죽어간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얘기하고 그의 죽음으로 시발되고 이루어졌다는 이 모든 것이 허구가 돼버리고 또 사기가 된다. 삼위일체가 사기가 되는 게 아니라 그의 정체성(identity)을 살려준다. 패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예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도 있고 논리가 있다. 처음에 메시아라고 자기의 정체성을 잡았다. 그러니까 메시아 전략이 필요했다. 경제문제도 있고 군사문제도 있고 정치문제도 있고 그때 빵으로 경제를 살리자고 할 때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그 다음에 권력, 나한테 무릎 꿇으면 다준다고 했을 때 하나님 전 외에선 무릎을 꿇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성전에서 떨어지면 다들어주겠다고 할 때 하나님에겐 기적이 아니라 경배가 종교다라고 하니까 악마가 다음에 보자 하고 물러간다.
다음에 보자가 십자가다. 그 때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 그러면 내가 믿을게, 하느님의 아들인데 그의 말처럼 손 털고 내려오길 기대했다. 그런데 죽어버린다. 하느님의 아들이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우는 소리를 하며 죽었다. 이 비극 앞에서 어떻게 알아듣느냐? 그분이 부활의 신앙이 있지만 그의 죽음이 패자로서 죽은 게 아니라 전 인류의 죄를 아버지 앞에서 속죄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크리스천들은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아니다. 이게 유비도 아니고 하나든, 둘이든, 셋이든 넷이든 무슨 상관이냐 이런 논리도 아니고 우리가 나사렛 사람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수긍하기 위해서 세계 20억 명의 크리스찬이 주님이라고 부르려면은 그 앞에 아버지와 아들의 말이 사기가 아니어야 된다. 이런 심각한 문제가 걸려있다.
도올 : 예수와 하나님과 성령이 일체다. 하나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삶에 모든 행적이 인간 전체를 구원할 어떠한 모델을 구현했다고 하는 얘기가 구태여 삼위일체라는 장치를 쓸 필요는 없다. 예수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고 그의 제자 바울이 그 얘기를 한다. 신앙과 이성 이 두 가지를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론으로 어거스틴이 선택했기 때문에 끝까지 지성적으로 철학적으로 사변적으로도 그 문제를 풀려고 한다. 그런데 풀 때 간단하게 모순율을 적용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이건 딴 얘기가 아니냐? 이런 식의 해법이 아니고 위대한 종교 진리엔 위대한 패러독스(paradox)가 있다. 거기에는 우리 인간들의 지성엔 밝혀있지 않지만, 언젠가 인간들이 신 앞에서 진리를 왜 네가 찾아가느냐, 진리는 삼위일체라는 즉 소통을 본질로 하는, 말의 발설을, 사랑을 본질로 하는 그 신 앞에서 그 신을 얘기하고 따라서 그 영혼의 경지에서는 우리가 그 앞에서 할 얘기는 삼위일체뿐일 것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우리는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내려는 모든 이성적인 능력은 동원해야 한다. 이게 삼위일체 신학의 근간이다. 따라서 철학의 실체 개념, 우유 개념도 써보고 유일하지만 혼자는 아니다는 감성적인 용어도 써보고, 골방에서..
도올 :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삼위일체라는 어떤 쉐마틱한 논의가 아닌 예를 들면은 어거스틴이 삼위일체를 쓸 때는 인간론이 핵심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모상이기 때문에 인간을 분석하면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난 이 포인트가 삼위일체의 핵심이 된다면 거기에 동조한다. 무슨 얘기냐면 하나, 둘, 셋엔 관심이 없다. 그런 얘기는 아무리 해봐야 전달이 안 되고 의미도 없다. 삼위일체가 삼위이지만 삼위를 묶는 하나의 실체는 딴 게 아니라 철학적 논의가 아니고 소통이고 사랑이다. 요렇게 하면 다 해결된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접근을 했고 크리스천에겐 이론적으로 사랑이 남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 둘, 셋이 다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구원받으면 되었지. 그런데 나사렛 사람 예수의 말을 정언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알아듣기 위해서 삼위일체가 정립됐다.
도올 : 아바, 아바는 가장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그런 실존적인 관계에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를 얘기한다면 그것을 전적으로 소통과 사랑으로 얘기한다면 기독교의 핵심은 풀리는 것 아니냐? 풀렸다고 하니까 됐는데 그것이 쓸데없는 패러다임이나 구세 사적인 사건을 알아듣기 위한 지성인들의 노력이다. 가장 빛나는 노력을 한 사람이 어거스틴인데 그가 위에서부터 접근해서 전혀 방법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신의 모상인 인간을 분석해보니까 인간 속에 그런 삼위일체가 들어있어서 이런 모습의 원형인가 보다 추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앙은 믿을만하다. 비합리적인 억측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그리스도교의 현장이다.